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_스파링
1.
내가 미쳤지.
“해서 씨! 언제까지 쉬고 있을 겁니까? 쉬더라도 계속 움직이면서 쉬라고 말
씀 드렸죠?”
평소면 아직도 침대에서 뒹굴 시간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어날 힘이 없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들어가게 해드릴까요?”
“...아뇨.”
장담한다.
만약 어제 내가 여기 운동하러 왔었다면 오늘 여길 찾을 일은 없었을 거다.
“그래도 회복 속도가 정말 좋으시네요.”
“네?”
“운동을 안 해서 그렇지. 해서 씨 제대로 운동하기 진짜 좋은 조건들이에요.
타고난 것들이 워낙 좋아서.”
넘어가면 안 된다.
이건 당근이다.
날 기분 좋게 만들려는 최두호 선수의 계략이자 함정이다.
“팔다리가 길어서 타격에도 유리하고 그라운드에도 유리한 점이 많아요. 해서
씨. 혹시 살면서 크게 다쳐본 적 있어요?”
“네? 어... 아뇨. 딱히.”
“뼈 부러지거나 그런 적도?”
“네.”
“어쩐지. 뼈도 굵고. 아마 골밀도도 좋을거에요. 그런 건 정확한 검사를 해봐
야겠지만.”
흠. 흠.
띄워주려는 의도인 건 알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칭찬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 좋은 조건이 있더라도. 활용을 안 하면 무용지물이겠죠? 충분히 쉴 시
간 드렸으니 일어나시죠.”
“...네에.”
“근육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후천적인 노력도 중요합니다. 좋
은 근육과 골격을 타고났어도 제대로 개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네에. 네에.”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스트리트 파이트’ 정기 훈련보다 힘들었다.
그래도 그땐 인터뷰 시간도 있고, 방송이다 보니 이런저런 쉬는 시간이나 보
여주기식 장면을 만들기 위한 소모적인 시간 들이 있었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었다.
“자. 물 드시구요.”
“토할 것 같은데요.”
“토하면 치워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구요. 운동할 때 수분 보충도 중요합니다.”
하...
손아름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오긴 오는 거지?
낚인 거 아니지?
“이렇게 너무 심하게 운동하고 그러면. 오히려 몸에 무리 가서 안 좋은 거 아
니에요?”
“몸에 무리 갈 정도로는 하지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하루 운동하고 며칠을 앓아누우면 그건 손해 아닌가?
지금 이대로 집 가서 누우면 다음 주에 눈 뜰 거 같은데?
“지금 당장 해서 씨에게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체력도 근력도 하루아침에 눈
에 띄는 성장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당장 급할 것도 없는데요. 뭐.”
스트리트 파이트를 하차하면서 당장 일정에 맞춰 무언가를 갖춰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아침에 최두호 선수가 ‘스트리트 파이트보다 더 좋은 무대’를 언급하긴
했지만, 아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나 단단한 결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끼익
“안녕하세요오.”
다시 운동을 시작하려는 타이밍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
“아름 씨. 빨리 오셨네요?”
“네. 오늘 스케줄이 조금 빨리 끝나서.”
와.
진짜네.
진짜 손아름이네.
우와.
“해서... 씨?”
“어. 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직 운동 안 끝났습니다.”
“아. 네? 네. 하죠. 운동! 네!”
언제 지쳤었냐는 듯 목소리에 힘이 돌아왔다.
그나저나 진짜 여기 다니는구나. 손아름.
그러면 집도 이 근천가?
“해서 씨! 자세! 집중 안 합니까?”
“넵!”
훈련하는 중에도 계속 신경이 분산됐다.
손아름.
1티어 아이돌 그룹 리엘리 출신으로 지금은 솔로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는 A급
연예인이었다.
이건 내가 구분한 게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눈 연예인 등급 같은 거
에서 본 거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누구한테 물어봐도 알 정도로 유명한 연예인이라는 말이었다.
-힐끔.
우와. 연예인을 실물로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데, 진짜 장난 없이 이
쁘구나 싶었다.
“후우. 해서 씨. 계속 집중 안 할겁니까?”
“...죄송합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예요. 진짜.
“잠시 스트레칭하고 계세요.”
최두호 선수는 못마땅한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잠시 자리를 비웠다.
솔직히 아침에는 운동도 조금 더 해보고 싶고, 최두호 선수가 고마워서 따라
온 것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운동이 힘들어서 바로 후회했고.
‘그래도 이런 보상이면 할만하지.’
손아름은 어느새 운동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와서는 체육관 사람으로 보이는
다른 코치에게 이것 저것 자세를 배우며 운동을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이번에 들어가는 영화에서 경찰 역을 맡아 액션을 보
여줄 거라더니. 그것 때문에 격투기를 배우나 싶었다.
