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_누구야? 내 친구 건드린 놈이?
1.
케이지를 내려오는데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호의도 적의도 아니지만, 조금은 불편한 눈빛들.
저 눈들을 보니. 어쩌면 내가 유력한 우승후보일 수도 있겠다는 망상이 뇌리
를 퍼뜩 스쳤다.
‘에라. 아서라. 우승은 무슨.’
찰나 간 스친 생각이었지만 그건 너무 뇌내망상이었다.
물론 이쯤 되면 내가 가진 재능이 남다르다는 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다.
정말 운동이라고는 해본적도 없는 일반이니 그래도 몇 개월 이상씩 수련한 아
마추어를 이겨낸다는 건 만화나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일이겠지.
그게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정말 범상치 않은 재능이라는 것일 테고.
WFC 랭킹 4위라는 최두호 선수가 직접 찾아와 코칭 스텝을 맡겠다고 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아까 중간평가에서도 한번 느꼈지만, 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원석이긴 하되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내가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의 우승을 거머쥘 거라는 착
각은 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진행자는 마무리 멘트를 하면서 방송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나머지 도전자들
도 각자 정리를 마치고는 각자 흩어지고 있었다.
덩어리는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니 매우 분하거나 혹은 울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고.
뭐. 둘 중 뭐가 됐든 내가 가서 해줄 말은 없었다.
“이번 주 수요일. 오시는 거죠?”
“어. 네. 최대한 가도록 해볼게요.”
최두호 선수는 처음보다는 많이.
리벤지 매치를 하기 전보다는 조금 더 차가워진 모습이었다.
내가 너무 말을 안 들었나?
이래저래 몸도 정신도 지치는 하루였다.
이럴 땐 진짜 씨-원-한 맥주! 가 간절했다.
맥주에 어울리는 친구 놈들은 당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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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에는 너한테 찾아와서 뭐라 안하디?”
“뭐. 덩어리?”
“어. 고딩은 끝나고 너한테 와서 사과하고 했다며.”
“그런 거 없었다. 그럴 정신도 없었고. 나도 짐만 챙겨서 바로 나왔는데 뭐.”
정기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훈련은 재밌지만 뭔가 턱턱 막히는 듯 한 기분에 준현이 놈에게 연락했더니
일이 커져서는 친구 놈들이 다 모여 버렸다.
“와. 근데 해서 저 놈이 남 때리는 게 상상이 안 가는데?”
“그러게. 너 사람 때려본 적은 있냐?”
“이번에 신선한 경험을 했지.”
기태의 질문처럼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싸워보거나 남을 때려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놈들이랑 뭉쳐 다니면서 만화책이나 보고 피씨방이나 다녔
지. 싸움 같은 건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누굴 때린다는 행위에 거부감이 들진 않더라. 글러브를 껴
서 그런가? 공식적인 시합이고?”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니놈 새끼가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고.”
“응. 나 너는 잘 때릴 수 있어.”
기껏 진지하게 대화하는데 준현이 놈이 딴지를 걸었다.
안되겠군. 오늘 주 적은 저놈이다. 준현이가 좋아하는 안주 위주로 흡입해주지.
“그래도 해서 너 살 좀 빠진 것 같다? 이제 두 번 나갔다면서?”
“그런가? 딱히 몸무게를 재보진 않아서 모르겠네.”
“아냐. 얼굴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은데? 이제 턱 비스 무리한 게 좀 보일 것
도 같고...”
“니눔 새끼도 오늘 같이 맞자.”
꿀꿀한 감정이 언제 있었냐는 듯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술자리가 되었다.
나이가 벌써 서른이지만, 이놈들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
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유치한 걱정거리들로 세상이 무너질 듯이 고민하며, 정작
인생의 중요한 고민들은 없었던 시절. 마냥 철없던 그때 그 시절이 오버랩 된다.
‘그래서 이놈들이 좋은 거지.’
그렇게 재현이 놈과 준현이 놈을 양쪽에 끼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데
“저기요. 좀 조용히 좀 합시다. 여기 전세 냈어요?”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레퍼토리에 낯선 존대.
보통 이런 말은 반말을 기본으로 하지 않나?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듣던 말을 존댓말로 들으니 감동이 덜한데?
“하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뒷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들의 지적에 성격 좋은 재현이가
웃으며 나섰다.
“야. 우리끼리 너무 신났나보다. 좀 조용히 하자.”
