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늦잠 (3)
* * *
우리 집에서 가장 나른한 시간인 오후 3 시.
보통 이 시간이면 나와 애슐리 씨는 우리가 사랑하는 소파에 앉아 새로운 영화를 보곤 했다.
맛있는 카라멜 팝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시간.
하지만 오늘은 그레이스 씨와 메간 씨가 있다 보니 여유로운 시간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긴 점심시간이 지난 뒤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
이 활기를 우리는 보드 게임으로 이어 나갔다.
“으음…”
“음…”
“흐음…”
“흠…”
서로 말없이 자기 카드만 보는 상황.
참 묘하게도 한 명이 독주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타오르던 식탁 위가 잠잠했다.
“일부러 모으는 거지?”
그레이스 씨의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모양이 안 모이는 걸요.”
“아까 그렇게 속이더니 이번에도 속을 거 같아?”
다시 속지 않겠다면서 검지 손가락을 흔드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날 바라보았다.
“엘프의 손이 얼마나 빠른지 알지?”
“…”
게임하면서도 매콤한 말들을 쏟아 내시는 그레이스 씨.
전 판에는 내가 이 보드 게임을 설명하는 일종의 마스터 역할이라 이기긴 했지만…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하셨다.
마찬가지로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는 메간 씨.
그녀는 레드 드래곤 답게 승부, 혹은 게임이라는 단어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었다.
그저 카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든 이기겠다는 그녀의 감정을 바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눈빛.
나는 그녀의 눈빛에 타 버릴 거 같아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긴 거 같아요.”
“…네?”
갑작스러운 애슐리 씨의 말씀.
그 말에 그녀는 손에 남은 마지막 카드를 쌓여져 있는 카드 위에 올려 두었다.
“다들 원 카드라 말하고 싶으시겠지만 늦은 거 아시죠?”
애슐리 씨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 승리를 만끽하고 계셨다.
벙찐 표정을 짓는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
그 모습에 애슐리 씨는 승리의 브이를 하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꼴찌가 설거지 하는 거 잊지 마세요. 헤헤.”
“아 맞다.”
“집중해야겠구나.”
다시 말하지만
붉은 용의 수장이신 메간 씨.
그리고 유명한 영화 감독이신 그레이스 씨.
두 분이 그저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벌칙을 피하고자 이렇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게 너무나도 웃긴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웃고 만 있으면 안될 텐데.”
살짝 미소 짓는 메간 씨.
그 모습에 그레이스 씨가 원 카드를 외치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워…”
“늦었어. 귀쟁이.”
심지어 스페이드라는 거대한 무언가를 놓고 사라지신 메간 씨.
그녀는 후련하다는 듯 나와 그레이스 씨를 바라보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그레이스 씨.
이제 나와 그녀만 남은 상황이었다.
“도마뱀한테도 지다니…”
절망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 그레이스 씨.
그러자 메간 씨는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레이스 씨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느 세월에 게임이 끝나려나 모르겠구나. 귀쟁이.”
결국, 나와 그레이스 씨만 남은 상황.
나는 여유로움을 걷어내고 게임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연습 게임 한 번만으로 이렇게 빠르게 게임을 적응할 줄은 몰랐기에 가지고 있었던 여유.
하지만 이대로 라면 내가 저 많은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손님에게 설거지 시킬 생각은 아니지?”
“게임에서는 손님 같은 거 없습니다.”
“칫…”
혀를 차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손은 계속 다음 카드를 찾고 있었다.
치밀한 눈치 싸움.
성급하게 콤보를 만들어 한 장만 남으면,
원 카드에 당해 결국 제자리 걸음이 될 게 분명했다.
거기다 당장에 저 위에 올라간 스페이드를 치우는 것도 관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손에는 이걸 치울 카드가 없다 보니 손에는 세 장의 추가 카드가 더 들어왔다.
다시 멀어져 버린 승리.
성급하게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트럼프 카드가 쌓여 있는 식탁은 긴장감이 흘렀다.
이걸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메간 씨와 애슐리 씨.
현재 우리가 하는 게임은 마트나 달라이라마라는 1 달러 샵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트럼프 카드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원 카드 게임이었다.
룰도 쉽고 금방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
그렇다 보니 승자 들은 남은 사람들의 바동거림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그 역할을 지금은 내가 아닌 애슐리 씨와 메간 씨가 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가 이겼어. 존.”
“절 속일 생각하지 마세요.”
“과연 그럴까?”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에 나는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모으고 있는 카드는 하트.
이제 하트만 더 모으면…
“막을 거 있나?”
“…”
숨겨 왔던 조커 카드를 꺼내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행동에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없으면 카드를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점점 늘어나는 내 카드.
결국 그레이스 씨의 승리로 설거지는 내 몫이 되어 버렸다.
“결국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지.”
웃음을 짓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카드 게임에서 승리한 게 꽤 즐거운 경험이었는지 환하게 웃고 계셨다.
그것과 별개로 벌칙은 벌칙.
나는 몸을 일으켜 싱크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에 다가 갔다.
“존이 설거지 하는 동안 우리는 좀 쉬어 볼까?”
“좋아요.”
“좋은 생각이지.”
이럴 때는 또 죽이 잘 맞는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
여기에 애슐리 씨도 합세하니 세 명의 여성 분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셨다.
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메간 씨.
나는 그녀들의 대화에 끼지 못했지만 어깨너머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카드 게임은 처음으로 해보는데 신기하네.”
“카드 게임이 처음이세요?”
애슐리 씨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물론 메간 씨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레이스 씨의 말에 동조를 하셨다.
“나도 카드 게임은 처음이구나.”
“저도 처음이예요.”
어떻게 하다 보니 세 분다 카드 게임은 처음인 상황.
