19화_니가 넘은 선. 데드라인.
1.
“헉. 헉... 저 왔습니다.”
“두호야 왔어? 바로 땀... 아니다. 숨 돌리고 바로...”
두호 형은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코치진의 말을 뒤로하고 정수기 옆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퉤.... 퉤!”
나오지도 않는 마른침을 억지로 뱉어내는 두호 형의 피부는 조금 전까지 로드
웍을 뛰고 온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건조했다.
“하아. 코치님. 바로 영상 좀 준비해 주세요.”
“준비돼 있어. 바로 들어가자.”
그리고는 바로 대전 상대의 영상 분석을 위해 안 코치님과 함께 사무실 안쪽
으로 들어갔다.
“와... 진짜. 나는 못할 것 같다.”
내 옆에서 함께 숨죽이고 있던 권창섭 선수는 두호 형이 사무실 문을 닫고 완
전히 사라진 뒤에야 조금 안심하며 말을 뱉었다.
“그러게요. 저도 절대 못할 것 같아요.”
지금 두호 형은 감량기간이었다.
두호 형의 키가 나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으니 180 초중반 쯤 될 거다.
거기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으니 평상시의 몸무게는 지금
의 나와 비슷한 90키로 초반정도가 나갔다.
그리고 WFC 웰터급 한계 체중은 170파운드. 77KG이었다.
“진짜. 두호 형 시합 준비하는 것 보면 항상 느끼지만. 사람 수명을 깎아먹는
것 같아. 안 그러냐?”
“저는 이번에 처음 봐서...”
“너도 웰터로 갈 거냐?”
“잘 모르겠어요.”
사실 내 격투기 멘토라 할 수 있는 두호 형을 따라 웰터급을 생각하긴 했었는
데, 요즘 두호 형 모습을 보면 이건 아니다 싶었다.
“두호 형 영상 분석중이니까 미트는 치지 말고. 맞잡기나 하자.”
“넵!”
지금 체육관의 모든 시스템은 두호 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한달도 채 남지 않은 두호 형의 랭킹 매치.
이번 상대인 랭킹 3위를 잡으면 드디어 WFC 타이틀 도전권을 얻게 된다.
두호 형은 나이가 있는 만큼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에 부응해 팀 피스트의 모든 사람들이 두호 형을 서포트하고 있었다.
“근데. 두호 형은 왜 웰터급으로 가신 거예요? 미들급이면 감량도 조금 더 편
하고 좋았을 텐데...”
“어? 너 몰랐냐? 두호 형 원래는 미들급이었어.”
“진짜요?”
“어. 라이징 FC 있을 때만 해도 미들급이었지. 그때 두호 형 장난 아니었어.”
“라이징 FC요?”
“너 진짜 이쪽 잘 모르는구나? 너 학교 다닐 때 한창 유행했을 텐데. 지금은
없어진 일본 격투기 단체 있어. 라이징 FC라고.”
아아.
알 것 같다.
한창 고등학교 다닐 때 이종격투기 붐이 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애들이 맨날
보던 시합이 라이징인가 뭔가 였었다.
“그런데 왜 미들급에서 한 체급 내리신거에요?”
“라이징 FC에서 미들급 챔피언에 있을 당시 아시아에서 두호 형에 대적할 선
수가 없었지. 그리고 그때 마침 WFC에서 두호 형한테 이적 제안이 왔고.”
“이적 조건이 체급을 낮추는 거였어요?”
“... 아니. 미들급으로 이적 했어. 그리고 데뷔전부터 내리 3연패를 했지.”
“...”
두호 형이 한창 전성기 시절에 3연패를 했었다고?
저 살아있는 인자강 같은 사람이?
“서양 애들은 우리랑 근질부터 달라. 두호 형도 팔다리가 긴 편이지만 WFC에
서는 그리 눈에 띄지도 않지. 그래서 체급을 낮춘 거야.”
“...”
“해서야. 예를 들어 키 177에 평체 80키로인 사람과 키 184에 평체 90키로인
두호 형이 웰터급으로 같이 감량을 한다면. 어떨 것 같아?”
“두호 형이 감량하기가 훨씬 힘들겠죠.”
“그렇지. 대신 계체량 이후 체중 리바운드도 두호 형이 더 많을 테고, 팔 다
리 리치 차이부터 기본 근력 차이까지. 많이 차이 나겠지?”
아.
그렇겠네.
