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풍잎 카페-153화 (153/292)

〈 153화 〉 늦잠 (5)

* * *

살짝 묵직하게 느껴지는 어깨.

나는 잠결에 눈을 비비며 옆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애슐리 씨가 내게 기대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었다.

아직도 나오고 있는 영화.

우주 전쟁이 끝나고 링오브킹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다들 주무시나 보네…”

아무래도 영화 자체가 장편인 것도 문제가 있지만,

식후 카드 게임도 하고 그랬다 보니 모두 피곤한 모양이었다.

소파 밑에 앉아서 소파에 머리만 기댄 채 졸고 있는 메간 씨.

소파에 앉아서 새근대고 있는 그레이스 씨 까지.

모두가 이 긴 러닝 타임을 가진 영화를 모두 보지 못하고 뻗어 버렸다.

“끄응…차.”

조심스럽게 애슐리 씨를 안아 올린 나.

혹시라도 깰까 봐 조심스럽게 그녀를 우리 방으로 천천히 옮겼다.

내 품에 안긴 애슐리 씨.

너무나도 귀여운 표정에 잠시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우리 방에 안착할 수 있었다.

애슐리 씨를 침대 위에 올려 두고 추울까 얇은 담요를 덮어두고 나왔다.

이제 문제는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

두 분은 거실에 재울 수는 없으니 일단은 올리비아의 방에 옮기기로 했다.

“먼저 침대 커버랑 이불 커버를 조금 바꿔야겠네.”

매트릭스 커버를 바꾸고,

바로 이불 커버를 바꾼 상태.

물론 임시 방편이지만 보기에는 꽤 뽀송뽀송한 느낌을 주는 핑크색 커버들이었다.

그 옆 바닥에 자리를 따로 또 만든 상태.

이곳에는 미안 하지만 메간 씨가 주무셔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소파 보다는 폭신한 얇은 매트릭스를 깔아 두었으니 그녀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그레이스 씨.

그녀는 살짝 추운지 양손을 허벅지 사이에 넣고 졸고 계셨기에 그녀 먼저 옮겨야 했다.

“웃차…”

생각보다 가벼운 그레이스 씨.

물론 그녀와 관계를 했을 때, 그러니까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탔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가벼운 몸을 가지고 계셨다.

이 가녀린 몸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나오는 게 신기할 정도.

나는 물끄러미 내 품 안에 안긴 그레이스 씨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을 주무시고 계시니 정말 평온한 표정을 짓고 계신 그레이스 씨.

매일 다크 서클과 피곤함, 그리고 사회의 무언가에 대한 반항심을 그대로 드러내셨기에 이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영화 속 순수한 엘프 같은 느낌.

그녀가 종종 말하는 ‘숲속을 뛰어다니는 촌년’이라는 느낌을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지금의 사회에 완벽히 적응한 그녀가 잠들 때 그녀의 얼굴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아직 이렇게 평온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그레이스 씨.

여전히 추운지 그 위에 얇은 여름용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제야 풀어지는 그녀의 얼굴.

나는 안심하고 이제 메간 씨를 옮길 생각으로 돌아갔다.

“하암…다 옮겼느냐?”

“언제 일어 나셨어요?”

“네가 뒤척일 때부터 일어났단다.”

파자마를 입은 메간 씨.

그녀는 아직도 피곤한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내게 말을 건네고 계셨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방에서 주무시는 건 어떠세요?”

“나도 공주님 안기로 옮겨 주는 게냐?”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메간 씨.

나는 그녀의 말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정말 다 보셨네요.”

“후후…드래곤은 모든 걸 본단다.”

마치 자기 옆에 앉으라는 듯 바닥을 톡톡 치는 메간 씨.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영화는 어떠셨어요?”

“마우그스라는 용이 저렇게 불을 뿜어내는 건 고증 오류라는 것만 말하겠다.”

“하하…하.”

링오브킹의 프리퀄 작품인 난쟁이.

그 난쟁이 2 부에 속하는 작품속 주요 빌런은 스트레인지 닥터라는 히어로로 유명한 베네딕트 큐컴버비치 씨가 연기한 마우그스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목소리.

나는 그런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메간 씨는 진짜 용이시다 보니 바로 고증 오류라는 걸 언급하셨다.

“저렇게 심장 부근에서 화염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러면 입안에 화상이 생겨 고생 꽤 한단다.”

“아…”

어쩌다 보니 링오브킹의 고증 오류에 대한 설명을 듣는 시간.

하긴, 영화다 보니 실제와 다른 부분이 많았다.

영화 속 엘프는 정말 멋지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보여 주지만,

실상의 엘프는 숲을 벗어난 존재들이었기에 아름다운 외모만 있을 뿐 인간 보다 체력 부분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오크의 경우에도 저렇게 못생기지 않았고,

드워프도 저렇게 작고 항상 투덜대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사람의 환상으로 빚어낸 가상의 종족들.

하지만 그 종족들이 실제로 존재함을 사람들이 느꼈을 때 그 충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이게 내가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란다.”

“…네?”

“우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는 건 아니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메간 씨.

그녀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드래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거나 황금에 욕심이 많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니까.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재밌다고 느껴질 뿐이란다.”

“음…”

“물론 황금이나 반짝이는 건 좋아하는 건 맞지만…영화 속처럼 광적으로 집착하지는 않지.”

“그렇군요.”

