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_혹시. 피자 좋아하세요?
1.
“다음! 강해서 도전자!”
중간 평가 첫 시합.
내 상대는 지난번 맞잡기 훈련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해서 씨. 알죠? 가망 없는 판은 최대한 체력 아끼는 거.”
“네. 네.”
첫 시합부터 체력 아끼게 생겼네.
상대 선수는 키도 180정도 돼 보이고 꽤나 덩치도 있었다.
지난번 맞잡기 훈련 때를 회상해보면 힘도 좋은 선수였으니 거르는 타선이 맞
겠지.
“아저씨. 홍대 오디션 때 보니까 타격 좀 하던데?”
분명 거르는 타선이 맞는데.
“그런데 힘은 비리비리 하더만. 지난번 맞잡기 때 보니까. 지호도 방심만 안
했으면 이런 아저씨한테 조기 탈락 안 했을 텐데. 쯧.”
...이놈은 덩치가 있다. 그러니 이놈은 앞으로 덩어리라 부르자.
애석하게도 내 좁은 거름망은 이런 덩어리는 거르질 못한다.
그러면 어쩌겠어. 덩어리가 있어서 안 걸러지면 찌그러뜨려서라도 걸러야지.
-삑!
시합을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덩어리 놈은 거칠 것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타격 기술을 허용하지 않는 룰이었으니 거리낄 것 없겠지.
“흐읍!”
상체를 낮추고 내 복부 쪽으로 어깨를 들이미는 덩어리.
이대로 어깨를 내 배에 맞대고 다리오금을 잡아채며 날 쓰러뜨리려 하겠지.
-스윽
저 덩어리가 원하는 대로 넘어가주면 못 이긴다.
힘이랑 체력이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효율적인 포지션을 가
지고 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라운드 기술. 그 중에서도 관절기라 하는 것들은 힘이 약한 여자라도 힘 좋
은 성인 남성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들이 많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할 줄 모른다는 것뿐이지.
-퉁!
나는 반쯤 넘어지다시피 하며 돌진하는 덩어리를 왼쪽으로 돌아 피해내며 오
른쪽으로 밀쳐냈다.
결과적으로 혼자 바닥에 처박히듯 넘어진 덩어리.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쓰러진 덩어리의 뒤를 잡고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하려
했지만.
“흐아압!!”
뭔 멧돼지도 아니고. 힘이 왜 이렇게 좋아?
뒤에서 목을 휘감으려던 내 팔을 힘으로 뜯어내며 내 다리를 후려 넘어뜨리려
는 덩어리.
저 다리에 걸리면 바닥을 뒹구르며 진흙탕 싸움이 될 게 뻔했기에 점프하듯
발을 띄워 덩어리의 공격을 피해냈다.
“으랴아압!!”
내 양 발이 공중에 뜨자 그대로 상체를 숙이며 등 뒤에 있던 나까지 엎어치기
를 하는 덩어리.
손이 자유롭지 못해 낙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순간 내 위로 올라타며 유리한 포지션을 가져가려는 덩어리.
그도 충격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듯 살짝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였고, 그 틈을
타 허리를 튕기며 덩어리의 균형을 더욱 무너뜨렸다.
“어억..!”
그 틈을 타 오른손으로 덩어리의 왼팔 손목을 잡고 왼손까지 덩어리의 오른손
으로 향했다.
덩어리는 왼 팔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주면서 자신의 오른 팔로 내 왼 손을
떼 내려 했고, 덩어리의 오른 팔이 명치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온 순간.
-흐읍!
밀어내던 오른손의 힘을 빼고 왼 팔은 바깥으로 빼며 겨드랑이를 열었다.
“...!”
밀어내던 내 오른손의 힘이 사라지자 순간 내 쪽으로 훅 기우는 덩어리의 상체.
이미 덩어리의 오른 팔은 균형을 잡기에는 너무 몸 안쪽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기, 길로틴 초크! 강해서 도전자! 길로틴 초크를 잡았습니다!”
내가 아는 기술 중 몇 안 되는 기술.
기술이라기도 뭐 하지. 친구들끼리 맨날 헤드락이니 길로틴이니 하면서 놀던
장난 같이 쓰던 기술이었다.
“크윽...”
왼쪽 겨드랑이 안쪽으로 덩어리의 머리를 짓누르며 왼 팔뚝으로 덩어리의 턱
을 확실히 느꼈다.
-쿠웅!
아따. 힘 좋네.
억눌린 신음을 흘리면서도 날 밀쳐내는 덩어리.
왼 팔에 경련이 오는 것 같았지만 오른손으로 바짝 당기며 힘을 풀지 않았다.
하. 최두호 선수가 그라운드 기술이 왜 체력전이라는지 알겠다.
유산소 운동과는 달리 벌써 팔의 힘이 풀릴 것 같았다.
-탁. 탁! 탁!!!
“탭! 탭! 강해서 도전자! 그만! 강해서 도전자 승!”
다행히 내 힘이 완전 빠지기 전에 덩어리가 탭을 치며 내 승리가 선언되었지만.
“으아아악!! 씨발!!”
