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_이벤트 매치
1.
“으아아아악!!!!”
드디어 마지막 세트다!!!
끝이다!!!
“하나 더.”
...
말이 다르잖아.
방금이 마지막이었다고!!!
“소리 지르는 거 보니까 아직 힘 있네. 지금부터 하는 게 진짜 근육이 되는
거야. 자. 하나만 더!”
지금부터 하는 건 고문입니다. 두호 형.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돼!
“흐어어...”
결국, 마지막 세트에 예정보다 ‘마지막 하나’를 다섯 개나 더 하고 나서야 악
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퍼져있지 말고. 팔 들고 흔들면서 스트레칭 해줘.”
“팔이 안 올라가요오오오...”
내 팔이 내 팔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긴 지옥이고 두호 형은 악마다.
난 여길 탈출해야 해!!!
“너 어디 가냐?”
근력운동 마지막 세트를 끝내고 슬금슬금 샤워실로 들어가려 하니 두호 형이
불러 세웠다.
“오늘 저희 어머니 생신이라... 저녁에 다 같이 식사하기로 해서요.”
“이제 점심 지났는데?”
“어머니 선물도 사야 해서...”
엄마 미안.
조만간 내가 우리 여사님 좋아하는 거 사 들고 함 놀러 갈게.
“흠? 그래? 오늘 아름 씨 온다던데.”
“네?”
“주말 운동도 한 번씩 나오거든. 아마 조금 있으면 올걸? 근데 너 씻으러 가
던 거 아니었어?”
“무슨 말이에요? 하체 조지려고 일어난 겁니다. 하체 뿌셔버리죠!”
“어머니 생신이라며.”
“우리 엄마도 제 생일 신경 안 써요.”
“선물은?”
“현찰 제일 좋아합니다. 뱅킹하면 돼요.”
“저녁 식사한다며?”
“엄마 요리 솜씨가 최악이라.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 먹고 싶네요.”
“...”
아 왜!
목요일에 소개해주기로 해놓고 안 해줬잖아!
“오케이. 알겠어.”
내가 뭔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열심히 어필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오케이
하는 두호 형. 역시 츤데레라니까.
“하체 뿌시자.”
“...네?”
“하체 조지러 일어났다며? 도와줄게. 아주 제대로 조져보자.”
않이. 그게 아닌데...
“으아아아악!!!!”
****************
-그래서. 오늘도 운동 가?
“응! 요즘 운동 완전 재밌어!”
오늘은 오랜만에 주말 스케줄이 없는 프리한 날.
손아름은 친한 언니와 전화를 주고받으며 체육관을 향하고 있었다.
-너도 대단하다. 보통 스케줄 빠지면 그냥 쉬지 않아?
“집에만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서. 헤헤헤.”
-운동 몇 시까지 할 거야? 저녁에 밥이나 먹을까?
“음. 운동 끝나고 일단 연락 줄게. 언니는 오늘 촬영 있댔지?”
-응. 나도 홍대 쪽에 있을 거니까 끝나고 연락해!
“오케이! 나 이제 다 왔다. 나중에 연락할게~”
어느새 ‘팀 피스트’ 체육관에 도착한 아름은 전화를 끊으며 체육관 문을 열었다.
“으아아아악!!!”
깜짝이야.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괴음.
‘어? 저 사람은... 엊그제 스파링하다 기절하신 분 아닌가?’
괴음의 정체는 지난 목요일 최두호 선수와 스파링을 했던 사람이었다.
하체 운동을 하는 것 같은데 되게 힘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아름은 체육관의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최두호 선수 근처를 피해 탈의
실로 들어가려는데.
“소, 손아름! 손아름이다! 안녕하세요!”
내가 니 친구니?
왜 사람들은 연예인만 보면 나이가 많든 적든 이름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네.
“하하. 안녕하세요?”
하체 운동을 하다가 체육관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이 자신을 부르자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도망치는 아름.
오늘 운동 괜히 왔나 살짝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
“흐흐흐. 봤죠. 형? 손아름이 저한테 인사하는 거.”
“그래. 그 전에 체육관 사람들이랑도 다 했고. 너랑 인사하자마자 도망가는
것도 봤지. 그만 쉬고 일어나.”
저 형은 왜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까?
“저녁. 저녁 먹어요?”
“누가?”
“손아름이요!”
“먹겠지?”
“아니! 저녁 자리 만들어주기로 했잖아요!”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니가 뻗어 잤잖아?”
“아니...!”
와나.
