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풍잎 카페-77화 (77/292)

〈 77화 〉 푸른 꿈 (3)

* * *

컴포트 푸드(Comfort food).

흔히 말해서 누군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감성적인 가치를 제공하는 음식이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김치.

물론 매일 먹는 김치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기억이 끼어들면 같은 김치라도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도와 김장을 하던 날.

그때 먹었던 굴 보쌈과 수육 그리고 겉절이는 내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레이스 씨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

이 세계에서 그 음식과 동일한 음식을 만들 수는 없지만,

애슐리 씨의 기억을 더듬어 만든 음식은 그레이스 씨에게 향수를 주기에 충분했다.

“…”

멍하니 서서 식탁만 바라보고 있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금방 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차린 건 많이 없지만…”

애슐리 씨의 말.

그 말에 결국 그레이스 씨는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흑…흐흑…흑…”

팔로 눈을 가려보았지만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하는 눈물방울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다가간 애슐리 씨.

그녀는 그레이스 씨를 조심히 안아주셨다.

말없이 그저 토닥거려 주는 애슐리 씨.

나는 그런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그 그리움에 사무친 그녀는 일에 몰두해 잊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싶어도 그녀를 이용하는 사람들밖에 없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 버린 모양이었다.

조금 진정이 된 그레이스 씨.

퉁퉁 부은 눈의 엘프는 매일 담배를 피며 세상을 한탄하는 그런 엘프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 울었는지 딸꾹질하는 그녀.

나는 조심히 다가가 그녀를 위한 물을 건네 주었다.

“…자상하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게 전부니까요.”

말없이 물컵을 받아 든 그레이스 씨.

물을 마시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초대해 줘서 고마워. 이건…이 세계에 온 뒤에 받아본 최고의 선물이야.”

그레이스 씨는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고는 감사함을 표현하셨다.

“올리비아가 나오려면 조금 걸릴 거 같은데 먼저 드실래요?”

“아니, 괜찮아. 다 같이 먹고 싶어.”

손 사래를 치는 그녀.

그레이스 씨는 모두와 다 같이 먹고 싶어 하셨다.

모두 씻고 나서 마지막으로 내가 씻는 시간.

아무래도 내가 가장 빨리 씻을 수 있다 보니 가장 늦게 들어갔다.

확실히 네 명이 씻으니 복잡한 화장실.

화장실에 있는 욕조에 샤워 커튼을 달고 있는 형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욕조 안에는 먼저 씻은 사람들의 흔적들이 많았다.

그렇게 흔적들을 간단히 정리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려고 수건을 들어 올렸는데 처음 보는 물건이 있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한 금반지.

애슐리 씨나 올리비아가 끼고 다니는 반지는 아니니 당연히 그레이스 씨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에 놔둔 내 옷을 입고 밖에 나오니 벌써 먹을 준비가 끝난 사람들.

일단은 반지를 주머니에 두고 식탁에 다가가 앉았다.

“이제 먹어도 되는 거지?”

내 눈치를 살피는 그레이스 씨.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 식사 초대의 주인공은 그레이스 씨니까요.”

“그 말을 기다렸어.”

그레이스 씨는 내가 그녀에게 금반지에 대해 묻기 전에 식사를 시작하셨다.

아무래도 조금 여유가 생기면 이야기해야할 것 같아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을게요. 애슐리 씨.”

“입맛에 잘 맞을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세상의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아니지만,

애슐리 씨의 세상의 레시피로 만든 음식.

그렇다 보니 나와 올리비아에게는 생소한 음식들이었다.

가장 먼저 내가 집은 건 팔라펠과 비슷한 느낌의 음식이었다.

이집트에서 이란까지 중동 문화권에 넓게 퍼져 있는 음식 중 하나였다.

애슐리 씨가 만든 경단 같은 음식은 고구마를 베이스로 사용했지만,

팔라펠의 경우 병아리 콩으로 만들고 살짝 튀겨 풍미를 높였다.

