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주말 영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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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본 건 신작 영화 웰즈 강의 죽음.
미스터리 수사 물의 대가로 알려진 유명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과거에는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절.
그래서 서양 국가의 사람들도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부호들만 즐길 수 있었던 크루즈 여행.
그 크루즈 위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이야기인데 당대 귀족 사회의 은밀한 치부까지 들춰서 그런지 막상 드라마의 원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럴 줄 알았어.”
영화 내용 중 한 남자가 사실 바람을 피웠다는 내용.
그 이야기에 메간 씨는 분노를 참지 못하며 손가락질을 하셨다.
“저 인간이 배신할 줄 알았다니까.”
“알고 있으니까 조금 조용히 해라 도마뱀아. 극장 매너도 모르냐.”
투덜대는 그레이스 씨.
그 모습을 본 메간 씨는 바로 입을 다 무셨다.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인 그레이스 씨.
그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걸 몇 번 경험한 메간 씨였다.
다시 말하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는 그레이스 씨.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여자를 조용히 하게 만들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그건 메간 씨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
처음에는 그레이스 씨에게 반항하던 메간 씨도 어느새 그레이스 씨의 훌륭한(?) 방법에 입을 다 무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 진행되는 영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마치 퍼즐처럼 모이기 시작하자 큰 그림이 보이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그때 오는 카타르시스.
이 맛에 범죄,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 이유라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긴 러닝 타임이 끝난 상황.
모두 기지개를 켜며 다음 영화를 볼 준비했다.
“혹시 음료나 팝콘 필요하신 분 계신가요?”
살짝 출출한 배.
긴 러닝 타임 동안 손에 소스가 찐득하게 묻는 나쵸 보다는 깔끔한 기본 팝콘을 선호했다.
그래서 팝콘을 만들려고 했는데 내 것만 만들기 뭐 하니 필요한 사람이 있나 물어보았다.
내가 물어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드는 세 명의 여인들.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메간 씨가 모두 날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카라멜 팝콘이요!”
“혹시 나쵸도 돼?”
“나는 버터 팝콘이 먹고 싶구나.”
각양각색의 요구 사항들.
애슐리 씨는 카라멜 팝콘.
그레이스 씨는 나쵸.
그리고 메간 씨는 버터 팝콘이었다.
모두다 만들기 쉬운 음식.
사실 만들기보다는 그냥 전자레인지를 돌리거나 팝콘 전용 옥수수에 버터를 끼얹거나 카라멜 시럽을 만들면 그만이었다.
“음료는요?”
“난 콜라.”
“저는 아이스티로 부탁해요.”
“음…나는 맥주가 마시고 싶구나.”
음료도 각양각색.
혹시나 몰라 챙겨 온 맥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도와주실 분 있으신가요?”
그러자 스리슬쩍 내려가는 손들.
역시 내 편은 없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래도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숨기지 않았다.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애슐리 씨.
영화에 집중하셔서 그런지 손이 따끈따끈한 느낌이었다.
“그럼 나는 다음 영화 준비할게.”
“그럼 나는 기지개를 펴고 있으마.”
“멍청한 도마뱀아. 눈치 좀 챙겨.”
그러면서 메간 씨를 구박하는 그레이스 씨.
평소의 여유로운 메간 씨가 이렇게 그레이스 씨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렇게 빠져나온 영화관.
아침에 메간 씨의 펜트 하우스에 왔는데 벌써 점심이 되어 하늘이 쨍쨍 했다.
“아무래도 간식도 만들고 저녁 준비도 미리 해 둬야겠어요.”
“저녁은 어느 걸로 하실거예요?”
귀를 쫑긋 세우며 궁금해하는 애슐리 씨.
그녀와 잘 어울리는 토끼 파자마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걸 먹고 싶으세요?”
“음…아무래도 팝콘이나 음료를 마시니까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간단한 저녁이라…그럼 롤은 어떠세요?”
“캘리포니아 롤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간단하게 먹기 좋은 롤.