빡치는데 싸움으로는 못 이길 거 같고.
이걸 어떡하지?
“일단 오늘 운동 잘하면. 말은 해볼게. 그런데 뒤에 아름 씨 스케줄 있으면
어쩔 수 없어.”
“넵! 감사합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돌아오는 것 같네.
오늘 남은 운동이 뭐 있지?
웨이트였나? 유산소였나? 뭐든 조져주지.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끼이익
“험. 실례합니다.”
한창 남은 운동에 대한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는데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
오는 낯익은 실루엣.
“... 전두형 대표님?”
나보다 두호 형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 최두호 선수. 반가워. 강해서 도전자도 여기 있었네?”
“...네.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마침 이 근처 지나가다가 우리 후배님 체육관이 생각나서 한번
들러봤지.”
흠.
두호 형의 표정을 보아하니 썩 달갑지 않은 표정인데.
전두형 대표도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순수한 의도로 방문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강해서 도전자는 여기서 운동하나 봐?”
“네. 며칠 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전화를 끊었나?”
“네?”
전화를 끊은 건 난데 왜 두호 형한테 저래?
“안녕하세요? 전두형 멘토님? 아니지 대표님이라도 불러야 하죠? 이제 멘토님
이 아니니.”
“...그래요. 여기서 다 보네. 강해서 도전자.”
“이제 멘토님이 아닌 것처럼 저도 도전자가 아니죠. 하하.”
왜 자꾸 도전자래?
하차하랄 땐 언제고?
“이러려고 스트리트 파이트 신청했나?”
“이러려고 라뇨. 하차는 제 의지가 아니었는데.”
“자네 말고. 최두호 선수 말이야. 이렇게 선수 빼가려고 특별 코치로 들어온
건가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아.
어... 이거. 내가 낄 분위기가 맞나?
갑자기 애매해지네.
“선수를 빼가다니요. 선수를 빼간 적도 없고, 해서가 전두형 대표님 소속 선
수였던 적도 없을 텐데요?”
“우리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선수이긴 했지.”
“하차가 먼저입니다. 해서는 목요일부터 우리 체육관에 나왔으니까요.”
“그러니까. 미리 사전 교섭 같은 게 있었던 거 아니냐. 이 말이지 내 말은.
강해서 도전자. 어제 나랑 통화할 때도 체육관이었어?”
“네? 아. 네.”
“그래서 그렇게 끊었던 거 맞구만. 참 이 바닥이 지맘대로 굴러간다지만 이렇
게 상도의가 없어서야.”
음.
굳이 꼬아서 보자면 오해할 만하기도 했다.
두호 형이 특별 코치로 날 전담하겠다며 나타난 게 월요일.
그리고 술집 난동이 있었던 것도 월요일 저녁.
화요일에 본방 방영하고. 수요일 오전에 문제가 불거져서 오후에 하차 기사가
나갔으니까.
뭐. 거기까지는 문제없다지만, 이후 진실이 밝혀지고 하차 번복 이야기가 나
오고 복귀하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문제가 생겼지.
“어제 전화? 해서야. 너 어제 전두형 대표님 전화 받았어?”
“네. 어제 운동하다가 전화 받으러 갔던 거...”
“무슨 전화였는데?”
“스트리트 파이트 하차 번복하고 복귀하라는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그냥 끊었습니다. 스트리트 파이트 그거. 어차피 오
디션 붙은 김에 나갔던 건데 뭐 억지로 계약까지 하려고 해서.”
“계약?”
아.
이 이야기는 두호 형은 모르겠구나.
나는 수요일 날 방송국을 찾았을 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두호 형에게
해줬다.
“... 방금 해서가 한 말. 다 사실입니까? 전 대표님?”
“흠. 흠. 나는 강해서 도전자가 하차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애초
에 제시하려고 했던 계약서도 신인 파이터에게는 파격적일 정도로 좋은 조건
이었고.”
“파격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거의 협박이잖습니까? 계약하면 지켜주고. 계
약 하지 않으면 하차해야 한다는.”
“먼저 사고 친 건 강해서 도전자야.”
“그리고 진위가 밝혀졌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 않나. 다시 복귀하라고. 아직 정기 훈련
날짜 안됐으니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아까는 이 근처 지나다가 두호 형 보러 왔다면서요?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서 운동한다는 거 알고 찾아오셨네.
“후우. 죄송합니다. 저는 복귀 할 생각 없습니다.”
“이유가 뭐지?”
이유라.
사실 별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스트리트 파이트’에 출연한 것도 별 이유가 없었다.
