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_Vs.박기영
1.
“와. 진짜 이걸 입 싹 닫고 넘어간다고? 선 넘었네?”
유나는 참다 참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자신의 친구 영은을 찾았다.
“영은아!”
“어? 유나야?”
무슨 일이냐는 듯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은을 보
며 유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 강해선지 약해선지. 그 사람 가게에 왔었어?”
“강해서? 그 격투기 하시는 분? 아니? 안 왔는데?”
“그치?”
지금 인터넷 일각(격투기 관련 사이트 및 커뮤니티)에서는 강해서와 ‘스트리
트 파이트 시즌 2’ 우승자와의 이벤트 매치로 한창 떠들썩했다.
물론 이번 이벤트 매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난 방송에 편집되었던
훈련 영상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술집 난동 사건을 자신들이 해명해주지
않았다면, 유나tv에서 진실을 밝혀주지 않았다면. 과연 강해서는 이런 이벤트
매치를 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지. 아주 후안무치한 사람이었구만?”
“응? 뭐라는 거야 유나야?”
“넌 열 받지도 않아? 네가 찍은 영상까지 공개해가면서 진실을 밝혀줬는데 고
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었잖아?”
“어... 그렇긴 한데.”
난 애초에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고 진실을 밝힌게 아닌데... 게다가 그 손님
이 영상을 내가 줬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오겠어.
영은은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쳐들어가자!”
“어, 어딜?”
“그 이벤트 매친가 뭔가. 그거 하는 체육관!”
“난 알바가야 되는데...”
“아악! 그럼 나 혼자라도 쳐들어간다?”
오늘 방송 컨텐츠는 격투기 중계라고 생각하며 유나는 자신의 스텝들을 이끌
고 시합이 열리는 청담동의 스트릿 짐으로 향했다.
강해서의 얼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지를 보기위헤서.
2.
-꾸욱. 꾸욱.
시합 전 스트레칭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생각보다 열악하네.’
아무리 오늘 시합이 이벤트성 매치이고, 앞뒤로 다른 시합이 없는 독립 시합
이라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경기가 치러질 줄은 몰랐다.
청담동에 위치한 ‘스트릿 짐’
한마디로 말해서 케이지가 있는 조금 큰 체육관에서 시합은 치러졌다.
그래도 생에 첫 공식 경기라는 생각에 조금은 설레고 긴장되던 마음이 체육관
에 들어온 뒤 싸악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두호 형.”
두호형도 오늘만큼은 개인 훈련일정보다는 내 시합 세컨을 봐주기 위해 합류
했다.
“생각보다. 뭐... 조금 열악한 것 같아서요. 저는 시합이면 어디 큰 체육관
같은데서 하는 줄 알았거든요.”
“국내 격투기 시장의 현실이지. 타이틀전이나 조금 돈 되는 매치 아니면 큰
체육관은 꿈도 못 꿔. 그나마도 지방 체육관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아아...”
내가 푸대접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게 디폴트였구나.
“잡생각은 그만하고. 곧 시작이다. 어찌됐든 기록이 남는 네 공식 시합이 될
테니까 집중해.”
“넵!”
그래. 무대가 중요하나? 내용이 중요하지.
나는 두호 형의 조언을 들으며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
“아! 잠깐만요! 강해서 선수! 강해서 선수 좀 불러주시겠어요?”
시합 직전. 입구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
“무슨 일이야?”
전두형은 이런 예기치 못한 사태를 달가워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너튜버라는데. 강해서 선수를 만나러 왔답니다.”
“너튜버? 누군데?”
“그... 유나 tv라고. 지난번 강해서 선수 술집 사건 풀 영상 공개한 너튜버입
니다.”
“유나 tv?"
그래. 그런 이름의 너튜버였던 것 같았다.
당시에는 그냥 많고 많은 너튜버 중 하나가 화제성 소재 하나 물어서 공개했
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자리까지 찾아온 걸 보니 그저 우연히 영상을 입수
한 건 아닌 듯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내보내면 될 거 아냐?”
“오늘 시합 소식을 듣고 라이브 방송을 켜고 왔습니다. 너튜브 라이브 중이라
진행요원들도 과하게 대처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간에. 요즘은 너튜버들이 벼슬이다.
시청자가 많고 구독자가 많은 너튜버들은 방송만 키면 웬만한 일에는 면죄부
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흠...”
너튜브에 들어가 유나tv를 검색해본 전두형은 고민에 빠졌다.
유나 tv 채널은 구독자가 20만을 훌쩍 넘어 30만 가까이 되었는데, 이건 전두
형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인지도와 영향력이었다.
스트릿 fc 채널도 이제 겨우 40만 구독자를 넘어가는 수준이었으니까.