그것도 그럴 것이 학생들이 할 법한 원 카드 게임을 이 종족인 그녀들이 경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원한다면 배웠겠지만,
각자 사정이 있었던 상황.
그나마 상황이 제일 나았던 메간 씨도 처음인 것을 보면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애슐리 씨에게 카드 게임을 알려 준 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존.”
“네?”
“이 카드는 왜 있는 거야?”
그레이스 씨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보니 눈에 보이는 블랭크 카드.
나는 오랜만에 아무런 문양도 없는 블랭크 카드를 보며 추억에 빠지게 되었다.
“아, 그건 마술용 카드예요.”
“마술? 마술도 해?”
“네. 봉사활동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죠.”
물론 봉사활동 중에 마술을 하는 일은 전혀 없지만,
애슐리 씨를 만나기 전 혼자 살고 있었을 때 늘려가던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생각보다 잘 된 마술 동영상들.
그래서 나중에 써먹을 생각으로 한 두 개 씩 배우다 보니 어느새 취미가 되어 버렸다.
“보여 줄 수 있어?”
흥미를 보이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제안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설거지 거리를 가리켰다.
“이거 끝내고 보여드릴게요.”
그렇게 끝난 설거지.
내가 설거지를 끝내고 식탁으로 돌아오자마자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애슐리 씨는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셨다.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의 그녀들의 반응.
내가 할 줄 아는 트릭은 기초적인 트릭에 불과해 부담감이 느껴졌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그냥 마술이예요.”
“알고 있어.”
“메간 씨가 부리는 마법처럼 뿅 하고 사라지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예요. 하하…하.”
그저 눈 속임에 불과한 카드 마술.
그런 마술을 진짜 마법을 부리는 메간 씨 앞에 보이려고 하니 여간 어색할 수 없었다.
“일단 보여주기나 하거라.”
나를 재촉하는 메간 씨.
심지어 애슐리 씨도 눈을 크게 뜨고 내게 집중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시작 해야만 했다.
“일단 간단한 마술부터 할게요.”
“오…”
내 손에서 뒤섞이는 카드.
사실 카드 셔플이라는 기술인데 진짜로 섞이는 게 아니라 그저 섞는 척만 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맨눈으로 보기에는 섞인 듯한 착각을 주는 셔플.
나는 이어서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제가 카드를 이렇게 내릴 건데요. 여기서 스탑을 외쳐주시면 돼요.”
“알겠어요.”
일종의 무작위 카드를 골랐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상황.
하지만 실제로는 새끼손가락으로 걸쳐 내가 선택한 카드를 고르게 만드는 트릭이었다.
“음…”
“너무 빨랐나요? 다시 한번 천천히 내릴게요.”
그렇게 다시 움직이는 카드들.
그때 애슐리 씨는 스탑을 외치셨다.
“스탑!”
“자. 이게 애슐리 씨가 고른 카드예요. 보셨다시피 전 볼 수 없어요.”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메간 씨만 볼 수 있는 카드.
나는 마술을 이어 나갔다.
“저는 이 카드를 몰라요. 그래서 일단은 이 카드를 여기에 둘게요.”
식탁 위에 올라간 카드.
이어서 나는 아까와 똑같은 트릭을 재사용 했다.
“이번에는 그레이스 씨가 스탑을 외쳐보시겠어요?”
“좋아.”
“왜 나에게는 시켜 주지 않는 게냐?”
불만을 토로하는 메간 씨.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술사가 마법을 부리는 분에게 요청하는 건 무섭거든요. 하하…하.”
“뭐 그렇다면야…”
물론 이것마저 트릭.
나는 웃으며 그레이스 씨가 멈추라는 말을 기다렸다.
“멈춰!”
“네, 이번 카드도 확인해 볼게요.”
그렇게 모두에게 보여 준 카드.
나는 모두가 카드를 확인한 것을 보고는 이 카드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자 이제 제가 이 두 카드에 마술을 부릴 거예요.”
“어떤 마술이죠?”
흥미를 보이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반응에 미소를 보였다.
“먼저 선택한 카드를 그대로 뜯어 와서 이 카드에 옮겨 줄 거예요.”
“네?”
당황해하는 애슐리 씨.
나는 오랜만에 하는 마술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격한 반응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이 카드가 뭐였죠?”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애슐리 씨.
너무나도 귀엽게 그녀는 이 카드를 내게 말해도 되나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아요. 말씀하셔도 돼요.”
“스페이드 킹 이었어요.”
“그러면…스페이드 킹을 이렇게 떼서…이쪽으로 옮겨 둘게요.”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연기를 해서 옮기는 척을 하는 상황.
이걸 유심히 보고 있는 메간 씨와 그레이스 씨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러면 여기 카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음…스페이드 킹이 아닐까요?”
“이 카드가 원래 어떤 카드였죠?”
“하트 퀸이었어.”
그레이스 씨가 선택한 카드.
그렇다 보니 그녀는 확실하게 그 카드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이 카드는 하트 퀸과…”
뒤집은 카드.
그 카드 안에는 하트 퀸이 반, 그리고 스페이드 퀸이 반이 들어간 카드로 바뀌어 있었다.
놀라워 하는 그레이스 씨와 애슐리 씨.
심지어 옆에서 바라보던 메간 씨도 놀라워 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아직 놀라시면 일러요.”
나는 모두를 집중시킨 뒤 남은 카드를 가리켰다.
“이 카드가 스페이드 킹이었죠?”
“맞아요.”
놀라움을 담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이 카드에서 스페이드 킹 카드를 빼내서 옮겼으니 이 카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아!”
드러나는 카드.
그 카드는 설거지 할 당시 그레이스 씨가 찾았던 블랭크 카드.
그러니까 앞면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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