마침 길거리 오디션을 하고 있기에 장난 반 호기심 반으로 도전했던 거니까.
“계속 운동하는 거 보니까. 격투기 선수로 생활할 생각도 있는 거 같은데. 나
전두형이야. 내가 계약을 하자는 게 아니잖아. 그냥 프로그램 복귀하라고.”
“이유가 없었어요.”
“뭐?”
“복귀하지 않는 이유요. 그냥 하기 싫었지 딱히 이유가 없었다구요.”
“...”
“그런데 이유가 생겼네요. 아니지. 애초에 그냥 하기 싫었던 이유가 이거인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유가 뭔가.”
“안 맞네요. 전두형 대표님이랑 저. 안 맞아요. 완전. 엄청.”
뭔가 내가 딱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간 유형이었다.
‘싫다! 극혐!’ 이런 종류보다는.
그냥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다. 친해지고 싶지 않다. 정도의 혐오감?
뭐든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자기 말이 정답이어야
하고 남들이 인정해줘야 하는 스타일.
내가 뭐 하차하라면 하차하고. 복귀하라면 복귀하는 자기 부하직원도 아니고.
너무 무례하고 고압적이어서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다.
굳이 그런 사람과 같이 운동해야 하나 싶었다.
“나한테... 이런 태도를 보여도 괜찮겠나? 최두호 선수. 자네도 생각 잘해보
라고.”
나는 일단 말을 멈추고 두호 형을 돌아봤다.
나야 그냥 이제 갓 운동을 접한 일반인일 뿐이고, 격투기 단체 대표랑 얽힌다
고 문제가 생길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두호 형은 나와 상황이 달랐다.
아무래도 한국 내 최대 규모의 격투기 단체 대표와 문제가 생기면 선수로서의
활동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전 대표님.”
와. 두호 형. 이 꽉 깨물었는데.
-까득
턱 근육이 크게 한번 꿀렁거렸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잠시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저. 최두홉니
다. WFC 웰터급 랭킹 4위. 최두호.”
이 형.
되게 진부한 대사를 멋있게 내뱉는 재주가 있네.
2.
“그래서? 그냥 갔어? 그 대표라는 사람은 별말 안 하고 그냥 가디?”
“어. 뭐. 저녁이나 먹자던 데. 미쳤냐? 손아름이랑 저녁 먹어야 하는데? 일없
다 그랬지.”
“그러면 손아름이랑 밥 먹지 왜 여기 있냐?”
“저녁 약속 있으시대. 어쩔 수 없지.”
주말 저녁엔 치맥이 국룰이지.
준현이 놈을 불러서 집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닭 다리와
함께 씹었다.
“그나저나. 계속 귀찮게 하면 어떡하지? 내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지랄을 한다. 딱 보니까 그냥 자기가 무시당한 게 열 받아서 찾아온 것 같구
만.”
“내가 전화 끊어서?”
“그래. 다시 전화 안 오디?”
복귀하라는 전화를 뚝 끊은 뒤 번호 차단을 해둬서 다시 전화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푸하하하. 너도 진짜 미친놈이다. 그걸 왜 차단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또라이새끼. 어쨌든. 그냥 무시하는 게 나아 보인다.”
“그래?”
적어도 한 달은 팀 피스트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격투기라는 거. 운동이라는 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런데 전두형 대표처럼 속내가 복잡한 사람과 엮이는 건 조금 불편했다.
“야. 너 백 미터 달리기하는데 신발 끈이 풀렸어. 어떻게 할래?”
“엉? 뭘 어떻게 해. 그냥 뛰어야지.”
“그래 인마. 백 미터 달리기에 신발 끈 묶는다고 멈추면 그냥 포기하겠단 소
리지. 그럴 땐 그냥 문제가 생겨도 무시하고 달려야 돼.”
“흠...”
“네가 운동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할 것도 아닌데. 이제 한 달도
안 남은 거. 그냥 무시해. 스트리트 파이트 쪽에서 연락 와도 그냥 무시하고.”
그래.
역시 우리 현자님이었다.
아주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는구나.
그렇게 스트릿 FC고 스트리트 파이트고 전두형 대표고. 그냥 신경 쓰지 말자!
라고 답을 내렸는데, 그런 답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서냐? 다른 게 아니라. 스트릿 FC에서 이벤트 매치 제안이 왔는데. 어떻게
할래? ‘스트리트 파이트’ 우승자랑 하는 경기다.
결코, 무시할 수만은 없는 제의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