“들어오라 그래.”
너튜브 라이브도 벌써 시청자가 만 명 가까이 됐었다.
이번 시합은 파프리카 tv에서 생중계를 하긴 하지만 너튜버 하나정도 더 끼워
도 괜찮을 듯싶었다.
몇 주 만에 본 강해서는 살이 조금 빠진 듯 했지만 아직 전체적으로 근력이나
체력이 제대로 붙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몸이었고, 이번 시합의 승리는
별 이변이 없는 한 박기영에게 돌아갈 터였다.
“안녕하세요. 유나 tv의 진행을 맡고 있는 임유나입니다. 먼저. 들여보내주셔
서 감사해요.”
그래도 아주 싹수가 없진 않은지 카메라를 끄고 먼저 인사를 하려 왔다.
“반갑습니다. 스트릿 FC의 대표를 맡고 있는 전두형이라고 해요.”
“안 그래도 이번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는 너무 잘 봤어요. 마침 근처에서 스
페셜 매치가 벌어진다기에 실례인 줄 알지만 불쑥 찾아와 봤어요. 마침 오늘
매치의 주인공이 제가 얼마 전 다루었던 영상의 주인분이기도 하셔서요.”
유나는 홍대에서 강남까지 먼 길을 왔지만, 마치 주변을 지나다 우연히 들린
것처럼 가볍게 이야기를 던졌다.
“아아. 그렇죠. 강해서 선수. 좋은 선수가 안 좋은 소문에 휩쓸렸습니다. 유
나 tv에서 영상을 공개해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 감사합니다. 혹시 오늘 실례가 되지않는다면 경기를 구경해도 괜찮을
까요? 제가 아직 격투기 시합은 한 번도 직관한 적이 없어서 너무 궁금해서
요. 촬영이 안된다면 진짜 구경만 하고 가겠습니다.”
애초에 오늘 목적은 강해서 선수를 만나는 것이었으니 굳이 촬영을 고집하지
는 않았다.
얼핏 봐도 파프리카 tv에서 생중계를 하는지 여러 대의 카메라가 보였고.
“하하. 너튜버 분이 오셨는데 방송을 하셔야죠. 마침 오늘 시합 전에 지역구
의원님의 훈화 시간도 있으니 같이 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아... 네. 하하. 좋은 자리에 좋은 분이 빛내주러 오셨군요.”
무슨 격투기 시합에 지역구 의원이 훈화를 하러 와?
속이 빤히 보이는 전두형 대표의 요청이었지만 유나는 어쩔 수 없이 해당 장
면까지 송출하는 조건으로 방송을 허락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유나 tv의 피디들과 스트릿 FC측 실무진들 사이의 수익 분배 및 이
런 저런 사항들을 조율하는 일이 있었지만 유나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늘 이벤트의 주인공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논란을 잠재우러 왔다!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2의 숨은 강자! 강! 해! 서!
-논란은 없다!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의 우승자는 나다! 박! 기! 영!
드디어 케이지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불이 꺼지고.
박기영과 강해서가 케이지 안으로 등장했다.
************
“후우. 후우.”
충분히 심호흡을 하고 올라왔음에도 케이지 안으로 들어오자 살짝 호흡이 가
빠졌다.
흥분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깜깜한 체육관에서 내가 서있는 이곳 케이지만이 빛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허접한 데뷔전에 조금은 실망했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보니 썩 훌
륭했다.
“두 선수. 중앙으로.”
맞은편에서 나와 상반되는 푸른 MMA 글러브 끼고 다가오는 박기영 선수.
실제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데, 몸이 정말 단단해 보였다.
심판의 주의사항이 지나가고. 가볍게 주먹을 맞댄 후 박기영 선수와 나는 서
로 거리를 벌렸다.
안 코치님이 오늘 내준 과제는 ‘거리 싸움’이었다.
아무래도 상대방이 나보다 그라운드에 익숙할 테니 최대한 타격 거리를 유지
하며 그라운드 상황으로 들어가는 걸 조심하라는 숙제.
-슥. 슥.
박기영 선수는 잠시 내 움직임을 보는 듯 하더니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내게
접근했다.
아무래도 내 타격을 의식하는지 박기영 선수는 서로 팔을 뻗어 주먹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움찔!
내가 반보 전진하면 반보 뒤로 빠지며 무릎을 들어 올리는 박기영 선수.
갑작스런 내 전진을 막겠다는 듯 방어적인 모습이었다.
“해서야! 천천히 해! 천천히! 거리주지 말고!”
케이지 밖에서 두호 형의 목소리가 설핏 들린 것도 같았다.
-쿵!
나는 주먹을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에 있는 박기영 선수에게 다가가기 위해
왼 발을 크게 내딛었고.
