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스칼렛 (1)
* * *
차를 탄 네 명의 일행들.
이 중 올리비아와 그레이스 씨가 내 차를 보고 놀라워 했다.
“옛날 차량이네요.”
“그러게…”
메간 씨처럼 오래된 유물을 바라보는 듯한 그녀들의 대화.
나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할아버지와의 인연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너에게 있어서는 은인이시네.”
“맞아요.”
할아버지와의 추억.
그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
“좋은 인간들이 많네.”
그레이스 씨의 덤덤한 말투.
그녀는 시위 전 냉소적인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가 가려는 곳이 코퀴틀람인 거지?”
“네, 맞아요.”
메트로 밴쿠버에 속하는지역.
흔히 말하는 3 zone에 속해 있는 장소였다.
다시 말하지만
정확하게 밴쿠버는 다운타운을 포함한 1 존을 지칭했다.
2 존에 해당하는 서리와 메트로타운.
그리고 3 존 에 해당하는 코퀴틀람까지가 메트로 밴쿠버 행정구역이었다.
“코퀴틀람에는 한인 타운이 있죠?”
“맞아.”
올리비아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밴쿠버 지역에 있는 한인 타운.
조금 멀리 있는 장소지만,
가장 가깝게 한국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생각보다 집값도 저렴해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분들 중 한 분이 오늘 만날 스칼렛 씨였다.
“스칼렛 씨요?”
보조석에 앉은 애슐리 씨의 질문.
나는 그녀의 말에 설명을 덧붙였다.
“케인 씨의 지인 분이세요.”
붉은색으로 머리 염색을 하신 중년 여성분.
원래는 리틀 이탈리아라 불린 커머셜브로드웨이 쪽에 사셨던 이탈리아계 이민자 분이셨다.
그 지역에 중국계 자본이 들어서면서 밀려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서리나 코퀴틀람 쪽으로 이동했다.
“케인이라 하면…”
“맞아요. 예전에 제가 소개시켜드린 단역 배우분이예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씨.
그녀에게 케인 씨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간단한 만담을 하거나 여러 역할을 맡아온 배우인 케인 씨.
우리 건물의 입주자 중 한 분으로 종종 카페에 오셨다.
“미안, 존. 그를 고용할 수는 없었어.”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레이스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우를 고용하는 건 그레이스 씨의 권한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녀가 내 요청을 받아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저…”
“질문 있니 올리?”
“네, 보통 감독하시면서 배우를 뽑으시잖아요.”
“그렇지.”
“그럴 때 보통 어떤 점을 봐요?”
올리비아의 질문.
나도 그녀의 질문에 호기심이 동했다.
“너무 포괄적이라서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데…”
살짝 뜸을 들이는 그레이스 씨.
하지만 올리비아의 열성적인 눈을 본 그녀는 한숨을 쉬고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감독이라고 해서 딱히 보는 건 없어.”
“네?”
“지금은 블라인드 면접을 본다고 하지만…영화 산업 특성상 외모를 볼 수밖에 없거든.”
예전에 그레이스 씨가 와서 했던 작업.
레쥬메를 넣은 배우들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며 고민하는 모습이 기억났다.
“그 외모 중에서 작품과 어울리는 사람을 먼저 추려.”
“그다음에는 요?”
“그다음에는…”
눈치를 살피는 그레이스 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우신 모양이었다.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일종의 뒷조사 같은걸 해.”
“뒷조사요?”
“솔직히 영화가 1~ 2 개월 만에 만들어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든.”
이어지는 그레이스 씨의 설명.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배우들의 social networking service, 한국에서는 흔히 SNS라 불리는 걸 확인한다고 한다.
최근 시위 이후 더욱 급증한 #이 종족 해시태그.
이 부분에 있어서 불협화음을 만들 수 있었기에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최근 우리 회사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 가급적이면 인스탁 그램 같은 거 사용하는걸 자제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게 가능해요?”
올리비아의 질문.
그 질문에 그레이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에 대한 계약서 조항이 있어. 그러니까 따르는 게 좋아.”
그레이스 씨의 스산한 목소리.
하지만 올리비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그다음은 면접을 보고. 회사측에서 배포한 연습용 대본으로 리허설을 시켜보지.”
“그리고 그중에서 한 명을 뽑는 거예요?”
애슐리 씨의 질문.
그 말에 그레이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후의 문제는 회사 HR 부서에서 관리하기 시작해서 자세히는 몰라.”
“HR 부서가 뭐예요…?”
“Human Resource라는 부서인데 흔히 인사과라 불리지.”
회사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애슐리 씨는 그레이스 씨의 설명에 감사를 표했다.
잠시 뚱하게 있는 올리비아.
그녀는 운전석에 있는 내가 단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올리?”
그레이스 씨의 부름에 그녀를 바라보는 올리비아.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생각하던 거랑 조금 달라서요.”
“어떤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올리비아의 입에서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
그중 나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왔다.
“짹짹이를 이용해서 면접 기회 얻은 거? 워낙 유명해서 나도 알고 있어.”
한 영화 계정에 지속해서 리짹짹을 한 배우.
그 배우는 자기 커리어를 지속해서 어필하여 결국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배우를 선택하는 줄 알았어요.”
“일종의 마케팅이야. 영화에 기대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지.”
“정말요?”
“세상은 생각보다 현실적이거든.”
그레이스 씨의 웃음.
그 웃음에 올리비아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어. 그 배우가 검증되었는지는 우리가 직접 확인해야 하니까.”
“그러면…”
“일종의 쇼맨십이지. 이미 고용이 결정이 난 뒤 하는 경우가 많아.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헤에…”
올리비아의 귀여운 모습.