-툭
“해서 씨. 지루한 훈련만 하니 재미없죠?”
“네?”
“글러브 끼고 올라와 봐요.”
한창 홀린 듯 손아름을 보고 있는데 최두호 선수가 스파링용으로 보이는 글러
브를 내게 툭 던지며 링 위로 불렀다.
타격 훈련인가?
최두호 선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츤데레 같은 면이 있단 말이야.
손아름이 오니까 타격 훈련으로 넘어가 주고.
“안 올라옵니까?”
“아! 올라갑니다!”
***********************
최두호는 싱글벙글 한 얼굴로 글러브를 끼며 링으로 올라오는 강해서를 바라
봤다.
‘생각보다도 더 좋다.’
지난번 스트리트 파이트 정기 훈련 때는 눈에 보여주기식 훈련으로 시간을 떼
웠었다.
강해서의 뛰어난 재능을 굳이 스트릿 FC 관계자들 앞에서 검증해줄 필요가 없
었으니까.
‘전두형 대표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는 듯했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하
면서 천천히 접근하려 했겠지.’
전형적인 사업가적 기질을 가진 전두형은 결코 먼저 원하는 바를 보이는 법이
없었다.
더 안달 내는 쪽이 숙이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런 그의 성향 때문에 강해서라는 빛나는 재능이 최두호
의 곁으로 오게 되었다.
아무리 전두형이라도 그런 돌발 사건으로 강해서 도전자가 프로그램에서 하차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자. 지금부터는 타격 훈련을 할 겁니다. 타격 훈련은 해서 씨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훈련이죠?”
“네? 하하. 뭐. 그렇죠.”
대답을 하면서도 눈길이 자꾸 손아름 쪽으로 향하는 강해서.
최두호는 그런 강해서의 속마음이 뻔히 보이는 듯했다.
“사실. 지금 해서 씨는 미트를 대 줄 필요도 없습니다.”
“네?”
“자세부터 잡아야 하거든요. 지금 해서 씨는 기본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요.”
“...네.”
단순한 잽 하나도 수천수만 번의 반복 숙달이 필요하다.
근육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힘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런 반복 숙달은 체력이 쌩쌩할 때보다 정말 지치고 힘들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몸이 기억하는 자세라는 건 무의식중에 나오는 습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껏 해서 씨가 보여줬던 시합들은 제대로 된 시합이 아니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해서 씨 또한 제대로 된 기술을 선보인 적이 없어요. 잽처럼 보였지만
잽이 아니었고. 훅처럼 보였지만 훅이 아니었습니다.”
“...”
납득 못 하겠다는 얼굴의 강해서.
최두호는 저런 성격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고집도 있고,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면 굽히지 않는 그런 성격. 오
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원래라면 해서 씨. 거울 보고 자세부터 새로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너무 재미 없겠죠?”
“... 뭐. 하라면 해야죠.”
이런 점도 좋았다.
일단 뱉은 말은 좋든 싫든 지키려 하는 모습.
“입식 룰로. 저랑 해서 씨가 스파링을 하면 어떨까요?”
“네?”
“아무리 그래도 아마추어니까. 그래. 1라운드 3분만 버티면 해서 씨가 이기는
룰 이라면?.”
“... 입식 룰이라는 게. 그라운드 기술 없이 타격 기술만 쓰는 거죠?”
“그렇죠.”
“에이. 암만 그래도 WFC 랭킹 4위신데... 3분을 어떻게...”
말은 저렇게 하지만 강해서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라운드가 아니라 입식 타격만으로 스파링을 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
는 거겠지.
“만약 제가 이기면요?”
“해서 씨가 이기면.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 책임지고 손아름 씨랑 저녁 약속
잡아드리죠. 앞으로도 운동하자고 조르지도 않을게요.”
“조건이 과한데... 제가 지면요?”
“앞으로 딱 한 달. 딱 한 달만 제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라주세요. 운동에
관해서.”
“...”
최두호의 제안에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던 강해서는.
“콜!”
이내 그 제안을 덥썩. 물었다.
****************************
‘솔직히. 해볼만 하지 않나?’
입식 타격 룰로만 진행되는 스파링이었다.
그것도 이겨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3분 1라운드만 버티면 되었다.
아무리 최두호 선수가 WFC 랭킹 4위라도.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최두호 선수는 애초에 타격이 강한 선수가 아니었다. 최두호 선수는
주짓수를 베이스로 한 그라운드에 강점을 가진 선수였다.
실제 그의 커리어 또한 서브미션 승리가 대부분이었고 타격 부문은 약한 모습
을 많이 보였다.