“혹시 이거 손으로 먹어도 되나요?”

팔라펠과 달리 차가운 느낌의 경단.

내 질문에 애슐리 씨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손으로 먹어도 괜찮아요. 제 부모님은 손으로 먹어야 더 맛있다고 하실 정도니까요.”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애슐리 씨.

그녀의 말에 따라 고구마 경단을 입에 천천히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구마의 향.

그리고 그 안에서 톡톡 터지듯 입맛을 돋구는 향신료까지.

조화로운 맛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하게 되었다.

“정말 맛있어요. 그리고…뭐랄까…”

“톡톡 튀는 맛이죠?”

빙긋 웃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톡톡 튀는 맛이 있는 경단.

아무래도 안에 향신료와 조화된 레몬 혹은 오렌지 제스트가 그런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낯선 조합이지만 맛있는 맛.

내 생각만은 아닌지 올리비아도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월럽을 먹으면 다들 빠지게 돼.”

그레이스 씨의 말.

그 말에 애슐리 씨는 동감하시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월럽이요?”

“엘프어로는 그렇게 불러. 토끼 수인들은 어떻게 부르는 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저희는 달경단이라 불러요. 고구마 베이스다 보니까 노란색이 달과 비슷해서요.”

“아, 그렇지. 토끼 수인들이 달을 숭배하기도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씨.

확실히 토끼 수인과 교류가 있었는지 이런 부분에 있어서 교감이 쉽게 이루어졌다.

“그럼 이건 뭐라고 불러요? 정말 맛있던데…”

감자에 향신료를 뿌려 구운 음식.

일반적인 감자 요리와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땅 무지야.”

자신 있게 자기 요리를 소개하는 애슐리 씨.

그녀는 올리비아의 질문에 답해주셨다.

“땅 무지요?”

“감자가 땅에서 나오니까. 땅이라 불리고 들어간 향신료 배합을 무지라 그래. 그래서 땅 무지야.”

“아아…”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

나도 이 음식을 먹으며 왜 올리비아가 놀라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맛.

한국의 감자채 볶음에 향신료가 들어간 맛이었다.

그런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의 조합이라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특히, 달경단이라 불리는 음식과 조화가 좋았다.

단맛이 조금 있는 달경단을 계속 먹으면 조금 물리는 느낌이 있었다.

이 단조로운 느낌을 잡아주는 게 이 땅 무지라는 음식이 변화를 주었다.

“둘의 조화가 좋네요.”

“맞아. 그래서 엘프들 사이에서도 달과 땅의 조화라 불리지.”

그레이스 씨는 즐겁게 식사를 즐기며 음식에 대한 설명을 추가로 해주셨다.

“엘프어로는 땅 무지를 뭐라고 하나요?”

애슐리 씨의 질문.

그레이스 씨는 땅 무지 하나를 들어 올리며 알려주셨다.

“우리는 웡카라 불러. 웡이 감자를 의미하고 카가 향신료를 뜻해.”

토끼 수인과 비슷한 형식의 이름.

새로운 문화를 배우니 재미도 있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제 마지막 음식을 먹어봐야겠지?”

“그 전에 먼저 샴페인 한 잔 씩 어때요?”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그레이스 씨.

나는 샴페인 주인의 허락을 받고 아이스 버킷에 살짝 칠링해 둔 샴페인을 가져 왔다.

“올리비아는 미안 해. 대신 탄산음료로 줄게.”

“아쉽네요.”

2 개월 뒤면 성인이지만,

아직은 성인이 아닌 올리비아.

그러므로 그녀에게 샴페인을 줄 수 없었다.

올리비아의 아쉬움을 알고 있는 그레이스 씨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성인되면 내가 집에 있는 샴페인 더 가져올게. 그때는 네가 성인이 된 걸 축하하면서 마시는 거지.”

“기대할게요. 그레이스 씨.”

