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크리스마스 파티 (5)
* * *
그레이스 씨와 마주 보며 술을 마시는 상황.
그녀와의 대화는 대부분 결혼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애들 이름은 정했어?”
“음…아직 결혼도 안 했는걸요.”
애슐리 씨와 나 사이에 태어날 아이에 대한 궁금증.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는 그레이스 씨에게 정말 감사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당장 아이가 없는 상태인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아직 안 정했다고 하니 다행이네.”
“네?”
“아이 중 한 명은 그레이스 라고 해주면 좋을 거 같아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름 대모인데 이 정도는 요구해도 되는 거 아니야?”
“하하…하.”
“장난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애는 몇이면 좋겠어?”
“음…솔직한 마음으로 정말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생기는 문제.
아이들이 많으면 지금 사는 곳에서 떠나야 한다는 문제가 생겼다.
솔직히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데…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카페를 접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거기다 1 층에 바로 카페가 있다 보니 가까운 점도 좋았다.
“다행이네.”
“어떤 점이 그레이스 씨에게 다행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만큼 대모로서 할 일이 많다는 뜻이잖아. 거기다 자주 애슐리와 존의 집에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상태로 말씀하시는 그레이스 씨.
살짝 취한 모습이지만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진심으로 들렸다.
“고맙다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돼.”
“하하…”
“메간도 비슷한 생각이니까.”
“메간 씨도요?”
“응, 저 도마뱀도 지금 상황을 꽤 만족스러워하더라고.”
“그렇군요.”
동거를 시작한 그레이스 씨와 메간 씨.
그렇다 보니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 부분도 공유하시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말하기도 했는데 이참에 확실히 한 거지.”
“그건 그렇죠.”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자주 이야기한 그레이스 씨와 메간 씨.
두 분은 정말 감사하게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와 애슐리 씨의 아이들의 대모가 되기를 원하셨다.
정말 감사한 부분.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의 도움을 자주 받아 죄송할 따름이었다.
“존이랑 애슐리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니까.”
“저희가요?”
“물론이야. 이렇게 크리스마스에 갑자기 찾아와서 재워달라고 하면 재워 줄 곳이 몇이나 있겠어?”
“하하…”
확실히 가족과 지내는 날인 크리스마스.
아무래도 서양에서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날인데 갑자기 지인이 찾아와 하룻밤 재워달라고 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 집에 당장 가족이 없어서 그런 부분도 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그레이스 씨는 이 부분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셨다.
“다른 집이었으면 안 받아줬을 거고 나는 낑낑 대며 메간을 끌고 저쪽까지 가야 했을걸.”
우리 집에서 꽤 먼 곳을 가리키는 그레이스 씨.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 집에서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가 사는 곳은 꽤 거리가 있었다.
그냥 걸어서 간다면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문제는 메간 씨가 완전히 뻗어 버렸기에 그레이스 씨가 낑낑대며 가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레이스 씨와 메간 씨를 그렇게 보낼 생각이 없는 나.
우리 집을 찾아오시지 않으셨더라도 안으로 모셨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걱정해줘서 고마워.”
배시시 웃음을 짓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어느새 술잔에 데킬라를 채우고 날 바라보셨다.
“건배 해 줄 거지?”
“물론이죠.”
그렇게 잔을 부딪힌 상태.
오랜만에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니 기분이 묘했다.
이 분위기가 그렇고 그런 느낌이라는 뜻이 아닌,
마치 바에서 술을 마시는, 그런 침착한 분위기 같은 느낌.
우리 집이지만 그런 묘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술이 더 달게 느껴졌다.
술이 달게 느껴진다는 말.
그 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내가 많이 취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다 데킬라는 40 도나 되는 술.
맥주와 달리 취기가 빨리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잔을 비운 그레이스 씨.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날 바라보셨다.
“생각보다 잘 마시는데?”
“아무래도 이대로 뻗을 수는 없으니까요.”
“나랑 내기 하자는 건가?”
“아뇨아뇨. 그런 건 아니고…”
당장 우리 집에 이미 뻗어 있는 메간 씨와 애슐리 씨.
여기에 그레이스 씨도 지금 맨눈으로 보기에는 잔뜩 취하신 거 같아 걱정되었다.
어차피 집 안이라 자면 그만이지만,
내일 아침에 엄청난 숙취가 밀려올 게 분명했으니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다들 숙취가 심하실 거 같아서 제가 아침을 준비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죠.”
“저번에도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 콩나물 국 끓이더니.”
피식하고 웃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미소에 나도 내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상하고, 자상하며, 한없이 자상하네.”
날 지그시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날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을 건네셨다.
“그래서 내가 네 주변을 맴도나보다.”
“네?”
“어떻게 표현은 못 하겠는데 그냥 그래. 너랑 애슐리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한 느낌이야.”
“그렇게 느껴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나랑 도마뱀이 감사를 해야지. 나랑 도마뱀은 친절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거든.”
“에이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정말 많은 부분에 있어서 도움을 주신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
두 분이 얼마나 상냥하신 분들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희한테 물들어서 그래.”
“네?”
“원래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는데…어느 순간 보니까 너희들한테 물들어 있더라고.”
