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추억 (4)
* * *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시는 애슐리 씨.
하지만, 그녀의 눈가가 너무 붉어진 거 같아 나는 내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었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게 잘 됐어요.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 사귀는 법도 배웠고 밴쿠버의 삶도 배우게 되었죠.”
“존 씨도 저랑 비슷한 안 좋은 경험이 있으셨군요…”
“애슐리 씨가 겪은 일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제게도 어려움이 있었긴 했어요. 하하…”
내 어색한 웃음.
누구의 고난이 더 어려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고난이 찾아왔고,
내게도 그런 고난이 찾아왔을 뿐이었다.
다행히 내 옆에는 은인이신 할아버지가 있었고 그분 덕분에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럼 그분은…”
“할아버지 분이요? 제게 카페를 물려주신 뒤 몇일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셔서 그런지 장례식장에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었죠…”
그 때의 기억.
할아버지에게는 안타깝게도 자녀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은 내가 담당하게 되었고,
나는 할아버지의 많은 지인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보리스의 아버지셨고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할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더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다른 분은 지금 올리비아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의 주인이셨던 리암 씨.
어떻게 보면 그 인연이 올리비아까지 이어진 셈이었다.
“존 씨에게는 정말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시네요.”
“맞아요. 정말 많은 부분을 영향을 주셨죠.”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세상을 원망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취직도 안되고,
집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모든 게 원망스러웠던 그 시기.
그 시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분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기일이요?”
“네, 할아버지는 산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풍기셨는데 진짜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기일도 겨울이에요.”
내 어색한 말.
솔직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감정이 북받쳐 이런 말이 나왔다.
조금 떨리는 감정.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섞여 버려서 그런지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런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애슐리 씨.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고는 미소를 지으셨다.
“괜찮아요. 존 씨.”
“…고마워요. 애슐리 씨. 조금 괜찮아 진 거 같아요.”
예전과 달리 혼자가 아닌 상태.
내 옆에는 사랑스러운 애슐리 씨가 있었고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그 은인이신 할아버지 분의 기일에 같이 가요.”
“괜찮으세요? 애슐리 씨?”
“물론이죠. 존 씨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제게도 중요한 분이니까요. 무엇보다…”
잠시 뜸을 들이는 애슐리 씨.
그녀는 미소를 지은 뒤 날 바라보았다.
“이렇게 상냥한 존 씨와 만날 수 있게 해주셨으니까요.”
애슐리 씨의 자상한 말.
나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슬픔을 덮어 주는 그녀의 따스한 한 마디.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사람들의 위로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 파트너인 애슐리 씨가 내게 있어서 정신적으로 많은 의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애슐리 씨도 상냥하세요. 이렇게 자상한 말을 하시니까요.”
“히히. 존 씨에게 배웠어요.”
“저 한테요?”
“네, 기억 안나세요?”
“음…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그러자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애슐리 씨.
그녀는 날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가셨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말을 할 줄 몰랐었거든요.”
“그때는…”
안타까운 일을 겪었던 애슐리 씨.
그렇다 보니 그때 애슐리 씨의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었다.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제가 되었어요. 이게 다 존 씨의 영향을 받아서 라고 생각해요.”
싱긋 웃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미소에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사이.
나도 애슐리 씨와 지내며 많은 것들을 그녀에게 받았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맨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 보다는 훨씬 나아진 내 모습.
하지만, 어딘가 부족했었던 내 삶의 한 부분을 애슐리 씨가 채워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말로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애정 어린 사랑.
그녀의 애정 어린 관심.
그녀의 애정 어린 미소.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있어서 가장 많은 것들을 바꿨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이것이었고…
이걸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상황.
그 모습에 애슐리 씨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미안해요. 애슐리 씨. 옛날 생각이 나서요.”
“혹시 할아버지 분에 대한 이야기 인가요?”
“네, 맞아요. 제가 할아버지 카페에서 일을 배운 이후의 이야기죠.”
“궁금해요!”
귀를 쫑긋 세우며 날 바라보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관심에 정말 고맙지만 오늘은 내 이야기를 더 하는 건 좋지 못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려구요.”
“왜요?”
“그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내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바로 현재 내 눈 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애슐리 씨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매일 같이 듣는 소소한 이야기지만,
지금 이 순간이 주는 행복은 지금 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슐리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요.”
“저요?”
“네, 과거보다 현재가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이 순간을 더 즐기고 싶어요.”
