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죄와 벌 (4)
* * *
평화로운 수요일.
오늘은 헤일리 씨가 카페 일을 배우는 날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말처럼 이번 주 수요일에 여유가 생긴 헤일리 씨.
그녀는 내게 연락을 주었고 덕분에 오늘 아침부터 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마워요. 헤일리 씨.”
“아니에요. 오히려 배려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살짝 웃는 헤일리 씨.
그녀의 이전 일이 잘해결되었는지 조금 편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전에 했던 파트 타임 일이 잘해결됐나요?”
“그렇게 티가 났나요? 헤헤…네, 잘 됐어요. 인수인계도 다 잘 끝냈구요.”
살짝 웃는 그녀.
인수인계 건으로 스트레스받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카페 일을 배워볼 시간이네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 씨.
나는 먼저 손을 들어 카페 문을 열 준비하는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를 불렀다.
“이미 서로를 알고 계시겠지만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 씨.
그녀는 올리비아와 애슐리 씨 앞에 섰다.
“앞으로 파트 타임으로 일하실 헤일리 씨에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릴게요.”
소규모 사업장이지만 필요한 행동.
헤일리 씨와 올리비아 그리고 애슐리 씨는 모두 서로를 알고 있는 사이지만,
카페라는 일터에서의 서로 간의 배려는 중요했기에 이런 형식적인 행동이라도 꼭 해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헤일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파트 타임 경험이 있다 보니 이해가 빠르신 헤일리 씨.
그녀는 모두 앞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박수를 쳐주는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
둘은 새로운 파트 타이머인 헤일리 씨를 환영해 주었다.
“헤일리 씨는 앞으로 올리비아의 일을 배우게 될 거에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
아무래도 그녀가 곧 성인이 되고 카페를 떠나게 되는 이유로 헤일리 씨를 고용한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카페 전반에 대한 교육은 제가 진행할 예정이고 커피를 내리는 건 애슐리 씨 그리고 청소는 올리비아가 알려 줄 거에요.”
대략적인 커리큘럼.
간단한 카페 파트 타임 잡이지만 우리 카페가 조금 특별한 면이 있다 보니 이런 교육이 필요했다.
다시 말하지만 일반 프렌차이즈 카페보다 살짝 복잡한 구조의 카페.
이걸 다 기억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정도는 알려 주어야 했다.
“애슐리 씨.”
“네?”
내 부름에 날 바라보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며 말했다.
“오늘 올리비아랑 같이 오전이랑 오후 맡아 주실수 있나요?”
“물론이죠.”
교육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
물론, 중간중간에 교육 차원에서 헤일리 씨와 함께 음료를 만들거나 고객 응대하겠지만,
교육 중이다 보니 담당을 정해 두어야 했다.
사실상 부사장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애슐리 씨.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전과 오후 업무를 부탁했다.
이제부터 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
예전에 애슐리 씨를 교육 시켰던 것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재료가 있는 곳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카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건조 창고.
그 안에는 밀봉 포장된 다양한 종류의 원두가 쌓여 있었다.
“여기가 원두 창고에요.”
코를 킁킁대는 헤일리 씨.
그녀는 원두 냄새가 좋으신 모양인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냄새가 좋은데요?”
“앞으로 자주 오시게 될 거에요.”
우리 카페가 식사도 준비하고 다양한 음료도 만들곤 하지만 엄연히 카페였다.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커피.
그 커피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원두가 쌓인 이곳은 우리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다음은 카운터 안에 냉장고에요.”
오픈형 주방 형태의 카페.
그렇다 보니 커다란 냉장고도 카운터 바에 앉으면 볼 수 있었다.
“이 냉장고 잘 알고 있어요.”
카페 단골인 헤일리 씨.
그렇다 보니 이 냉장고를 많이 보셔서 그런지 알고 계셨다.
“이쪽에는 유제품이랑 각종 신선 재료들이 보관되어 있어요.”
내가 냉장고를 열자 안을 살펴보는 헤일리 씨.
그녀는 궁금증이 있는지 검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른쪽 왼쪽 따로 나누어진 이유가 뭐에요?”
거대한 냉장고를 정확하게 반으로 가르는 빨간선.
그 선에 대해 헤일리 씨가 궁금증을 가졌다.
“왼쪽이 베지터리안, 비건 음료 재료가 있고 오른쪽이 일반 고객을 위한 재료가 있는 곳이에요.”
“아 그렇군요. 혹시 카페에 비건이나 베지터리안 손님이 많이 오시나요?”
“네, 아무래도 이 종족 손님들이 많다 보니 비건이나 베지터리안 음료를 찾으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 씨.
나는 이어서 그녀와 함께 카페 내부를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 * *
“배워야 할 게 많네요.”