덩어리는 힘이 넘쳤고
“헤엑. 헤엑. 아고. 죽겄다.”
나는 너무 지쳤다.
이거. 승자랑 패자가 바뀐 것 같은 그림인데 말이야.
“강해서 씨?”
“아. 최두호 선수...”
“잘 했습니다.”
“...네?”
꽤나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넘겨야 할 선수를 감정적으로 상대해버렸으니까.
“어때요?”
“네?”
“이기니까. 기분 어떻냐구요.”
“...뭐. 좋네요.”
“그거면 됐습니다. 격투기에서는 머리 굴리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전략을 짠 겁니까요.
“대신 지는 경험도 필요하겠죠?”
“네?”
“나가세요. 바로 해서 씨 시합입니다.”
“아...”
왼 팔은 아예 어깨 위로 들지도 못하겠는데.
망할...
**********************
‘흠...’
최두호는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눈과 바디 컨트롤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그라운드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그라운드 싸움은 생각보다 많은 수 싸움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머리가 좋고 영리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정확히는 찰나의 순간에 상대의 움직임을 캐치하고 예상한 뒤 자신에게 유리
한 방향으로 포지션을 연계해가는 머리싸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캐치’하고 ‘예상’ 하는 건 ‘경험’에서 나온다.
이런 포지션 다음에는 주로 어떤 포지션으로 많이 넘어간다든지. 이 기술 다
음에는 어떤 기술로의 연계가 많다던지.
‘강해서는 그런 경험 없이 그냥 보고 기술을 넣었어.’
초심자의 행운일 수도 있었다.
상대방의 실수와 이쪽의 운이 맞닿으면 저런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옆에서 강해서를 지켜본 최두호는 결코 조금 전의 승리가 운이라고 생
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확신에 찬 표정으로 기술을 걸었지.”
“네?”
“아. 아닙니다. 벌써 끝났습니까?”
“... 네. 8패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죠. 8번이나 인간 관절기계가 돼서 이리 꺾이고 저리 던져지고 했구만.”
엄살을 피우며 구석으로 가 쓰러지듯 널부러져 앉는 강해서 도전자.
저런 열의 없는 모습 뒤에 세계 최정상급 격투기 선수인 최두호 자신조차 경
악할만한 재능이 있다는 걸 과연 사람들은 믿을까 싶었다.
“해서 씨?”
“네?”
“이번 주 화. 수. 목 다 나오면. 목요일 저녁에 아름 씨랑 식사자리 만들어볼
게요. 어때요?”
“와. 저 오늘 몸뚱이 부서질 거 같아서 내일은 죽어도 못 움직여요. 수, 목
하시죠.”
“대신 수요일 목요일 둘 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콜?”
“콜!”
최두호는 생각했다.
이 찬란한 재능의 원석이라면.
세계에 대한민국의 격투기를 알릴 수 있으리라고.
2.
“아고고고... 온 삭신이 다 쑤시네.”
“스트레칭으로 충분히 풀어줘야 합니다. 해서 씨.”
“뉘에. 뉘에.”
당장은 탈력 감으로 팔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용을 써본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강해서 씨?”
최두호 선수의 말에 따라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내게 다가오는 방송국 스텝.
“네?”
“잠시만 이쪽으로...”
그리고는 최두호 선수의 눈치를 보는 듯 하며 나를 끌고 제작진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강해서 씨. 혹시 지금 시합하시라면 하실 수 있겠어요?”
“네? 갑자기요?”
“아까 강해서 씨랑 시합했던 안민기 씨가 재밌는 제안을 해와서요.”
“안...민기 씨요?”
안민기가 누구야?
“그. 해서 씨랑 중간 평가 첫 시합 하셨던 분이요. 해서 씨가 1승 하셨던.”
“아아. 덩어리.”
“네?”
“아. 아니에요. 여튼 그분이 무슨 제안을 하셨다구요?”
“네. 안민기 씨가 종합 룰로 강해서 도전자랑 붙고싶다고 하셔서요.”
“지금요? 저랑 그 사람이랑 둘 만요?”
“네.”
아까 나한테 지고 어지간히 빡쳤나보네.
하긴. 그 이후로는 키 작고 마른 사람들한테도 다 졌으니.
그러면 다음 탈락자 선정 때 나랑 붙고싶다고 어필을 하던가.
이상한 사람이야 정말.
“그래서 제작진이 상의한 결과. 아무래도 격투기 프로그램이다 보니 이런 경
우가 생길수도 있고, 이것도 재미있는 그림이 될 것 같아서 강해서 도전자님
만 승낙하시면 두 분의 데스매치를 진행해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데스매치요?”
“네. 이번 시합은 돌발시합이고 도전자들이 원해서 성사되는 매치인 만큼, 패
배하는 쪽이 탈락하는 방향으로 갈거에요.”
“지는 사람은 탈락이라는 말씀이시죠?”
“네.”
흠.
-붕. 붕.
다행히 아까 힘을 쓴 건 왼팔이라. 오른팔은 좀 쌩쌩했다.
“하죠.”
“진짜요?”
“네. 전 괜찮습니다. 진행시키시죠.”
