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그레이스 (3)
* * *
그레이스 씨와의 즐거운(?) 대화가 끝나고 슬슬 정리를 하려 했다.
바빴던 점심시간.
하지만 일에 완전히 능숙해진 애슐리 씨 덕분에 올리비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요. 애슐리 씨.”
“헤헤…고마워요. 존 씨.”
살짝 미소를 짓는 애슐리 씨.
나는 정말 그녀를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 순간 그렇게 생각하지만
갑작스레 한 사람이 줄어든 상태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는 애슐리 씨는 정말 대단했다.
“오늘 애슐리 씨에게 정말 고마워서 그런데 혹시 끝나고 랍슨 스트리트 갈래요?”
“데이트 신청인가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데이트 겸 그녀에게 가을 옷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늦여름인 밴쿠버.
슬슬 가을 준비해야 했다.
물론 한국과 마찬가지로 밴쿠버의 가을은 짧은 편이지만,
그런데도 가을이면 아름답게 나무를 수놓는 단풍들을 보면 가을을 준비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는 살짝 쌀쌀하고 저녁에는 선선한 밴쿠버의 가을.
이럴 때 감기 걸리기 쉬우니 간단한 코트나 외투가 필수였다.
“존 씨랑 데이트해야 하니까 빨리 마감 정리해야겠어요.”
“저도 빨리 끝낼게요.”
그렇게 빠르게 끝낸 뒷정리.
애슐리 씨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깨끗해진 카페 안을 둘러 보셨다.
허리에 손을 올린 애슐리 씨가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그녀의 뒤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버렸다.
말없이 내 허그를 받아 주시는 애슐리 씨.
그녀는 자기 몸을 감싼 내 팔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셨다.
“모처럼 일찍 끝냈는데 이러면 늦어질 거예요.”
“그래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니까요.”
내 말에 미소를 짓는 그녀.
애슐리 씨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볼에 입을 맞추셨다.
“자, 이제 데이트 하러 가요. 나머지는 저녁에 하구요.”
배시시 웃는 애슐리 씨의 표정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어리광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걸어 가실거죠?”
애슐리 씨의 질문.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퇴근 시간이다 보니 차가 엄청 막힐 거예요. 걸어가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저도 걷는 걸 좋아하니까요.”
스탠리 파크도 그렇고 등산도 그렇고 야외 활동, 그러니까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시는 애슐리 씨.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차량을 탑승하는 것보다는 걸어서 다니는 걸 더 선호하셨다.
“옷은 올라가서 갈아입을까요?”
“예비로 가져다 둔 옷이 있어요.”
혹시나 몰라 가져다 둔 옷.
간단한 트레이닝 팬츠와 상의를 카페 안쪽 창고에 비치해 두었다.
마찬가지로 애슐리 씨의 옷도 준비해 둔 상태.
그녀가 좋아하는 레깅스와 티셔츠 그리고 운동화를 준비해 뒀다.
“준비성이 좋으신데요?”
“애슐리 씨랑 데이트를 더 하고 싶으니까요.”
내 말에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는 애슐리 씨.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입을 맞추어 주셨다.
“그럼 준비하고 나올게요.”
“네, 천천히 하고 나오세요. 저도 갈아입고 나올게요.”
여자 화장실 쪽으로 들어가신 애슐리 씨.
나는 혹시 몰라 가게 문을 잠그고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마무리 정리할 때 말끔히 청소한 남자 화장실.
내 자부심 중 하나인 화장실 청소로 반짝 거리는 타일을 보니 나도 모르게 뿌듯해졌다.
그렇게 땀에 젖은 유니폼을 벗고 갈아입는데 눈에 들어온몸.
몸에 살짝 잔근육이 생긴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최근 애슐리 씨와 했었던 많은 야외 활동들.
특히 2 주전 등산도 그렇고…
이리저리 많이 짜여지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지만 침대에서는 야생성을 숨기지 않는 애슐리 씨.
물론 메간 씨 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토끼 수인이었기에 사람의 관계보다는 조금 과격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격한 관계 속에서 단련된 내 몸이 점점 변화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고 옷을 다 갈아입은 나.
옷을 갈아입고 나온 뒤 카페 내 전등을 모두 확인했다.
“조금 걸렸죠?”
여자 화장실에서 나온 애슐리 씨.
나는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저도 방금 나왔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카페 전등이 그냥 꺼지지는 않는다구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애슐리 씨.
나는 미안하다는 듯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러면 가 볼까요?”
“좋아요.”
내가 건넨 손을 맞잡은 애슐리 씨.
그녀와 함께 오늘도 카페를 잘 마무리했다.
* * *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그러게요. 아무런 소식을 듣지는 못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는 모르겠네요.”
북적이는 랍슨 스트리트.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인파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이 주변에 꽤 많이 보였다.
“아이돌이라도 왔나…”
지극히 한국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지금, 이 비이상적으로 많은 인파를 설명하기에는 이것만 한 게 없었다.
출퇴근 길과 맞물린 인파.
이로 인해 꽉 막혀 버린 거리 때문에 주변에는 실례한다는 말이 계속 들려왔다.