살짝 지쳐 보이는 헤일리 씨의 표정.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에요. 빠르게 적응해야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죠. 그리고 제 자신도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그녀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쓰레기 처리 장소가 이렇게 따로 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지금 나와 헤일리 씨가 있는 곳은 카페 옆 쓰레기장.
원래는 대로변에 쓰레기 수거함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밤에 덤프스터 다이빙(Dumpster diving)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따로 분리해 두었다.
홈리스 피플, 즉 노숙자 분들이 많은 밴쿠버.
그렇다 보니 필요한 것을 직접 구하는 노숙자 분들은 종종 쓰레기통에 들어가 물건을 헤집고 주변을 더럽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걸 덤프스터 다이빙이라 불렀다.
물론 이 분들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카페 옆 도로를 더럽히고 그로 인해 차량이 통과를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
“야간에 노숙자 분들이 많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 씨.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흡연을 하신다면 이곳을 이용하시면 돼요.”
“흡연은 따로 하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존 씨도 안 하시죠?”
“네, 저도 담배는 피지 않아요.”
비싼 캐나다 내 담배 가격에도 불구하고 생각 보다 많은 흡연자들.
한국에서는 5000 원 정도의 가격대라 들었는데 캐나다의 경우 평균 12000 원이 넘어갔다.
한국 보다 배가 비싼 캐나다의 담배 값.
술도 그렇고 담배도 그렇고 대부분의 것들이 한국보다 비쌌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 씨.
쓰레기통 근처에서 쉬는 게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금 카페 내부는 조금 바쁘다 보니 그녀가 혹시 쉬는데 방해 받을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헤일리 씨.
나는 그 모습이 의아해 그녀에게 물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냥 애슐리 씨가 부럽다 생각이 들어서요.”
“…네?”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음…이곳에 오니까 더 확실하게 느껴져서요.”
“어떤게…?”
“제가 서큐버스인 건 아시죠?”
그러자 불현듯 느껴지는 무언가.
나는 애슐리 씨와 관계에서 사용한 콘돔들도 이곳에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이를 갖기에는 어려운 나와 애슐리 씨.
물론, 동거 중이었기에 사실상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둘 다 부모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피임 기구를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피임기구 사용량.
메간 씨의 마법 덕분인지 아니면 애슐리 씨의 왕성한 성욕 덕분인지 2 주 마다 콘돔 한 박스를 사용하는 기록적인 일들이 이어져 왔다.
“어…음…”
“괜찮아요. 제게 느껴 질 정도로 애슐리 씨가 사랑 받고 있구나 생각이 드니까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살짝 웃는 그녀.
나는 머쓱해서 다른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일리 씨는…”
“저요? 저는 음…”
잠시 고민에 빠지는 그녀.
헤일리 씨는 입을 달싹이면서 고민하시더니 날 보고는 무언가를 결심하신 듯 말을 시작하셨다.
“저는…솔직히 서큐버스의 일을 다시 하지 못하겠어요.”
“…네?”
“그러니까…꿈에서 다른 사람의 정기를 얻는 그런 것들을 말해요.”
메간 씨는 물론 어제 그레이스 씨와 제임스의 입으로도 들은 이야기.
나는 이걸 언급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좋지 못한 기억이 있거든요.”
“그러니까…몽마 일하다가 말씀이신가요?”
“네, 맞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리 씨.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질문을 한 거 같네요.”
“괜찮아요. 그리고…존 씨니까 말할 수 있는 거에요.”
“네?”
“제 과거에 대해서 말이에요.”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
나는 헤일리 씨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 영문을 몰랐다.
“지금 제 주위로 얼마나 많은 서큐버스의 체취가 풍기고 있는지 모르시죠?”
“…”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체취.
예전에 그녀가 말한 것처럼 서큐버스는 이런 체취를 이용해 이성을 유혹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 체취를 맡으면 이성, 그니까 남자들은 모두 흥분해 이성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그때 향수 같은걸로 가린다고 하셨죠?”
“맞아요. 그런데…존 씨는 지금 평소와 같으시니까…그러니까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거에요.”
조금 이해할 수 있는 그녀의 말.
예전에 그녀가 언급한 적이 있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만 통하지 않는 그녀의 체취.
이것이 뜻하는바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나를 신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는 이 체취 때문에…사람을 …살인한 적이 있어요.”
“…네?”
“정확하게 살인은 아니지만…그가 자살하는 걸 막을 수 없었죠.”
침울해지는 그녀의 얼굴.
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게…헤일리 씨가 몽마 일하지 않는 이유인가요?”
“맞아요. 그리고…그게 제가 철학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해요.”
철학과 학생인 그녀.
대학교 교수가 되길 원하는 헤일리 씨.
그런 그녀가 왜 철학이란 과목을 선택 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수 있나요?”
“물론이죠.”
쓰레기 장에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무거운 이야기.
하지만 나는 그녀의 요청에 거리낌 없이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건…제 죄에 대한 이야기에요.”
그녀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시작은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