서양에서는 스시로 취급되는 캘리포니아 롤이지만,
일본인 친구에게 이야기하면 노발대발하므로 금기 사항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태생의 미국식 일본 음식.
이 음식이 인기를 얻으면서 미국 공중파를 타고 퍼져나갔다.
그래서 밴쿠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캘리포니아 롤.
전통 초밥과 달리 롤 스시, 그러니까 우라마키를 미국화 시켰는데 그래서 그런지 들어가는 재료들이 일반 초밥에 쓰이는 재료들과 달랐다.
마요네즈, 크림 치즈, 아보카도, 게살, 오이 등등.
이런 것들이 들어가다 보니 만들기도 쉽고 맛도 좋았다.
“저는 아보카도 롤 좋아해요.”
“아보카도랑 날치알 그리고 참치 캔을 가져 왔으니 잘 만들어 볼게요.”
원래는 과카몰레를 만들어 나쵸칩 소스로 사용하려 했던 아보카도.
거기에 날치알과 참치 캔 그리고 게맛살은 원래 카나페를 만들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걸 이용해 롤을 만들 생각이다.
“그럼 밥을 미리 지어놔야겠네요.”
“메간 씨에게 밥솥 물어볼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혹시 쌀도 있으면 좋구요.”
없으면 빵 같은 걸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되니 상관은 없었다.
물론 롤은 아니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만드는 게 자취 요리다 보니 다양한 변형이 가능했다.
그렇게 영화관으로 돌아간 애슐리 씨.
나는 일단 주문받은 팝콘을 만들 생각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영화관에서 꽤 먼 주방.
우리 집과 달리 5 분이나 걸어야 나오는 주방에 혀를 내둘렀다.
저번에도 왔지만 정말 큰 메간 씨의 펜트 하우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져온 짐을 풀어둔 곳에 다가 갔다.
대형 창고 매장 표 팝콘용 옥수수.
미리 소금 처리가 되어서 일반 팝콘은 여기에 식용유만 부은 채 튀기면 되었다.
이후 카라멜 소스를 넣거나 버터를 붓거나 하는바리에이션을 통해 변형이 가능한 팝콘.
그래서 먼저 기본 팝콘을 만들기로 했다.
“저번에 썼는데도 어색하네…”
우리 집과 다른 구조의 화기.
이게 전기 인덕션인지 아니면 하이라이트 인덕션인지 구분이 안 갔다.
일단 프라이 팬을 올리고 열을 가하자 이 기기가 전기 인덕션인 걸 알게 되었다.
빠르게 열이 가해지는 프라이 팬.
그 위에 캐나다 특산물인 카놀라유를 양껏 두른 뒤 팝콘을 한 스쿱 부었다.
이미 소금 처리가 된 옥수수.
그렇다 보니 여기에 소금을 더 넣을 경우 엄청 짠맛이 느껴지니 그대로 튀겨 내야 했다.
프라이 팬 뚜껑을 덮고 기다리자 다가오는 메간 씨와 애슐리 씨.
메간 씨는 설명하기 어려우셨는지 직접 주방으로 오셨다.
공룡 파자마를 입으신 메간 씨.
그녀가 꼬리를 흔들며 오시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저녁으로 롤을 만든다고?”
“네, 혹시 밥솥이나 쌀이 있을까요? 밥솥이 없어도 쌀만 있으면 되는데.”
“라이스 쿡커는 있는데 괜찮겠느냐?”
“물론이죠.”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밥솥.
하지만 해외에서는 쌀이 주식이 아니다 보니 밥솥을 가진 집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다용도 목적으로 나온 라이스 쿠커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의 밥솥과 달리 조금 된 밥이 나오지만 그래도 롤을 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찬장에서 낑낑 대며 라이스 쿠커를 꺼내시는 메간 씨.
그 옆에 있는 조그마한 화이트 라이스라 적혀 있는 상자를 꺼내는 메간 씨.