“네! 알겠습니다. 돌아가셔서 잠시 몸 풀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뭘 감사할 것까지야.
허리 숙이는 게 습관인 사람이구만.
“무슨 일이었어요?”
“뭐. 별거 아니었어요. 저 몸 푸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마무리 스트레칭?”
“아뇨. 시합 한판 더 뛰어야 할 것 같아서.”
“...네?”
눈이 동그래진 최두호 선수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자
그게 무슨 별거 아닌 일이냐며 펄쩍 뛰었다.
“아니. 몸살 날 것 같다는 사람이. 지금 시합을 뛰어요? 그것도 탈락을 걸고?”
“좀 쉬어서 괜찮아요. 봐요. 쌩쌩하죠?”
나는 오른팔과 왼팔을 붕붕 휘둘러가며 씨익 웃어보였다.
아닌 말이 아니라. 진짜 꽤 많이 회복되었다.
이정도면 100프로는 아니라도 7-80프로는 회복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회복된 것 같아도 막상 움직여보면 금방 힘 빠집니다. 1라운
드도 제대로 못 뛸 거예요.”
“괜찮아요. 1라운드 안에 끝내면 되지.”
“아니... 하...”
최두호 선수는 답답하다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이미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었다.
제작진은 급하게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었고 진행측은 내용을 전달받았는지 카
메라 중앙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들 촬영을 끝내고 마무리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지금 안민기 도전자의 돌발
요청이 있었습니다. 안민기 도전자가 조금 전 중간점검 시합에 대한 리벤지
매치를 요청하셨습니다. 안민기 도전자. 앞으로 나와 주세요.”
“네. 안민깁니다. 중간점검 시합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강해서
도전자와 종합격투기 룰로 진짜 제대로 한판 붙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격투기를 하다보면 이런 부
딪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강해서 도전자. 안민기 도전자의 리벤지 매치 제
안. 받아들이겠습니까?”
전두형 멘토는 이미 합의된 내용을 방송용으로 한 번 더 그림을 만들며 내게
매치 제안을 받아들이겠냐 물어왔다.
여기서 안하겠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궁금하네.
“네. 하죠. 뭐.”
“좋습니다. 강해서 도전자도 승낙을 하셨으니 돌발 리벤지 매치. 진행하겠습
니다. 다만 도전자분들의 의지로 성사되는 매치이니만큼 지는 쪽은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탈락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네.”
“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시작된 리벤지 매치.
집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나머지 도전자들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케이지를 둘러
싸고 시합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하. 진짜. 힘도 없는 아저씨가 재수 좋게 한판 이겼다고.”
시합 전부터 덩어리가 입으로 똥을 싸네.
“아저씨. 내가 왜 오늘 리벤지 매치 해 달라고 한 줄 알아? 아저씨 지금 팔
들 힘도 없지?”
“뭐?”
“일부러 오늘 꼭 붙여 달라고 했어. 확실하게 발라주려고.”
“하...”
얘 앞에서도 팔 좀 휘둘러 줘야 하나.
나 진짜 팔 힘 많이 돌아 왔다니까?
“야. 덩어리. 너. 피자 좋아하냐?”
“...뭐?”
비록 중간 점검에서는 서브미션으로 승리를 가져가긴 했지만, 오늘 하루 종일
내가 했던 훈련은 타격 훈련이었다.
상체를 낮추고 눈알을 굴리는 게 태클 걸 타이밍을 잡나본데.
-휘익!
중간 점검 때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게 거리를 재며 내게 달려드는 덩어리.
아까는 왼쪽으로 돌며 어깨를 밀어냈지만.
-퍼억!
이번에는 뒤로 살짝 빠지며 왼손으로 덩어리의 안면을 두드렸다.
오른손을 올려 내 왼손 잽을 가드 한 채 다시 들어오는 덩어리.
버틴다 이거지?
-뻐억!
오른 손을 올리느라 비어있는 복부를 향해 왼손 바디 한방.
“크흑...”
거기서 오른쪽으로 스텝을 밟아 나가며 오른손으로 살짝 힘이 풀린 듯한 덩어
리의 왼쪽 손등을 때리듯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컥!”
덩어리의 왼손은 자기 턱을 치며 밑으로 떨어졌고.
“이게 콤비네이션이라는 건데. 니 얼굴은 오늘 페페로니로 만들어줄게.”
비어있는 덩어리의 얼굴로 오른쪽 주먹을 한방 더 구겨 넣자 힘겹게 왼손 가
드를 올렸다.
이거 어쩌니. 복부가 비었네.
아쉽게도 난 다리랑 오른팔은 쌩쌩하단다.
-뻐억!
비어있는 덩어리의 복부의 틈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때렸다.
“꾸웨에에엑.”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고꾸라지는 덩어리.
쟤 토한 거 같은데?
“넌 피자보다 빈대떡 파구나?”
거기에 얼굴 쳐 박고 있으면 무슨 기분이니 대체.
“스, 스탑! 스탑! 경기 종료! 강해서 도전자 승!”
서브미션이 뭐.
그라운드가 뭐.
당하기 전에 때려잡으면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