박기영 선수는 이번엔 뒤로 빠지는 게 아닌 전진 스텝으로 자세를 낮추며 달
려들었다.
“해서야! 조심!”
애초에 박기영 선수가 들어오라고 크게 다가간 거였다.
박기영 선수가 원하는 거리는 내게 밀착해 주먹을 제대로 뻗지 못할 정도의
거리겠지.
내 전진 스텝과 박기영 선수의 전진 스텝이 만나자 우리 둘은 급격히 가까워
졌고.
-후웅!
가볍게 뻗은 내 레프트를 지나 박기영 선수는 내 허리를 잡고 태클을 시도하
려 했지만.
-턱!
상체를 낮춰 내 허리를 감싸 안으려 팔을 벌렸던 박기영 선수는 그 뜻을 이루
지 못했다.
날 안기 위해 벌린 팔의 왼쪽 겨드랑이 아래로 내 오른 팔을 집어넣으며 태클
을 막아냈기 때문.
“큭?”
순간 내가 힘 싸움을 거는 줄 알았던 건지 박기영 선수는 자세를 조금 더 낮
추며 버티는 자세로 들어갔고, 바짝 맞붙은 상태에서 내 왼손은 박기영 선수
의 오른쪽 팔 바깥을. 오른 손은 왼팔 겨드랑이 안쪽을 파고들어 있었다.
-꿈틀.
박기영 선수의 등 근육과 종아리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힘을 쓸 건지가 구체적이진 않지만 막연하게나마 느껴
졌다.
나는 크게 내딛었던 왼발 옆으로 오른 발을 당긴 뒤 하체 중심을 내 오른쪽으
로 두며 박기영 선수의 겨드랑이에 껴진 오른팔을 감싸 안듯 쳐올렸다.
-후웅. 쿵!!!
“커, 커억!”
내 몸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돌며 등부터 바닥에 떨어진 박기
영 선수.
제대로 낙법을 치지 못하도록 왼팔로 박기영 선수의 오른 팔을 눌렀기에 순간
호흡이 되지 않는지 억눌린 기침을 뱉어냈다.
“아, 안아 던지기! 강해서 선수! 레슬링 선수출신의 박기영 선수에게 오히려
레슬링 기술로 테이크다운을 얻어냅니다!”
기술 이름까지는 관심 없었다.
너무 타격에만 신경 쓰며 무게 중심이 앞에 있기에 대충 뒤로 던져 본 거지.
등부터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박기영 선수의 위를
올라타며 마운트 포지션을 잡으려는데.
“해서야! 떨어져! 마운트로 가면 안 돼!”
이번에는 또렷이 들리는 두호 형의 목소리.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박기영 선수의 표정은 고통에 일그러져있다기보다는 기
회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에 가까웠다.
“강해서 선수! 테이크다운을 얻어내고도 어서 일어나라는 듯 보고만 있습니
다! 박기영 선수! 그에 대답하듯 허리를 튕기며 바로 일어섭니다!”
뒤로 잡아 던지면서 테이크다운을 얻어내긴 했지만, 섣불리 마운트를 시도했
다가는 오히려 그라운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다. 두호형의 목소리가 아
니었다면 꽤나 귀찮아질 뻔 했어.
박기영 선수는 역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는지 움직임에 데미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후욱. 후욱.”
이제 1라운드 극초반.
제대로 된 펀치 교환도 없었고, 잠깐의 방심이 불러온 테이크다운 한번이 있
었을 뿐이다.
박기영 선수는 이제는 타격뿐만 아니라 내 잡기 기술도 신경을 쓰는지 아까전
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래. 아까 케이지 밖에서 안 코치님과 두호 형이 나눈 말이 맞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 재능은 박기영 정도의 선수에게는 불합리함이라는 표현으
로 쓰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스윽
시합 집중도가 높아지자 박기영 선수의 미세한 근육의 꿈틀거림이.
동공의 움직임과 흔들림 하나하나가.
그의 들숨과 날숨의 박자까지.
모든 게 다 보였다.
그러니. 애석하지만 박기영 도전자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변은 일어날 수
없다.
시합은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휙! 뻑! 슥. 뻐억!
가볍게 뻗은 왼손을 피해내는 박기영 선수의 머리를 향해 체중을 실은 오른발
하이킥을 날렸다.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박기영 선수.
그의 반대편 머리에 왼발 하이킥이 적중한 건 내 오른발이 아직 땅에 닿기도
전이었다.
“다, 다운!! 박기영 선수! 다운입니다! 시합 종료! 주심 시합 종료를 선언합
니다!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2 스페셜 매치! 1라운드 1분 15초! 강해서 도전
자의 KO로 경기가 마무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