“헤헤…”
미소를 짓는 애슐리 씨.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있었던 일이나 독특한 손님에 대한 이야기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매일 같은 듣는 이야기지만 애슐리 씨가 느꼈던 감정들이 녹아 있는 이야기들은 매번 새로웠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하는 오늘 하루의 애슐리 씨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 들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메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찾아오던 그녀가 오지 않았다.
메간 씨에게 있어서 소중한 날인 오늘.
그녀의 과거의 파트너의 날을 기리는 날이었다.
그런 뜻 깊은 날에 메간 씨의 곁을 지켜주기로 하신 그레이스 씨.
내 짧은 생각이지만…마치 과거의 파트너에게 현재의 파트너를 소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가 친구 이상으로 친한 건 맞았다.
하지만, 그 이상인지에 대한 추측을 하는 건 설레발이었기에 나는 이 생각을 내 머릿속에만 놔둔 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애슐리 씨와 함께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헤일리 씨.
그녀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존 씨 그리고 애슐리 씨…”
“아니에요. 어제 저녁에 미리 연락 주셨잖아요.”
오늘 살짝 늦은 헤일리 씨.
어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오늘 살짝 늦을 수 있다는 그녀의 메시지를 어제 확인했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머쓱하게 웃음을 짓는 헤일리 씨.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잘 됐어요.”
“정말요?”
눈을 크게 뜨며 헤일리 씨를 바라보는 애슐리 씨.
그녀의 격한 반응에 헤일리 씨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셨다.
“네…네…! 그…그러니까 다음에 같이 공원을 산책하기로 했으니까요…헤헤…”
“다행이에요. 헤일리 씨 같은 좋은 분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애슐리 씨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자 감사함을 숨기지 않는 헤일리 씨.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축하해 주셔서 두 분에게 감사드려요.”
“아니에요. 헤일리 씨는 저희에에 있어서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카페에 찾아오는 많은 손님들.
그 중 단골 손님들의 좋은 일들이 마치 가족에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다.
“히히…다음에는 꼭 카페에 같이 찾아올게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음료나 샌드위치 등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도와드릴게요.”
“헤헤.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은 소식을 알린 헤일리 씨.
그녀는 나와 애슐리 씨의 격한 축하를 받은 뒤 직원실로 들어가 바로 유니폼으로 갈아 입으셨다.
옷을 갈아 입고 나온 헤일리 씨.
그런 그녀가 맡는 테이블 세션으로 향했는데…
살짝 놀란 눈치로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제가 할 일인데…”
“괜찮아요. 헤일리 씨.”
사실 그녀가 오기 전에 미리 해둔 테이블 세팅.
원래 내가 혼자서 다했었던 일이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늦게 온 헤일리 씨가 허둥지둥하면서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어제 좋은 일이 있었던 그녀가 계속 기분 좋은 감정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미리 해두었다.
“큰 일도 아닌걸요.”
“그래도요…”
미안한 표정을 짓는 헤일리 씨.
너무 미안해 하시는 거 같아 하는 표정이라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주고자 말을 건넸다.
“정말 괜찮으니까 너무 괘념치 마세요.”
그걸 옆에서 본 애슐리 씨.
그녀는 살짝 장난스러운 미소로 헤일리 씨를 바라보았다.
“어제 이야기 조금 해주시면 괜찮을 거 같은데…”
애슐리 씨의 장난스러운 말.
그 말에 헤일리 씨는 얼굴을 살짝 붉히시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정말 칭찬해 주신 것도 있고 그러니…”
그렇게 어제 이야기를 꺼내신 헤일리 씨.
그녀는 풋풋한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나와 애슐리 씨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어제도 모임이 있었거든요…”
어제도 모임이 있었던 헤일리 씨.
그렇게 모임에 간 헤일리 씨는 먼저 와 있던 그 남성 분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셨다고 하셨다.
“평소와 같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데이트로 바뀐 건가요?”
“…네. 헤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철학적인 대화를 한 사람들.
그 이후 각자 집으로 돌아 가려는데…그 헤일리 씨의 마음을 사로 잡은 남성 분이 데이트를 신청하셨다고 하셨다.
“저번에 같이 식사하셨다고 하셨죠?”
우리가 헤일리 씨를 저녁에 초대하려 했었던 날.
그 날에도 헤일리 씨는 그 남성 분과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셨었던 게 기억이 났다.
“네 맞아요.”
“어제도 식사 초대를 받아서요…”
살짝 머뭇거리는 헤일리 씨.
홍조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아무래도 진도가 꽤 빠르게 나갔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