“아무래도 저희도 실례 좀 해야겠는데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내 몸에 가깝게 당긴 뒤 수많은 인파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우…다행이 저 매장 근처만 사람이 많네요.”
옷 가게와 잡화점 그리고 서점이 밀집해 있는 랍슨 거리.
그렇다 보니 유명한 브랜드 가게가 몇 개 있었는데 그 가게 중 스포츠 브랜드로 유명한 가게 앞만 북적였다.
유명인이나 인플루언서가 브랜드 홍보를 위해 방문한 모양.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서 겨우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TTS…?”
“아는 그룹이에요?”
애슐리 씨의 질문.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던 보이 그룹이에요. 그 이 종족과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 기억나세요?”
내 말에 기억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애슐리 씨.
그러고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키셨다.
“TTS는 알겠는데 처음 보는 글자도 많네요.”
애슐리 씨가 가리킨 곳에 있는 글자.
나는 그걸 보고 바로 한국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저게 한국어예요.”
“그렇군요. 신기해요.”
사실 눈으로 직접 한국어를 본 건 처음인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 주었다.
“사랑해요. 승범. 이라고 적혀 있네요.”
“승범이요?”
“네, 사람 이름인데 아무래도 그룹 멤버 중 한 명인 한국계 미국인 분이 오신 모양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미국보다 물가가 저렴한 캐나다.
그렇다 보니 영화는 물론 광고도 종종 캐나다에서 대신 찍곤 했다.
“이런 건 처음 봐서 신기해요.”
“저도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가려고 했었던 리퍼블릭 파인애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
가프와 같은 그룹 소속 브랜드인데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이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되었다.
13 년 전에 그 브랜드에서 샀었던 갈색 코트.
얼마나 튼튼한지 어디 하나 헤진 곳 없이 지금까지 입고 있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예요. 한 번 같이 둘러 볼래요?”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와 함께 여성 코너로 향했다.
유행에 민감한 옷 가게다 보니 벌써 가을 시즌 옷들이 가득한 이곳.
나는 그곳에서 정말 귀여운 옷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애슐리 씨. 이거 봐요.”
“와. 엄청 귀여워요.”
눈을 크게 뜨며 좋아하는 애슐리 씨.
우리가 발견한 귀여운 옷은 다름 아닌 목 폴라 스웨터였다.
가을과 겨울에 입기 좋은 옷.
일반적인 목 폴라 스웨터와 달리 스웨터에는 귀여운 당근 모양 패턴이 박혀 있었다.
살짝 오버스럽지만 정말 귀여운 스웨터.
그 옆으로 살짝 촌스러워 보이는 초록색 스웨터와 방울 달린 모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어글리 스웨터 파티용인가 보네요.”
“어글리 스웨터 파티요?”
“네. 저도 초대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나름 캐나다랑 미국에서는 유명한 파티로 알고 있어요.”
보통 크리스마스나 추수 감사절 쯤에 하는 파티.
원래는 일종의 사교 모임 같은 느낌의 파티였는데 각종 브랜드나 광고 쪽에서 언급을 자주 하다 보니 꽤 규모 있는 파티가 되었다.
원래는 못생긴 스웨터.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 흔히 받은 못생긴 스웨터를 입고 하는 일종의 친목 파티였다.
보통은 사서 입지 않고 할머니 같은 연령대가 있으신 분들이 선물용으로 직접 만드는 스웨터.
그렇다 보니 시대에 맞지 않는 촌스러움이 있었고 이 스웨터가 어느새 이런 파티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캐나다에는 정말 신기한 파티가 많네요.”
“워낙 사람들이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니까요.”
파티를 정말 좋아하는 캐나다 사람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간단한 음식을 들고 와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를 즐기는 게 이들의 삶이었다.
물론 요즘은 젊은 친구들이 미디어나 미국의 영향을 받아 과격한 파티를 즐기지만,
전통적인(?) 캐나다 식 파티는 그저 대화를 나누고 사교 활동을 즐기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건 평소에도 입고 다닐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 당근 패턴이 너무 귀엽고 무엇보다 애슐리 씨랑 잘 어울리니까요.”
“제가 토끼 수인이라서 그런가요?”
장난스럽게 되묻는 애슐리 씨.
나는 양손을 들고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절 인종 차별자로 몰아가지 말아 주실래요?”
“헤헤. 장난이에요.”
내게 장난을 즐겨 하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애슐리 씨의 피부 톤과 잘 어울려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애슐리 씨.
그러니까 쿨 톤에 가까운 애슐리 씨는 자연스럽게 하얀색이나 베이지 색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셨다.
물론 검은색도 정말 잘 어울리지만,
스웨터의 경우 검은 스웨터 보다는 흰 스웨터가 더 따듯해 보여서 이 스웨터를 추천했다.
“코트에 같이 입으면 잘 어울릴 거예요. 코트랑 이건 제가 사드릴게요.”
“아니에요. 저도 월급 받으니까 돈 있어요.”
괜찮다면서 사양하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을 표했다.
“치잇…그럼 대신 존 씨의 옷은 제가 살 거예요.”
“제꺼요?”
“네. 제 옷만 사는 건 공평하지 않으니까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헤헤…항상 고마워요. 존 씨.”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애슐리 씨.
나도 그녀에게 고마움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