감량의 고통 하나만 빼면 많은 부분에서 유리하구나. 덩치가 큰 사람이 아래
체급으로 내려가면.
“해서야.”
“네.”
“안 코치님이 널 두고 역대급 재능이다. 미래가 기대된다 이야기 하지만. 아
까 말 했지? 두호 형이 미들급에서 3연패를 했다고.”
“...네.”
“WFC의 미들급은 안 코치님이 극찬을 한 너 정도의 재능이 널려있다고 보면
돼. 그것도 수년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
“...”
“미들급 위 체급인 라이트 헤비급이나 헤비급은 아예 말 할 것도 없고. 거기
는 거인들의 세상이야.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지 못하면 발도 디딜 수 없는 세
계.”
“거인들의 세상이라.”
이제 갓 운동을 시작하는 내게 겸손 하라는 의미로 해준 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날 때부터 선택받지 못하면 발도 디딜 수 없는 거인들의 세계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골리앗을 잡는 다윗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이 새끼가 미쳤나!
그때 한창 두호 형이 상대 선수 영상을 보고 있을 사무실 안쪽에서 소란이 일
어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두호 형 목소리 같은데요?”
꽤나 흥분한. 아니, 화가 난 듯한 두호 형의 목소리였다.
-진정해. 두호야. 저놈이 어떤 놈인지 너도 알잖아. 그냥 개가 짖는다 생각 해.
와.
무슨 일이지.
안 그래도 요즘 예민한데 지금은 완전 제대로 빡친 듯한 목소리였다.
“있어봐. 내가 살짝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게.”
권창섭 선수는 궁금함을 도저히 못 참겠는지 코치진에게 무슨 일인지 슬쩍 물
어보러 다녀왔다.
“... 최창우 이런 미친 새끼. 막나가는 새끼인 건 알았는데 진짜 위아래도 없
는 쓰레기 새끼였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온다더니 두호 형처럼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권창섭 선수.
“왜요? 무슨 일이래요?”
“하... 아놔. 이거 말 해야 하나.”
“뭔데요? 왜 형만 알고 난 안 알려줘요?”
“최창우? 최창우 선수가 왜요?”
“... 하. 폰 가져와서 초록창 실검 확인해봐.”
초록창 실검?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캐비닛에 넣어두었던 폰을 꺼내 초록창을 켰고.
초록창 실시간 검색 순위
-1위 최두호
-2위 최창우 최두호 도발
-3위 최창우영상
-4위 최창우 강해서
-5윌 강해서
... 이게 뭐야?
“최창우가 너 저격하는 영상을 올린 모양인데. 거기서 두호 형까지 언급했나
봐. 그래서 이슈가 됐고.”
“...”
나는 말없이 ‘3위 최창우 영상’을 클릭했고. 최창우가 올렸다는 영상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영상 보고 열 받으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복싱 룰로 붙든 맨주먹으로 붙
든 원하는 대로 붙어줄 테니까요. 강해서 씨. 아니면 최두호도 좋고.
영상은 지난 시합의 여파가 남은 건지 영 움직임이 시원찮은 박기영 선수를
최창우가 가지고 놀 듯 녹다운 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날 향해 도발하듯 덧붙인 멘트. 거기에 두호 형까지 언급을
해버려서 해당 영상의 댓글창이 터져나간 듯 했다.
중요한 건 해당 영상의 댓글로 ‘최창우 아무리 스트릿 FC 챔피언이라도 최두
호 도발은 선 넘짘ㅋㅋㅋ’ 라는 글에 최창우 계정으로 달린 답글이었다.
┕선 넘긴 뭐가 선 넘어? 미들급에서 개 쳐 발리고 웰터급으로 도망친 패배자
한테. 언제든 미들급 올라와서 도전하라 그래. 챔피언으로서 도전을 받아 줄
테니까.
이거.
이 새끼 진짜 선 넘었네.
2.
“안녕하세요? 강해서 선수?”
“아. 안녕하세요. 강해서입니다.”
두호 형의 폭발이 있은 바로 다음 날.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맨즈 라이프’의 인터뷰가 체육관 한켠에서 진행되었다.
“반가워요. 저는 오늘 인터뷰를 맡은 류은솔 에디터라고 합니다.”
척. 하고 손을 내미는 류은솔 에디터는 확실히 권창섭 선수가 호들갑을 떨 만
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에디터님 키가 되게 크시네요.”
“어머. 강해서 선수가 너무 크셔서 제가 큰 줄 모르겠는데요? 키가 몇이세요?