피식 웃으며 말씀하시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나셨는지 얼굴을 붉히셨다.
“조금 전은 너무 오글거리는 대사였어.”
“술에 취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포장해 주니 고맙네.”
잔잔한 미소를 짓는 그레이스 씨.
그녀와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이어 나가며 데킬라 병을 비워나갔다.
* * *
“으응…읏…무…무거워…”
무언가 몸을 짓누르는 느낌.
그 느낌에 나는 몸을 뒤척여 보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든 바둥거려 보지만 전혀 반응이 없는 상태.
나는 눈을 살짝 떠서 상황을 살펴 보려 했다.
“음…”
내 옆으로 누워 있는 세 명의 여인들.
분명히 메간 씨는 예전 올리비아 방에 재워두었고,
이후 완전히 취한 그레이스 씨는 메간 씨 옆에 두었는데 눈을 떠보니 나와 애슐리 씨가 자는 침대에 누워 계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을 곰곰이 해 보아도 도통 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
혹시 어제 네 명이서 했나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어 아래쪽을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가 나와 애슐리 씨 방에 들어온 것뿐.
그 이후는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어떻게 보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 곤히 자는 상태.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침대에서 빠져나온 상황.
다행히 모두 술 때문인지 내 뒤척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주무시고 계셨다.
살금살금 빠져나온 내 방.
혹시 잠에서 깨실수 있으니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대략 아침 10 시.
하지만 겨울의 밴쿠버이다 보니 살짝 어둑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보다 살짝 위쪽에 위치한 밴쿠버.
그렇다 보니 여름 기간에는 해가 길고 겨울에는 해가 짧았다.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밴쿠버는 좀 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어둑한 느낌의 아침을 뒤로하고 주방으로 향했는데…
어제 그레이스 씨와 술을 마신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걸 모두 치우고 있는데…눈에 걸린 한 가지.
그레이스 씨가 앉았던 자리에 매우 익숙한 팬티 하나가 보였다.
메간 씨의 집에서도 자주 봤었던 그 팬티.
그 팬티가 왜 여기에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 씨의 술 버릇.
정확하게 술버릇이라 하기에는 그렇지만 술을 마시면 더 그런 모습을 보이셨다.
약간 끈 팬티 형식의 팬티.
그레이스 씨는 어제도 술 기운에 불편하다면서 갑자기 무언가를 벗은 다음 의자 옆에 두셨는데…
그게 팬티일 줄은 전혀 몰랐다.
이걸 그대로 놔두기에는 조금 애매한 상황.
그래서 일단 조심스럽게 집어서 구석에 고이 놔두었다.
얼추 정리된 상황.
이제부터 아침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할 아침은 당연히 국물 요리.
숙취에는 국물 요리가 최고라는 생각이 언제나 있었기에 오늘 아침도 국물 요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 할 숙취용 국물 요리는 쌀국수.
베트남 쌀국수를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집에 있는 쌀국수 면.
가끔 이 쌀국수 면을 이용해 샐러드를 해먹으면 맛있었기에 찬장에 사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소고기 베이스의 베트남 쌀국수.
그렇다 보니 국거리용 소고기를 삶아서 만들어야 했지만,
그럴 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무엇보다 당장 양지머리나 앞다리, 목심 부위가 없어서 이 국물 부분은 소고기 다시다로 대체할 예정이었다.
대신 고기는 잔뜩 넣을 생각.
냉동고에 보관해 둔 소고기를 넣을 예정이었다.
모든 게 준비되어 있으니 만들기 쉬운 소고기 쌀국수.
정확한 베트남 식 쌀국수는 아니지만 얼추 비슷하게 맛은 낼 수 있었다.
먼저 소금을 넣어 둔 물을 팔팔 끓여 면을 삶아 두고,
이후 다른 냄비에 국물을 만들 준비했다.
개인적으로 마늘 기름을 내는 걸 좋아했기에 먼저 냄비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간 마늘을 낮은 불로 볶았다.
이 이후 냉동 고기를 넣고 천천히 녹을 때까지 기다리면 끝.
이 이후 물을 붓고 소고기 다시다를 넣으면 완성이었다.
이제 쌀국수에 들어갈 야채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
숙주나물과 청경채 그리고 베트남 홍고추를 넣으면 되는데…
이 홍고추가 많이 맵다 보니 미리 넣기보다는 취향에 따라 넣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다 만든 상태.
이제 이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면을 건져낼 무렵 방문을 열고 나온 애슐리 씨.
아직 완전히 취기를 밀어내시지는 못했는지 살짝 꼬여 있는 그녀의 귀가 보였다.
귀여운 애슐리 씨.
그녀는 눈을 비비며 천천히 내게 다가오셨다.
그러고는 양팔을 벌려 날 안아 주신 애슐리 씨.
그녀는 날 바라보며 배시시 웃음을 지으시더니 얼굴을 내 품에 넣으시더니 말을 건네셨다.
“좋은 아침이예요. 존 씨. 하암…”
“좋은 아침예요. 애슐리 씨.”
몸으로 느껴지는 애슐리 씨의 따듯한 체온.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