“걱정 마. 엘프는 한 번 약속하면 지키거든.”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그걸 본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올리비아를 제외한 모두의 잔에 샴페인이 채워졌다.

레드 와인 잔에 담겨져 있는 샴페인.

비싼 샴페인이 레드 와인잔에 담겨져 있는 게 좀 그렇지만…

샴페인은 물론 스파클링 와인도 잘 먹지 않는 우리 집이라 샴페인 잔이 부족했다.

“토르곳과 샴페인의 조합이라니…생각은 못했지만 상상만 해도 기대가 되네.”

가지에 양념을 해 구워 낸 음식.

코에 맴도는 향을 맡기만 해도 이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슐리 씨의 언어로는 뭐라고 해요?”

“저희는 노을 배라고 불러요. 잘 구운 가지 색이 마치 노을 같으니까요.”

“토끼 수인들은 꽤 감성적이라서 말이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씨.

확실히 엘프어와 다른 느낌이 있었다.

간단한 요리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모두 날 바라보았다.

“다들 진심이세요?”

“왜? 이 집의 주인은 너 잖아. 그러니까 네가 건배사를 해야지.”

“오늘 음식은 애슐리 씨가 만들었는데요.”

“저는 존 씨에게 맡길게요.”

빙긋 웃는 애슐리 씨.

나는 졸지에 건배사하게 생겼다.

“어…일단은…오늘 저녁 초대에 와주신 그레이스 씨에게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리고 오늘 열심히 일해준 올리비아에게도 고맙구요.”

“천만에요.”

“마지막으로…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준 애슐리 씨에게 감사해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애슐리 씨는 대답 대신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잔을 들자 모두 따라 잔을 들어 올렸다.

세 잔의 샴페인과 한 잔의 음료수.

안에 담긴 것은 다르지만 무언가를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모두를 위하여.”

허공에서 부딪힌 잔들.

그리고 다들 한 모금 씩 하고 애슐리 씨가 만든 노을 배를 즐겼다.

모두가 음식을 즐기는 사이 그레이스 씨가 날 바라보셨다.

“건배사가 너무 올드한데.”

“어쩔 수 없었어요. 건배사를 할 만한 곳을 간 적이 없었거든요.”

“진짜?”

“애슐리 씨를 만나기 전에는 일에 치여 살았으니까요.”

애슐리 씨가 오신 뒤로 여유가 생긴 카페.

만약에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혼자서 내일 카페 일을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게 분명했다.

“물론 올리비아의 도움도 많이 있죠.”

“언제 말씀하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올리비아.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네.”

덤덤히 나와 애슐리 씨 그리고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시는 표정이여서 그녀를 잠시 생각에 몰두할 수 있도록 놔두었다.

내 앞에 놓여져 있는 가지 구이.

이걸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잘 잘라 한 입 베어 물으니 맛이 정말 좋았다.

기본적인 가지구이 보다 더 향긋하고 입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

이건 내가 먹어 본 음식 중에서 비교할 만한 음식이 없을 정도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오묘하면서도 입안 가득 느껴지는 감칠맛.

가지구이에 이런 감칠맛이 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맛있게 드셔 주셔서 고마워요.”

그렇게 이어진 식사.

샴페인은 비어가기 시작했고,

음식들은 이미 소스만 조금 남아 바닥을 보였다.

다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 대화하는 사이.

나는 그레이스 씨와 대화하면서 그녀에게 금반지를 보여 주었다.

“이거 잃어 버리신 거 같아서요.”

“아, 어디 갔었나 했는데 여기에 있었네. 고마워.”

금반지를 받아 든 그레이스 씨.

그녀는 잠시 그 금반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레이스 씨?”

“아, 미안 해.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그럼 그 물건도…”

“맞아. 넘어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반지야. 모든 엘프들은 다 가지고 있지.”

“모든 엘프들이요?”

“응, 이건 일종의 결혼 반지거든.”

그레이스 씨는 자기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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