“자. 말씀드렸다시피. 타격 룰로만 진행됩니다. 3분 1라운드 진행하며, 경기
가 어렵다고 판단되시면 왼손을 들어주세요.”
어느새 최두호 선수와의 스파링은 체육관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손아름마저 하던 운동을 멈추고 관전 중이었다.
-삐익!
심판을 맡은 관원이 시합을 알리는 휘슬을 울렸고.
-슥
최두호 선수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리듬을 타며 들어왔다.
솔직히 이전에 상대했던 절대고수라고 하는 스트릿 FC 선수와 다른 점이 뭔지
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WFC 랭킹 4위니 뭔가 더 위압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휘익. 휘익
시작은 최두호 선수의 왼손 잽과 이어서 들어오는 오른손.
왼손 잽을 왼쪽으로 피한 후 오른손까지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피했다.
“...!”
그때 숙여진 내 시야로 확대되는 최두호 선수의 오른쪽 다리.
양손으로 정강이를 밀어내듯 타이밍에 맞춰 막아냈지만 그 힘에 뒤로 밀쳐지
듯 밀려났다.
-휙 휘익
그 틈을 타 다시 붙으며 펀치를 뻗어오는 최두호 선수.
자세를 제대로 잡을 틈도 없이 주먹이 날아드는데 막거나 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런 실력인데 타격이 약하다고? 미친거 아냐?
-뻐억.
“켁!”
이번에는 왼쪽 몸쪽으로 오는 라이트를 피하기 어려워 왼팔로 막았는데, 아프
다기보단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냥 팔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랄까.
‘이대로면 3분이 아니라 1분도 못 버티겠는데? 막거나 피하기만 해선 답이 없
어.’
막상 시합에 돌입하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에 맞붙었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그냥 무조건 지는 싸움이었다.
‘막기만 해서는 말이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휙. 뻑!
다시 한번 내 왼쪽 몸통을 노리는 최두호 선수의 오른팔을 몸을 왼쪽으로 돌
리며 내 오른손으로 막아냈다. 그러면서 그 회전력으로 최두호 선수의 왼쪽
허벅지에 로우킥을 때려 넣었다.
“큭!”
이번에는 최두호 선수의 입에서 나온 짧은 신음.
그럼에도 최두호 선수는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내게 왼팔을 뻗어왔다.
나는 이미 살짝 자세가 무너졌지만, 최두호 선수의 품 안쪽에서 오른팔을 뻗
으며 카운터를 날렸다.
-뻑!
-뻑!
결과는 서로 동시타격.
그래도 나는 오른팔이고 최두호 선수는 왼팔이니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풀썩
그게 스파링에서의 내 마지막 의식이었다.
************************
“...”
최두호는 잔 경련이 일어나는 왼 다리 덕분에 오른 다리로 짝다리를 짚으며
쓰러진 강해서를 내려다봤다.
원래는 이렇게 넉 다운을 시킬 생각이 아니었다.
단련되지 않은 몸을 두드려 강제로 가드를 열고 적당한 타격을 선보인 뒤 항
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강해서의 몸은 전혀 단련되지 않은 일반인의 몸
이었다.
최두호가 타격이 약하다는 평을 받는다지만 그건 비교 대상이 WFC 랭커들이었
을 때 이야기다.
일반인이 가드를 한다고 흘려낼 수 있을 정도로 최두호의 타격은 만만하지 않
았다.
‘그런데. 오히려 치고 나왔어.’
순간적으로 WFC 탑 랭커 수준의 타격가와 맞붙었을 때의 서늘함을 느꼈다.
자신의 콤비네이션 사이의 미세한 틈을 찾아 깎아 차듯 꽂아 넣는 로우킥.
거기에 더해 자신의 레프트에 응수하는 라이트 크로스 카운터.
강해서의 몸이 조금만 단련되어 있었다면 첫 로우킥에 자세가 무너졌을 것이다.
강해서의 라이트가 조금만 세련됐었다면 크로스 카운터에 쓰러진 건 최두호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크로스 카운터에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갈 뻔했다. 그의 펀치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하다못해 자세라도 조금만 더 잡혀 있었다면. 나는 과연 버텨낼 수
있었을까?’
강해서는 동시 타격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크로스 카운터는 제대로 들어갔었다.
다만 다듬어지지 않은 공격이었기에 최두호는 카운터 펀치를 버텨낼 수 있었
고 그대로 강해서에게 레프트를 꽂아 넣을 수 있었을 뿐.
빛나는 재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마주해보니 그 수준이 숫제 악마적이
었다.
격투기 선배로서 그의 재능은 찬사를 보내고 싶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지만,
언젠가 자신과 마주할 선수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최두호는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복잡한 눈으로 쓰
러진 강해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