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푸른 꿈 (5)
* * *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애슐리 씨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살짝 목이 마른 상태.
냉장고를 열어 찬 물을 꺼내 마셨다.
낮의 열기가 살짝 식은 새벽.
하늘에는 너무나도 밝은 달이 떠 있어 나도 모르게 멍하니 달을 바라보게 되었다.
손에 들려 있는 찬물.
나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예전에는 이런 달이 보이는 집에 살 수 있을까 상상도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여름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베이스먼트에서 살던 시절.
흔히 말하는 반지하 같은 집에 살 때의 내게 주어진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문.
창문은 밴쿠버의 더럽고 냄새 나는 바닥만 보여 주었다.
그사이로 들어오는 무수한 빛들.
달빛, 차량의 불빛, 깜빡거리는 조명등.
그 빛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물론, 어릴 적에 살았던 반지하와 같은 집보다는 나았다.
어릴 적 살았던 서울의 반지하 방.
나는 그 집에서 가족과 같이 살았었다.
창문에는 언제나 신문지가 붙어 있었는데 어렸던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시장 근처에 있던 우리 집.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살던 우리 집을 엿보거나 더럽혔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뭉개버렸다.
반지하에 살던 우리 가족.
서로 몸을 눕혀 서로의 체온으로 겨울을 나던 그 시절이 지나고,
우리 가족에게 봄이 왔다.
“…존 씨…”
졸린 눈을 부비며 내게 다가 오는 애슐리 씨.
잠옷을 입은 그녀가 베개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깼어요?”
“잠깐 깼는데…옆에 없어서요.”
잠에 취한 듯 살짝 풀어진 미소를 짓는 애슐리 씨.
오늘 많은 일이 있다 보니 많이 피곤 했을 텐데…
그녀를 깨운 게 아닐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게 안기는 애슐리 씨.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내 무릎에 머리를 눕혔다.
“미안해요. 자는 데 방해해서요.”
“아니예요…주말이라서 더 잘 수 있는걸요?”
길게 기지개를 펴는 그녀.
그러고는 내 무릎에 머리를 비볐다.
“달이 정말 밝네요.”
“그쵸? 저도 물 마시러 나왔는데…달빛에 취해서 이렇게 보게 됐어요.”
조금 진부한 표현.
하지만 저렇게 동그랗고 환하게 빛나는 달빛은 사람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존 씨도 감성적이시네요.”
“달빛을 보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많거든요.”
“어떤 기억들이요?”
“행복했던 기억들…그리고 안타까웠던 기억들 모두요.”
반지하를 살던 기억.
그 기억이 전부 안 좋은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의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
반지하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겹쳐 있는 공간.
그 기억들을 엮어 주는 것이 바로 달빛이었다.
“애슐리 씨는 어때요?”
“저도…마찬가지예요.”
물끄러미 달빛을 바라보는 애슐리 씨.
그녀도 예전 기억이 기억나는 듯 말없이 달빛을 바라보셨다.
“달빛은…묘한 힘이 있어요. 그래서 토끼 수인들은 달을 숭배해요.”
그레이스 씨에게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
나는 말없이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토끼 수인에게 있어서 달은 하나이자 모두를 대표하는 존재예요.”
“모두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그녀의 말.
그레이스 씨의 푸른 꿈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네, 고통도…슬픔도…기쁨도…모두 저곳에 모인다고 믿죠.”
손을 뻗어 달을 잡으려고 하는 애슐리 씨.
하지만 그녀의 손을 달에 닿지 못했다.
“저 달빛이 닿는 장소에…제 가족이 있을까요?”
애슐리 씨의 덤덤한 말.
나는 그 말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슐리 씨…”
“오늘 그레이스 씨와 대화하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어떤 걸 느끼셨나요?”
“…말로 표현하기 어렵네요.”
빙긋 웃는 애슐리 씨.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셨다.
아래에서 날 바라보는 애슐리 씨.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그녀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후후…고마워요.”
“지금, 이 자세로 키스하고 싶은데…힘들겠죠?”
내 말에 빙긋 웃는 애슐리 씨.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잡아당겼다.
천천히 느껴지는 그녀의 입술.
나는 그녀의 포근한 입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러면 괜찮죠?”
“네. 정말 좋았어요.”
내 말에 애슐리 씨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웃으셨다.
그때 생각난 무언가.
나는 이걸 애슐리 씨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슐리 씨는 혹시 엘프어에 대해 잘 아시나요?”
“조금은 알아요.”
숲에서 자주 교류가 있었던 엘프와 토끼 수인.
그런 관계가 있어서 그런지 애슐리 씨도 엘프어를 조금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혹시 에레스트림이 뭔지 알고 계시나요?”
“푸른 꿈이라…”
잠시 생각에 빠진 애슐리 씨.
그리고 이내 날 바라보셨다.
“제가 조금 전에 달에 대해 이야기한 거 기억하세요?”
“네, 토끼 수인들은 달에 모든 감정이 모인다고 믿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감정들은 하나로 뭉쳐 거대한 무언가가 되어 빛을 발산해요.”
“그게 달빛인가요?”
“네. 그래서 토끼 수인들은 달빛 아래서 춤을 추며 그 감정을 받아들이려고 해요.”
“일종의 의식이네요.”
“맞아요.”
잠시 달빛을 바라보는 애슐리 씨.
그러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좋은 감정이든…나쁜 감정이든…사람들의 감정이 모인 달빛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두를 이해하고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아…”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한 푸른 꿈.
그건 이 세상에도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유토피아 혹은 도원향이라 불리는 이상향.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 모두 그들의 언어로 이상향을 믿고 있었다.
