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겨울 (3)
* * *
비와 함께 축축 늘어지는 분위기.
그렇다 보니 카페 내에 늘 틀어놓는 배경 음악을 조금 밝은 계열의 재즈로 바꾸었다.
여름에는 보사노바 풍이나 팝송을 틀었다면,
아무래도 여유롭고 따듯한 느낌을 주는 재즈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LOFI라 불리는,
요즘 영상 사이트에서 계속 유행하는 음악을 선택하기도 했다.
저음역대의 음악인 로파이.
음질이 낮고 잡음이 많은 계열의 노래인데 무언가를 집중하거나 할 때 틀어두면 꽤 좋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틀어놓기에 적당한 노래.
그래서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계속 재즈와 로파이 음악을 섞어 틀어놓고 있었다.
“이제 가을도 곧 끝나가네요.”
“조금 있으면 할로윈이랑 추수감사절도 오고 있으니까요.”
10 월 31에 있을 할로윈.
그다음달 11 월 24 일에는 추수감사절이 있었다.
할로윈 같은 경우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 입장으로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날.
사람들이 카페를 많이 찾아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20~30% 정도 손님이 늘어나곤 했다.
“겨울 음료에 호박을 섞은 음료나 스프를 넣는 걸 생각해 봐야겠어요.”
“저는 무조건 스프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는 애슐리 씨.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녀는 호박 요리를 참 좋아했다.
여기서 말하는 호박은 당연히 잭 오 랜턴 (Jack O’Lantern)을 만들 때 쓰는 호박이었다.
이 호박으로 만드는 맛있는 호박 스프.
애슐리 씨는 이 호박 스프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호박 쿠키는 어때요?”
“쿠키도 좋아요!”
환한 미소를 짓는 애슐리 씨.
그녀는 이미 할로윈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준비하는 나와 애슐리 씨.
오늘은 헤일리 씨가 출근하는 날이 아니라서 이렇게 애슐리 씨와 오붓하게 아침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헤일리 씨가 있어서 아침이 여유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렇게 둘이 딱 붙어서 카페를 준비하는 건 헤일리 씨 앞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그때 열린 카페 문.
오늘의 첫 손님은 메간 씨가 아닌 제임스였다.
“좋은 아침.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일 때문에 온 거지. 하암…”
길게 하품하는 제임스.
평소의 복장과 다르게 남청색 정장 바지에 비싸 보이는 셔츠.
그리고 그 위에 넥타이와 정장 재킷을 입은 모습이 꽤 세련되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제임스 씨. 오늘 정말 멋지신데요?”
“고마워요. 애슐리 씨. 늘 그렇지만 존 보다는 애슐리 씨가 손님을 더 기분 좋게 해주시는 거 같아요.”
제임스의 장난스러운 말투.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날 작업복 아니면 세미 정장을 입고 다니던 네가 적응이 안돼서 그래.”
“그렇긴 하지…”
정장 재킷을 옆에 걸쳐두자 드러나는 그의 우람한 몸매.
아무래도 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다 보니 그의 근육들이 살짝 비쳤다.
“아무튼 잠 좀 깨게 진한 거로 부탁해. 오늘 말 잘해야 해서…하암…어제 연습하느라 엄청 고생했거든…”
길게 하품하는 제임스.
아무래도 피곤에 절은 친구를 위해 강한 녀석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치 커피(Dutch coffee)
흔히 콜드브루 스타일로 불리긴 한데…
실제 더치 커피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일단 갓 갈아낸 커피에 차가운 물이 아닌 얼음물을 지속해서 떨궈야 하는 작업이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다 보니 전용 도구가 필요했다.
다행히 할아버지께서 구비해 두신 이 더치 커피 머신.
그래서 종종 시간이 나면 오랜 시간을 들여 잘 짜낸 더치 커피를 만들어 두었다.
보통 일반 커피보다 쓴맛이 약한 더치 커피.
그렇다 보니 카페인 함유량이 일반 커피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일반 커피보다 오랜 시간, 그것도 차가운 물로 추출하다 보니,
카페인이 더 많이 추출되어 고카페인 음료와 비교될 정도의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 음료였다.
이렇게 만들어 낸 더치 커피와 작은 물 한잔을 제임스 앞에 내놓았다.
“엄청 진한 검은색이네. 무슨 커피야?”
코를 대고 킁킁 대는 제임스.
미국 영향을 받은 캐나다이긴 하지만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영향도 받아서 그런지 커피는 뜨거운 음료라는 개념이 박혀 있었다.
물론 아이스 커피 같은 것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내놓은 커피는 외형상 일반 커피에 가까웠으니 차가운 게 낯선 제임스였다.
“더치 커피야. 잠을 확 깨어 줄 테니까 한 잔 마셔. 그리고 너무 진하면 물 타서 마시고.”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제임스.
그는 그 큰 손으로 더치 커피가 담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했다.
그러자 바로 눈을 크게 뜨는 제임스.
묘한 맛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일반 커피보다는 쓴맛이 덜한데…뭔가…”
“풍미가 많지? 산도도 있고 약간 과일향도 날 거야.”
커피는 엄연히 과일.
그렇다 보니 자라나면서 그 과일 향을 품고 있었다.
이걸 빠르게 볶아서 뜨거운 물에 추출하다 보니 과일향은 사라지고,
커피의 특징인 쓴맛, 신맛, 그리고 미묘한 단맛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추출하면 미약하지만 같이 딸려 나오는 과일향.
여기의 과일향은 미약하지만 푸룬(Prune) 같은 느낌.
서양 자두인 푸룬의 그 맛있는 향과 반대로 커피 외피는 그런 맛은 안 나지만 그런 비슷한 과일 향을 풍겼다.