“그래. 해서 저새키 목소리가 커서 그래. 요즘 뭐 운동한다더니 목소리만 키
웠나.”
“뭐 인마?”
“야!... 또 시끄럽게 하지 말고. 또 지랄할라.”
우리들은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킥킥대며 우리들은 대체 언제쯤 철이 들까를
두고 새로운 토론에 들어갔다.
“어후. 슬슬 일어나자. 난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렇게 이어진 술자리는 어느새 막차가 끊길 시간까지 늘어졌고, 평일 술자리
인지라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슬슬 마무리를 지을 타이밍이 왔다.
나는 슬슬 일어나자는 말과 함께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고.
“뭐야. 너네 분위기가 또 왜 이래?”
출산의 고통을 겪고 오니 애들 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야. 너네 또 싸웠냐?”
애들이 남자애들이기도 했고, 또 장난의 선이 아슬아슬하다보니 가끔씩 서로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한 번씩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도 있었고.
그래도 자식들. 아직 혈기왕성하구만. 술 먹고 싸우기도 하고.
“누구야. 누구랑 누가 싸운 거야? 준현이 너야? 아니면 기태랑 재현인가?”
“야. 아니라고. 빨리 계산하고 나가자.”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려고 해도 애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얼레. 이 새끼들 진짜 이상하네? 야. 뭐냐? 준현아. 뭐야?”
“아 됐고. 빨리 좀 나가자고!”
아. 왜 나한테 씅질이야.
기분 좋게 한 잔 했구만 마무리 분위기가 왜 이래?
“킥킥...”
“푸하하하. 저 새끼들 존나 웃기네.”
그때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그냥 지네들끼리 하는 말이겠지 싶었지만 느낌이 쎄 해서 뒤 돌아보니. 아니
나 다를까 우리 쪽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야. 쟤 봤다. 쟤 걔 맞지? 스트리트 파이트?”
“어. 맞아. 맞아. 쟤 홍대 오디션 볼 때 같은 술집에 있었다니까.”
“진짜 저게 프로 파이터 이겼다고? 존나 둔해 보이는데?”
명백히 우리를 보며. 정확히는 나를 보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야! 씨발 그냥 좀 가자니까!”
그때 준현이가 보기 드물게 화를 내며 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현자 준현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낸다면 일단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를 나서려는데.
“병신 새끼들. 쳐 맞고 째는 거 봐라. 남자 새끼들이.”
하필 듣지 말아야 할 대사를 들어버렸다.
“야. 멈춰봐.”
나는 준현이와 기태. 재현이를 멈춰 세웠다.
“너네. 쟤네랑 시비 붙었냐?”
“...”
“아니. 너네. 쟤네한테 맞았냐?”
“미친 새끼. 뭐래? 피곤하니까 그냥 집에나 가 좀!”
“구라 깔 생각 하지 말고. 나중에 나 진짜 서운하게 할 생각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라. 너네 쟤네랑 무슨 일 있었어?”
“아! 쫌!”
내가 멈춰 세워도 계속 별 일 아니라는 재현이 놈.
준현이와 기태는 별 말이 없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뭔 일 있었네. 뭔 일 있었어.
그런데 재현이나 기태 정도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스타일은 아닌데. 오히려
일을 크게 벌여서 나와 준현이가 말리는 포지션이었으면 포지션이었지.
“이야아. 그래도 의리가 좋네. 친구 지키려고 얻어맞고도 입 꾹 닫고?”
“야야. 애들 울겠다. 그만해라. 푸하하하.”
얼씨구?
“야. 재현아. 기태야.”
“...”
“진짜 혹시 나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네 괜히 쟤네랑 싸웠다가 나한테 뭔 문
제 생길까봐 그냥 맞았냐?”
“...”
맞았네. 맞았어.
하놔. 이 병신 새끼들.
내가 언제부터 티비 나왔다고.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야. 강해서. 씨발 알면 그냥 좀 가자고. 재현이나 기태가 왜 그랬는지 알겠
으면.”
“지금 이 꼴로 그냥 집에 가자고?”
“그러면? 애들 생각해라. 다 너 생각해서 꾹 참고 넘어갔으니까. 여기서 니가
일 벌리면 애들만 바보 되는 거야.”
하...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하나?
“야. 야. 쟤들 멈춰 섰잖아. 빡쳐서 덤비면 어쩌려고 그래? 큭...”