“푸른 꿈도 마찬가지예요. 엘프들이 꿈꾸는 세상…모두가 하나 되어 살 수 있는 공간이죠.”
“그게…에레스트림…이군요?”
“맞아요. 저희에게 있어서는…”
애슐리 씨의 시선이 닿은 곳.
그곳에는 지금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달이 있었다.
“존 씨의 이상향은 어디인가요?”
“방금 헤일리 씨 같았던 거 아세요?”
내 장난스러운 말에 미소 짓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빠져들 것만 같은 그녀의 눈동자.
나는 그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그러니까 애슐리 씨의 옆이요.”
사랑스럽게 내 머리를 감싸는 애슐리 씨의 손길.
나는 그 손길을 받아들여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다가 갔다.
* * *
햇빛이 내리쬐는 아침.
내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살짝 추운지 몸을 웅크린 채 내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애슐리 씨.
그녀는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슬슬 일어나지?”
내게 다가온 그레이스 씨.
그녀는 올리비아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계셨다.
“…아침은 제가 만들어도 되는데…”
“이미 다 만들어 놨어. 차려 뒀으니까 와서 먹기나 해.”
그레이스 씨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애슐리 씨를 깨웠다.
“으음…”
살짝 눈을 뜬 애슐리 씨.
그녀도 나처럼 햇빛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셨다.
나는 그녀를 위해 손으로 햇빛을 가려주었다.
“헤헤…고마워요.”
애슐리 씨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달빛을 보다 잠든 거실.
그 거실에 맴도는 향긋하면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헤매셨다.
“이 냄새…”
“맞아. 애슐리. 데레트야.”
전혀 알 수 없는 요리의 이름.
하지만 애슐리 씨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음식을 향해 다가가셨다.
“세상에…”
“오랜만에 만드는 거라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
그레이스 씨의 말에 뒤에서 나타난 올리비아.
그녀는 애슐리 씨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이거 정말 맛있어요.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올리비아의 말에 머쓱해 하는 그레이스 씨.
애슐리 씨는 그런 그레이스 씨가 정말 고마운 지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애…애슐리?”
“고마워요. 그레이스 씨.”
“아…아냐. 어제 네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음식도 해줬으니까…”
많이 쑥스러워하는 그레이스 씨.
나는 애슐리 씨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궁금해 조심스럽게 그녀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 눈에 들어온 음식.
그건 각종 견과류와 대추 야자 그리고 채소들이 섞인 일종의 샐러드와 비슷한 음식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살짝 열을 가해 조리한 음식.
그래서 집안 가득 그레이스 씨의 요리의 향기가 맴돌았다.
“이거랑…올리비아가 도와줘서 만든 졸리도 있어.”
“졸리도요?”
귀를 세우며 기뻐하는 애슐리 씨.
나는 졸리라는 음식도 같이 확인했다.
큰 냄비에 담긴 음식.
감자와 당근등 각종 야채가 들어가 있고 익은 밀가루 반죽이 떠다녔다.
맨눈으로 보기에는 감자 수제비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향신료가 들어가서 그런지 향은 내가 알던 감자 수제비와 많이 달랐다.
그레이스 씨와 올리비아가 만든 음식으로 차려진 아침밥상.
아침으로 먹기에는 조금 많은 양이었지만,
식탁에 앉은 사람이 4 명이다 보니 괜찮게 느껴졌다.
“다들 식기 전에 먹어.”
그레이스 씨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를 시작했다.
먼저 먹어 본 건 졸리라는 국물 요리.
감자 수제비와 비슷한 느낌인 줄 알았는데 묘하게 굴라쉬 맛이 났다.
헝가리 음식 중 하나인 굴라쉬.
토마토, 감자, 당근, 콩, 양배추 등을 넣고 끓인 일종의 스프 혹은 스튜였다.
원래는 소고기를 넣는 방식인데 졸리라는 음식은 소고기 대신 수제비처럼 밀가루 반죽이 들어갔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깊은 육수의 맛.
거기에 각종 야채에서 우러나온 맛과 향이 입맛을 돋워주었다.
이어서 먹기 시작한 데레트.
이건 견과류와 야채 그리고 대추야자가 들어간 음식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
굳이 비교하자면 핫 샐러드라 불리는 일종의 야채 볶음의 느낌이 있었다.
거기에 은은한 단맛을 주는 대추야자.
추가로 견과류가 있어 씹는 맛도 좋고 풍미도 있었다.
“어때?”
우리가 먹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맛있어요.”
“…그리워지는 맛이예요.”
나와 애슐리 씨의 말.
그 말에 그레이스 씨는 기쁜 표정으로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맨날 혼자 있어서 요리를 안 해 먹다 보니 걱정했었거든. 맛있게 먹어 주니 다행이네.”
활짝 웃는 그레이스 씨.
어제의 일 이후 그녀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말이 맞죠? 존 아저씨랑 애슐리 씨도 좋아할 거라는 말.”
“네 말이 맞아. 올리. 도와줘서 고마워.”
그레이스 씨의 감사의 말에 미소 짓는 올리비아.
그녀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답하고 식사를 이어 나갔다.
맛있게 먹은 아침 식사.
특히 애슐리 씨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스 씨.”
“응?”
“혹시 레시피를 알 수 있을까요?”
“존이라면 알려 줄 수 있는데…근데 왜?”
“애슐리 씨가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서요. 그래서 나중에 애슐리 씨를 위해 만들어 보려 구요.”
그 말에 나와 애슐리 씨를 번갈아 보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