뒤에 큼직하게 스시용이라 적혀 있는 거로 보아 상자 안에 쌀은 다행히 안 남미, 그러니까 동남아 쪽의 쌀이 아닌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먹는 그런 쌀이었다.
인도계와 베트남 계 이민자가 많은 밴쿠버.
그렇다 보니 스시용 쌀이 아니면 대부분 쌀이라고 하면 그쪽 쌀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거면 충분해요.”
“다행이구나.”
활짝 웃는 메간 씨.
나도 빵보다는 쌀이 땡기는 날이었기에 캘리포니아 롤을 만들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무슨 롤을 만들 거야?”
“음…아보카도랑 참치랑 날치알 그리고 게맛살을 가져 왔으니 캐터필러 롤이랑 볼케이노 롤 그리고 캘리포니아 롤이 가능하겠네요.”
“볼케이노? 혹시 리스라차 소스 가져 왔느냐? 우리 집에는 없는데.”
“리스라차 대신 바타스코 핫소스 쓰면 돼요.”
미국에서 흔히 사용되는 핫소스.
그런 영향을 받은 캐나다도 리스라차와 바타스코를 가지고 있는 집이 많았다.
리스라차가 없으면 바타스코가 있거나 바타스코가 없으면 리스라차가 있는 느낌.
다행히 메간 씨의 집에는 바타스코가 있었다.
“그럼 오늘은 존이 스시맨이 되는 거로구나?”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살짝 찌르는 메간 씨.
나는 날 너무 높게 쳐주는 메간 씨를 보며 부담감을 느꼈다.
“제가 오랜만에 만드는 거라 잘 만들지 모르겠네요. 하하…”
“존 씨가 만드는 거라면 다 맛있어요!”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응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새 만들어진 팝콘.
기본 베이스 팝콘을 많이 튀겨 두었으니 이제부터 바리에이션을 할 시간이었다.
여기에 카라멜 소스를 만들어 입히면 나오는 게 카라멜 팝콘.
그리고 버터를 녹인 뒤 그 녹인 버터로 튀겨내면 버터 팝콘.
마지막으로 그레이스 씨를 위한 나쵸 칩을 위해 조그마하게 과카몰레를 만들었다.
아보카도를 잘 썰어낸 다음 토마토, 라임, 적양파를 넣고 잘 섞으면 완성되는 과카몰레.
이왕 만드는 거 영화관 스타일로 만들 생각이라 여기에 소금과 후추 그리고 올리브 기름을 살짝 둘렀다.
이러면 아보카도 색이 쉽게 변질되지 않아 그 맛과 향을 오래 즐길 수 있었다.
“다 만들었어요.”
“음…과카몰레도 맛있구나.”
미리 만들어둔 과카몰레에 나쵸칩을 하나 찍어 드시고 계신 메간 씨.
그런 그녀를 따라 애슐리 씨도 야금야금 한 두 개를 찍어 드시고 계셨다.
“맛이 어때요?”
“정말 맛있어요!”
커지는 애슐리 씨의 눈.
그녀의 눈을 보아 대략 5 점 만점에 4.2 점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나름 잘 만들어진 과카몰레.
옆에 음료와 함께 놔두고 메간 씨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팝콘이랑 음료 그리고 나쵸 먼저 들고 가실래요? 저는 밥 안쳐 놓고 갈게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메간 씨와 애슐리 씨.
두 분은 양손에 잔뜩 음식과 음료를 들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롤 용 밥을 지어야 하는 상황.
평소에 짓는 밥과 다르게 고슬고슬하게 지어야 쌀알의 식감이 좋으니 물을 평소보다 줄여서 밥을 지었다.
너무 적게 부으면 밥이 익는 게 아니라 타버리니 물 조절이 중요했다.
그렇게 세 번 씻어내고 라이스 쿠커에 넣어 둔 밥.
타이머에 스시용이라 적힌 부분으로 타이머를 돌린 뒤 영화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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