다시 말하지만

드래곤 분들은 대부분 부자였고 그 부의 원천은 대부분 그들이 넘어오기 전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래 사는 종족.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유희 거리는 부의 축적과 매일 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희’라는 역할 놀이하는 것뿐.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황금이나 반짝이는 걸 모으는 습성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너도 그렇지 않느냐?”

“네?”

“저 영화 속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네 잇속만 챙기다 오거의 입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이 아니지.”

“그렇죠.”

영화는 영화 일 뿐.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영화라는 건 참 재미있구나.”

“저도 참 좋아해요. 제 취미 생활이기도 하니까요.”

“취미가 참 많구나.”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메간 씨.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슐리 씨를 만나기 전에 저는 정말 외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물론 메간 씨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외로움이란 감정이 명확하게 어떤 건지 말로 표현할 수는 있어요.”

“그래. 그러면 그 외로움이 너에게 있어서 무엇이더냐.”

흥미가 담긴 메간 씨의 질문.

나는 그 질문에 내 안에서 항상 생각해 왔던 외로움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사랑 받지 못한다는 기분이예요.”

“…”

“조금 아이러니한 말인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아시다시피 저는 사랑에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거든요.”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옛 연인.

그녀에 대한 마음이 한참 불타고 있을 때 그녀의 거절은 내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평생 내 곁에 있어 줄 거라는 순진무구한 생각.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내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깔려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나와 그녀는 헤어졌고,

나는 캐나다 행을 선택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

그러니까 이 나라에 사랑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있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이 나라가 날 밀어내고 있다는, 혹은 날 시험한다는 감정은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물론 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번에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나라에 내가 살려고 했었기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지금은 이 나라가 날 일부분으로 받아주었고,

주변 사람들도 나를 사랑해 준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가 애슐리 씨를 만났을 때는 아니었지만,

그녀로 인해 내 자신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게 느껴졌다.

나이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

혼자서 행동하는 걸 더 선호하는 일생활 등등.

나 자신을 스스로 묶어두고 있었던 것들이 그녀로 인해 하나씩 사라지거나 바뀌었다.

누군가 같이 산다는 것.

그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였고 전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라는 개념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메간 씨.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드래곤은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을 유희로 보내야 알아차리는데 존은 벌써 알고 있구나.”

“절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하하…하. 그리고 저도 이걸 알아차리는데 수십 년이 걸렸으니까요.”

외로움이라는 것에 대한 정체를 알고 난 뒤로부터 무섭지 않게 된 외로움.

그저 내 곁에 있는 또 다른 에고(Ego), 그러니까 자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집착하지 않았다.

“후후…”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춰 주시는 메간 씨.

그녀의 입맞춤은 내게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너의 외로움에 대한 생각과 내 외로움에 대한 생각이 완벽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즘 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순전히 너와 애슐리 덕분이란다.”

“저희의 사랑이 느껴지시나요?”

장난스러운 내 말투에 결국 웃음이 터져 버린 메간 씨.

그녀는 모두가 깰까 봐 크게 웃지는 못하셨지만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물론이란다. 완벽하게 느껴지지. 충분하다못해 넘칠 지경이란다.”

“다행이네요.”

“존은?”

“저는 애슐리 씨의 사랑만으로도 외로움을 버텨 낼 수 있는 존재인데… 과분하게도 메간 씨, 그레이스 씨 그리고 카페 손님들의 도움으로 사랑이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아요.”

“하긴 내 사랑이 워낙 크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자랑인 가슴을 가리키는 메간 씨.

나는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화염 주머니라 하시지 않으셨나요?”

“사랑이 담긴 화염이지.”

“확실히 영화의 고증 오류가 이해가 되네요. 저 사악해 보이는 악룡이 사랑이 담긴 화염을 쏘아내지 않을 테니까요.”

“푸하하하.”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는 메간 씨.

그녀는 내 농담이 마음에 드셨는지 날 바라보며 웃음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렇게 이어진 메간 씨와 나의 소소한 이야기들.

드래곤과 인간이라는 종에 묶인 대화가 아닌 그저 사람 대 사람의 소소한 이야기 들이 이어져 나갔다.

직장 이야기.

연예인에 대한 가십.

최근 캐나다 내 문제에 대한 이야기 등.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메간 씨는 피곤하신지 길게 하품을 하셨다.

“이제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예요.”

“그러면 그 어린이를 안아서 옮겨 주겠느냐?”

“음…해볼게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품에 안았다.

메간 씨의 강화 마법 덕분인지 생각보다 가뿐하게 들어 올려진 메간 씨.

나는 그녀를 안아 올려 조심스럽게 그레이스 씨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미리 깔아둔 매트릭스와 담요 위에 조심스럽게 메간 씨를 내린 상태.

이후 그녀의 목 근처까지 이불을 덮어 드렸다.

“공주님 안기라…꽤 마음에 드는 구나.”

살짝 웃으며 미소를 짓는 메간 씨.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꿈 꾸세요. 메간 씨.”

“너도 좋은 꿈 꾸거라 존.”

그렇게 문을 닫고 나온 거실.

나는 아침 해가 곧 뜰 거 같은 느낌이 들어 잘까 말까 고민에 빠졌다.

일요일을 가리키는 핸드폰 캘린더.

나는 애슐리 씨가 있는 방으로 가 오랜만에 늦잠을 잘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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