“그러게. 스트리트 파이트 도전자께서 덤비면 우리 다 아구창 털리는 거 아냐?”
“시바 존나 무섭다. 누가 경찰 좀 불러라. 여기 격투기 하는 사람이 사람 때
리려 한다고.”
저런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그냥 있으라고?
와... 그러고 보면 기태랑 재현이가 대단했네.
평소에 이런 시비가 붙으면 나랑 재현이는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기태랑 재현
이를 말려야 된다는 생각부터 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우리가 말리면 기태와 재현이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하자는 대로 따라줬고.
어떻게 그렇게 했지?
“저기요. 지금 저희한테 그러신 거죠?”
나는 그렇게 못하겠는데.
너네가 말려도 난 못 참겠다.
“어? 야. 씨발 진짜 왔잖아?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째? 아까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아직 탈락 안했다던데. 그
러면 우리 못 건드려.”
“우리 건드리면 바로 하차 각이지. 야. 폰 꺼내 동영상 녹화 켜.”
와.
얘네 진짜 얍삽한 애들이구나?
“준현아. 너네. 정확하게 얘네랑 무슨 일 있었냐? 그거 말 안 해주면 나 얘네
들한테 물어본다?”
나는 등 뒤의 준현이 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물었고.
“하아... 해서 너 화장실 가고. 우리끼리 또 떠들다가 저쪽에서 조용히 하라
고 한 번 더 이야기가 나왔어. 우리도 알겠다고 이야기 했고. 그런데 저쪽에
서 해서 너가 스트리트 파이트 출연하는 걸 알아보고 우리 쪽으로 시비를 걸
었어.”
“시비? 어떤 시비?”
“너 싸움 잘하냐고. 자기들도 싸움 잘하는데 한판 붙어보면 안되냐고.”
“그래서?”
“재현이랑 기태랑 그런 거 안한다고. 죄송한데 자리로 가달라고 했는데. 그러
다 약간 몸싸움 있고 재현이랑 기태랑 한 대씩 맞았어. 크게 싸운건 아니야
진짜.”
“재현아. 기태야. 준현이 말 맞아?”
“...어.”
기태는 끝까지 대답은 안하지만 고개는 끄덕였다.
하... 저놈들이 나만 아니면 몸싸움이고 맞고 간에 참을 놈들이 아닌데.
오늘 술자리도 나 때문에 모인거라 더 미안하네.
“저기요. 양아치 새끼들아.”
나는 우리를 보며 낄낄대던 네 명의 양아치 새끼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 했다.
“내가 스트리트 파이트를 나가든 말든. 너네가 무슨 상관이길래 이렇게 술자
리에서 오지랖이야? 뭐? 싸움을 잘 해? 한 판 떠? 영상을 찍어?”
“뭐, 뭐! 이거 영상 찍고 있다? 계속 해봐. 너만 손해지.”
“너네가 영상 찍기 전에 애초에 여기 씨씨티비가 아까 너네가 한 짓 다 찍고
있었을 걸? 아까 경찰 신고한다고? 내가 해줄까? 신고? 누가 불리한지?”
“... 어쨌든 폭행 시비에 휘말리면 넌 하차야! 내가 인터넷에 영상 다 올릴
거라고!”
하아...
얘네가 하나 모르는 게 있다.
“올려.”
“뭐, 뭐라고?”
“올리라고. 그딴 프로그램 출연 안 해도 상관 없으니까.”
난 진짜 호기심에 길거리 오디션을 봤고.
그게 덜컥 붙어서 지금 스트리트 파이트에 출연 중이었다.
애초에 내 꿈과 목표 따위가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이다.
“너네가 먼저 시비 걸었고. 너네가 먼저 선빵 쳤는데. 어쩔래? 경찰 부를까.
아니면 너네도 한 대씩 맞을래?”
“... 아. 씨발. 진짜 올린다?”
“경찰 불러?”
“...이거 진짜 올려...요? 괜찮아요?”
갑자기 존댓말은.
“올리라고. 니네가 올리든 말든 난 경찰에 신고할 거야. 아니면 내 친구들 때
린 놈들. 똑같이 한 대 씩 맞던지.”
애들이 말이 없네.
“준현아. 아까 기태랑 재현이 때린 놈들이 누구라고?”
“쟤랑. 쟤.”
“오케이.”
침묵은 긍정이지.
한 대씩만 맞자.
딱.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