190?”
“아뇨. 186입니다. 하하.”
말했듯 키 170정도에 검정 계열의 정장 바지와 블레이저를 걸친 류은솔 에디
터는 묶어 올린 긴 생머리와 무쌍의 큰 눈이 매력적인, 상대방을 기분 좋게
띄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선 오늘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사소한 질문부터 시작해 조금 깊
은 질문까지 다루었고, 결국 스트릿 FC와 최창우의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전달 드린 질문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질문이니 굳이 대답
을 안 하셔도 되는 질문입니다. 바로 어제였죠. 스트릿 FC 최창우 선수의 영
상이 크게 이슈가 되었는데요. 혹시 해당 내용을 알고 계신가요?”
물론 예상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이슈를 그냥 넘긴다면 프로가 아닐 테니까.
“네. 초록창 실검에 제 이름이 뜬 건 태어나 처음이라서. 모를 수가 없었죠.
하하.”
“그럼 최창우 선수의 영상도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어떠셨나요? 아. 물론 대답이 어려우시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뇨.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이며 질문의 대답을 골랐다.
사실 이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 했기에 몇 가지 회피성 답변을 생각해놨
는데, 막상 실제로 질문을 받으니 생각해둔 답변은 모두 오답처럼 느껴졌다.
“그냥. 웃겼습니다.”
“웃겨요?”
“그렇잖아요. 영상 보니까 케이지 안에서 찍었던데. 원숭이인 줄 알았어요.
사람 말을 하는 원숭이라니. 스트릿 FC는 격투기가 아니라 동물원을 했다면
더 큰 돈을 벌지 않았을까 싶네요.”
“...네? 푸하핫. 아. 죄송합니다. 어. 음. 이거 인터뷰에 써도 되는 답변인가
요?”
되게 차갑고 도도한 언론인의 느낌이 있었는데. 이렇게 웃으니 또 매력적이시
네 에디터님.
“당연하죠. 그러려고 하는 인터뷰인데요.”
“그러면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최창우 선수가 강해서 선수를 도발했습니다. 그 도발에 응할 생각이 있으신
가요?”
“당연하죠. 저야 한국 챔피언이 자기 타이틀을 갖다 바친다는데 마다할 필요
가 없죠. 물론 저는 스트릿 FC 소속이 아니기에 챔피언 벨트는 필요 없는데.
그거 중고나라에 팔면 돈 좀 되려나?”
“푸핫. 아. 강해서 선수 되게 재밌는 사람이네요. 제가 인터뷰 하면서 이렇게
중간에 웃음이 터진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전 진지합니다. 벨트에 금이 들어가나?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물론 최창우
선수가 말만 저렇게 하고 제가 진짜 도전하면 도망칠 수도 있지만요.”
“강해서 선수는 최창우 선수와 붙으면 승리할 자신이 넘치시나 보네요.”
“당연하죠. 최창우 선수가 말 했던 것처럼. 복싱이든 레슬링이든 뭐든. 원하
는 방식대로 붙어 줄테니 제발 말만 하지말고 행동으로 좀 옮겨줬으면 좋겠어
요.”
“최창우 선수뿐만 아니라 스트릿 FC의 전두형 대표와도 조금 앙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스트리트 파이트 출연 때문인가요?”
“그렇죠.”
스트릿 FC와 전두형 대표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준현이가 생각나네.
“사실. 오늘 최창우 선수나 스트릿 FC관련 질문이 나오면 적당히 넘기려고 했
어요.”
“네?”
“제 친구 놈이 그러더라구요. 백 미터 달리기 할 때 신발 끈이 풀리면 멈춰서
묶고 달릴 거냐고. 저한테는 격투기가 그랬어요. 백미터 달리기처럼 ‘스트리
트 파이트’ 프로그램만 끝나면 다시는 인연 없을 그런 대상이었죠.”
“그러면. 지금은 달라진 부분이 있단 말씀이신가요?”
“네. 저도 이 격투기라는 운동에 제대로 몸을 던져보고 싶어졌거든요. 그래서
대답을 바꿨습니다. 스트릿 FC나 최창우 선수를 피하지 않는 걸로요.”
“어떤 이유에서죠?”
“백 미터 달리기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마라톤이더라구요. 마라톤 뛸 때
신발 끈이 풀리면 어쩌겠어요? 그대로 놔두면 계속 거슬릴 테니 제대로 매듭
짓고 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