“오…그런 거 같아. 마시다 보니 괜찮네.”
“다행이네.”
“그나저나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까 진짜 전문가 같은데?”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카페를 운영하는데 공부는 조금 했어.”
프렌차이즈가 아닌 소규모 카페.
그렇다 보니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알지 못하면 삐끗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결국 공부하게 된 상황.
그래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아는 척은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도 이거 줄 수 있어? 효과 좋은데.”
“네가 원한다면. 그런데 오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차려입고 밤새 리허설을 한 거야?”
“아…”
이야기를 시작하는 제임스.
그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이유는 역시 그레이스 씨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 회사측도 그렇고 그쪽 회사도 그렇고 내가 자주 오가다 보니까 내가 책임지게 된 부분이 많거든.”
“음…”
“그중에는 PR부분도 있고 말이야.”
“그런 건 보통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아? 예를 들어 마케팅이라던지…”
“안타깝게도 내가 맡게 되었어. 내가 팀장 겸 프로젝트 진행자인데 나랑 같이 움직이기로 한 윌리가 연말 회계 문제로 잠시 빠졌거든.”
“저번에 샐리 씨 때처럼 네가 땜빵 하는 거네?”
둘째를 낳느라 육아 휴직을 내신 샐리 씨.
리자드인 그녀는 제임스의 직장 동료로 회사내 회계 담당 업무를 하셨다.
그 빈자리를 잠시 맡은 제임스.
경리 수준이지만 그래도 나름 일을 잘해서 그런지 회사에서는 제임스를 열심히 써먹고 있었다.
“후우…어쩔 수 없었어. 연말이 다가오니까 CRA에 보고 해야 하는 것도 있고…”
우리나라의 국세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Canada Revenue Agency.
줄여서 CRA에는 보통 내년 4 월까지 내야 한다는 부분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년 4 월이면 아직 멀었잖아.”
“이게 자세히 설명은 못 하지만 좀 규모가 있는 회사라 일찍 준비해야 해. 무엇보다 지원금 같은걸 시 정부에서 받은 것도 있어서 조금 복잡하거든.”
“아아…”
밴쿠버의 문화 지원 사업.
나도 얼핏 들은 거라 자세히 몰랐지만 제임스가 그쪽에서 일하고 있으니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잭 씨도 엄청 바쁠껄…”
타나야 씨와 라피 씨의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만난 잭 씨.
그때 제임스와 금세 친해진 것도 이런 부분이 겹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레이스 씨도 바쁜 거야?”
“그녀는 전혀 달라. 그레이스 씨는 감독이잖아. 나는 실무자이고 잭 씨는 혼자서 다 하셔야 하는 일이니까.”
“아 그렇구나.”
복잡한 예술의 세계.
그 이면에는 이런 실무자들이 뛰어다니는 거구나 처음 알게 되었다.
나도 개발자 출신이긴 하지만…
제임스와 같이 팀장 급은 아니어서 그냥 코드만 맞추고 있을 뿐이었기에 내막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니까 정신이 바짝 드네.”
“다행이네. 가는 길에 더 챙겨줄까?”
“그럼 좋지. 그리고 물 살짝만 넣어 주라. 맛있긴 한데 좀…”
“많이 드라이 하지?”
“응, 내가 솔직히 고급 입맛은 아니라서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네. 근데 드라이가 맞겠지 뭐.”
장난스럽게 말하는 제임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아침 준비를 얼추 끝낸 애슐리 씨.
그녀도 우리 대화에 끼어들고 싶으셨는지 내 옆으로 바짝 붙으셨다.
“베일리 씨는 잘 지내세요?”
“네, 물론이죠. 베일리는 요즘 새로운 파트너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잘 지내는 거 같아요.”
“새로운 파트너 분이라면…”
“신혼여행을 간 타나야 씨를 대신 하는 파트너 분이죠.”
타나야 씨와 라피 씨의 결혼식.
이후 둘은 멕시코 칸쿤으로 신혼여행을 떠나셨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멕시코의 대표적인 휴양지.
아무래도 가격도 미국과 캐나다 보다 저렴하고 카리브 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 인기가 좋았다.
“칸쿤…부럽다…”
“저도 나중에 허니랑 결혼하면 멕시코 쪽으로 생각 중이예요.”
“일단 결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내 말에 날 바라보는 제임스.
그러고는 나와 애슐리 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 빨리 결혼해야지 우리도 결혼하지.”
“그게 우리 탓이야?”
내 장난스러운 대꾸에 웃음으로 대신 대답하는 제임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통합 결혼식 할래?”
“응?”
“뭐 우리가 남도 아니고 같은 날에 같이 하면 좋잖아.”
괜찮은 제임스의 제안.
나는 그 제안에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전 좋아요. 같이하면 더 행복할 수 있잖아요.”
“애슐리 씨는 좋다는 데?”
“일단 나도 좋다고는 생각하는데…”
내가 말을 흐리자 고개를 끄덕이는 제임스.
그는 이해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냥 한 번 생각해 본 거야. 가족에게도 물어봐야 하니까.”
개인 대 개인의 결혼이라는 생각보다 가족의 결합이라는 생각이 강한 문화권에서 자란 나.
그렇다 보니 우리 부모님의 의사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제임스 역시 가족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 이 부분에 있어서 이해가 빨랐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네.”
“아직 8시도 안 됐는데?”
“미리 가서 준비하고 리허설 한 번 더 하려고. 잘해야지.”
책임감도 높고 능력도 좋은 제임스.
매번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 씨 여기요.”
그를 위해 준비한 커피.
애슐리 씨가 흐르지 않게 잘 포장해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애슐리 씨.”
“헤헤. 행운을 빌께요.”
미소로 화답하는 제임스.
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행운을 비는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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