나는 그녀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거야?”
“그냥 그런 생각해봤어요.”
“꿈은 많으면 좋지.”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전문가의 분위기를 풍기셨다.
“그러면 그레이스 씨의 생각으로는 여기 셋 중에 누가 배우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갑자기?”
올리비아의 갑작스러운 질문.
그 질문에 그레이스 씨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라면…”
갑자기 조용해진 차량 안.
다들 숨 죽여 그레이스 씨의 선택을 받길 원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너무 진지한데?”
“빨리 선택 해주세요.”
내 장난기 어린 말에 웃음을 터트린 그레이스 씨.
그녀는 한 바탕 웃은 다음 모두를 바라보셨다.
“만약 셋이 면접을 보러 왔다면…나는 애슐리를 선택하겠어.”
희비교차.
나와 올리비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애슐리 씨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실망하지 말고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봐.”
“네, 해명 부탁드릴게요.”
올리비아의 장난스러운 질문.
그녀의 질문에 그레이스 씨는 미소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애슐리는 캐릭터 성이 좋거든.”
“캐릭터 성이요?”
“그러니까…매력적이란 뜻이지. 사람을 빨아들이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내 말에 웃음 짓는 그레이스 씨.
애슐리 씨는 얼굴을 붉히며 날 바라보셨다.
“봤지? 이런 게 매력적이라는 뜻이야.”
“…”
불만 가득한 올리비아의 표정.
그레이스 씨는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로 체력이 좋아 보이니까.”
“체력이요?”
“배우는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소모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이어지는 그레이스 씨의 설명.
그녀의 설명 덕분에 영화 제작 도중 생겨나는 많은 부상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애슐리는 아름답잖아. 물론 올리비아도 아름답지만 아직 어린아이이고.”
“...”
살짝 삐진 듯한 올리비아의 표정.
그걸 본 그레이스 씨는 천천히 올리비아를 위로해주었다.
“너도 조금만 더 크면 도전해 볼 수 있어.”
“정말이죠?”
“네가 의지만 있다면.”
미소 짓는 그레이스 씨.
이런걸 보면 그녀는 아이도 잘 다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밴쿠버에서 살아온 시각은 짧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살아온 긴 시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그녀의 삶.
확실히 사람보다 더욱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후 이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간단한 이야기부터 저녁은 뭘 먹을 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소소한 이야기들이 끝날 때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Scarlett Design & Print.
스칼렛 디자인 프린트라 적힌 간판.
그 앞에 차량을 주차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보이는 수많은 프린트와 여러 작업물들.
확실히 이 지역에 있는 모든 가게의 프린트 작업물을 담당하는 곳이라 여전히 바쁜 장소였다.
멀리 보이는 한 중년 여성 분.
나는 그녀에게 다가 갔다.
“잘 지내셨어요? 스칼렛?”
“어서 와 존. 오랜만이야.”
나를 안아 주시는 여성 분.
그녀는 날 지그시 바라보셨다.
“왜 그러세요?”
“못 보는 사이에 인기가 많아졌구나 싶어서.”
“하하…”
머쓱한 웃음.
그것도 그럴 것이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올리비아까지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소개 해 줄 거지?”
“이쪽은 요…”
자연스럽게 먼저 소개하게 되는 애슐리 씨.
내 소중한 사람인 그녀를 스칼렛 씨에게 소개시켜드렸다.
“안녕하세요. 애슐리라고 해요.”
“반가워요. 애슐리. 저는 스칼렛이라고 해요.”
안경을 쓰신 스칼렛 씨.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과 환한 미소까지.
온몸으로 애슐리 씨를 환영하는 그녀를 보면 여전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은…”
그레이스 씨를 소개하고 이어서 올리비아를 소개하자 스칼렛 씨는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빅토리아 학교 학생이라고?”
“네. 9 월에 졸업 예정이예요.”
“그렇구나. 브라운 씨는 잘 있나 모르겠네.”
“혹시…수학 선생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밴 브라운. 내 후임으로 들어온 친구야.”
“수학 선생님이셨나요?”
“그렇단다.”
미소 짓는 스칼렛 씨.
그녀는 올리비아의 놀란 표정이 귀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 분들과 여기에 온 이유는?”
그녀에게 미리 전화로 알려드리긴 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직접 말하기로 했기에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여기에 있는 올리비아랑 애슐리 씨를 위한 명함을 만들려 구요.”
“네 것은?”
“제 것도 추가로 구매할 생각이예요.”
“저번에 QR 코드 넣은 게 반응이 좋았나 보네.”
“맞아요.”
스칼렛 씨의 제안으로 넣은 QR 코드.
덕분에 우리 카페에서도 픽업 주문을 받기 편했다.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스칼렛 씨.
그녀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를 불렀다.
“이쪽으로 와봐요.”
날 한 번 보는 애슐리 씨.
나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냈다.
스칼렛 씨를 따라 가는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
나와 그레이스 씨만 남게 되었다.
천천히 가게 내부를 둘러 보는 그레이스 씨.
그리고 그녀는 날 바라보았다.
“꽤 흥미로운 공간이네.”
“그렇죠?”
온갖 언어가 뒤섞인 가게.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은 여러 문화가 섞인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영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타갈로그어, 힌두어 등등.
여러 가지 언어가 적혀 있는 스칼렛 씨의 작업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언어가 다양하게 있네. 다운타운에서도 이 정도까지 보이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그레이스 씨의 말씀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이 이 종족에게 밀려난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거든요.”
“…?”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레이스 씨.
나는 가게 너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