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푸른 꿈 (1)
* * *
붉어지는 노을.
바쁜 오늘 하루도 끝나가기 시작했다.
"오늘 단체 손님 대응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애슐리 씨."
"말로만요?"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애슐리 씨.
나는 올리비아가 테이블을 닦느라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헤헤."
빙긋 웃는 애슐리 씨.
그런 그녀가 정말귀여워 보였다.
"난 없는 사람인가 봐?"
카운터 앞에 앉아 계신 그레이스 씨.
그녀는 불만을 드러내며 불편해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방금 전까지는 구석에 있던 테이블에 계셨던 그레이스 씨.
언제 카운터 앞에 오셨는지 알 수 없었다.
"어...언제 오신거예요?"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애슐리는 눈치챘을 텐데."
"정말이예요?"
"네, 방금 전에 올리비아가 테이블 청소하려고 그레이스 씨에게 잠시 자리 좀 옮겨 달라고 했었거든요."
"..."
애슐리 씨에게 당한 느낌.
아무래도 그레이스 씨 앞에서 내가 자신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제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임스랑 더 이야기하셨어요?"
"주제를 바꿔서 피하려고? 뭐 좋아...제임스라면 그 오크 말이지?"
오늘 제임스의 단체가 끝나고 제임스와 따로 만난 그레이스 씨.
내게 배경 확보 허락도 받았겠다 추진력을 받은 제임스는 그대로 그레이스 씨를 만나 그의 계획을 밝혔다.
"내가 애니메이션 감독을 해 본 적은 없는데 말이야..."
제임스가 건넨 제안.
그건 그들의 첫 작품의 감독이 되어달라는 제안이었다.
일 전에 있었던 시위대 문제로 그레이스 씨의 작품 계획은 이미 무기한 연기가 되어 버린 상황.
그 덕분에 그레이스 씨가 우리 카페에 자주 올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 할 일이 없는 그레이스 씨에게 제임스의 제안은 고려할 만한 제안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그레이스 씨가 고민하실 정도면 제임스가 꽤 적극적으로 나온 모양이네요?"
"맞아. 엉성하지만 계획도 많이 쌓아두었고...그의 팀원들도 의욕이 넘치더라고."
그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으신지 헛웃음을 지으셨다.
무작정 그레이스 씨에게 다가간 제임스.
그러고는 자신을 소개하고 자기 계획을 그레이스 씨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원래 사회의 불균형이나 진지함을 담아내는 작품들을 해 오신 그레이스 씨.
물론 상업성도 높지만 이런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들과 대조되는 애니메이션 감독 제안.
처음에는 거부의 의사를 밝히셨다.
"그다음이 웃겼어. 윌리? 그 양반도 꽤 적극적이었고."
제임스가 안 통하자 다가온 윌리 씨.
그는 슈퍼바이저로 이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요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설득당한 그레이스 씨.
그런데도 확실한 초안도 없었고 대본이나 스토리라인도 명확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두 번째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또 에리카라는 사람도 오고...스캇이란 사람도 오고...래브? 그 여자가 제일 말을 잘하더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씨.
결국, 나처럼 제임스의 팀에 둘러싸여 설득을 당해 버리셨다.
"축하드려요."
"고마워. 애슐리. 하지만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그저..."
"그저...?"
"나랑 조금 안 맞을 뿐이지."
덤덤히 말하는 그레이스 씨.
나는 그녀의 고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조금 설명해 주실수 있나요?"
"영화광인 너라면 잘 알꺼야."
날 바라보시는 그레이스 씨.
날 영화광이라 부르시는 그레이스 씨의 말을 부정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영화를 많이 보았고 그 덕분에 영화감독이 되었지. 뭐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
그레이스 씨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어하셨다.
"대부분 감독들은 '취향'이라는 게 있어. 작품을 아무리 중립적으로 만들어내려 해도 영화 감독 자신이 투영될 수밖에 없거든."
"아..."
"존은 바로 이해했지?"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나는 그녀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설명이 필요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내가 이해한 것을 풀어서 설명했다.
"감독들의 취향은 변화무쌍하지만 그 안에는 일정한 기조가 있어요. 그래서 감독들마다 집중하는 요소가 다르구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의 애슐리 씨.
나는 더 설명하고 싶었는데 내 설명할 수 있는 영어실력이 부족해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이전에 암울하고 우울한 작품들을 많이 해왔어. 거기에 대중성을 입힌게 영화 '존 도' 였고."
영화 감독 탈레드리엘의 작품들.
그녀의 작품을 모두 본 건 아니지만 대부분 우울한 감정선이 주요 기조였다.
'존 도' 역시 도망자라는 한국 로컬라이징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우울했고,
이 우울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의 액션과 엔터테인먼트 적 요소가 섞여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제임스가 원하는 건 내 취향과 조금 많이 달랐어."
"그 녀석은 언제나 '선함'을 믿는 녀석이니까요."
"나처럼 글러 먹은 놈과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지."
냉소적으로 말씀하시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선한 의지의 존재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 성향이 강했다.
'존 도'에서도 주인공은 결국 배신당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 마디로 해피엔딩이 없는 암울한 세계.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래서 일부 영화평론가들은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차갑고 냉소적이며 희망 따윈 없는 세계.'
"물론 나도 새로운 시도도 해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다음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던 인간과 이 종족 경찰의 이야기.
이미 작품도 다 구성되어 있고 배우들을 모집해 작품을 찍던 도중 시위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메인 배우의 일탈적 행위.
그저 시위에 참가했을 뿐이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영화사는 냉정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메인 배우의 하차.
추가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분열된 분위기 속에서 당장 영화를 낼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판단한 그레이스 씨의 영화사.
두 가지 요소로 인해 그녀의 영화는 무기한 연기가 되고 말았다고 설명하셨다.
"지난 일이야. 뭐, 아무튼 영화사 전속 영화 감독이 아니라서 제임스의 제안을 받아도 상관없긴 한데..."
"그레이스 씨의 취향과 맞지 않다는 거죠?"
"...맞아. 그러니까...내 처지에서는 제임스가 원하는 색감의 애니메이션은...뭐랄까...너무 밝아."
선한 의지를 믿는 제임스.
반면, 내부의 악함을 드러내 모두에게 보여주는 그레이스 씨.
둘의 성향은 상반되어 있었다.
마치, 성악설과 성선설처럼 말이다.
"네 생각은 어때? 애슐리."
"저요?"
갑작스러운 그레이스 씨의 질문.
애슐리 씨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레이스 씨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햤다.
"저는...음...그레이스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취향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응?"
그레이스 씨의 놀란 눈.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애슐리 씨는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그레이스 씨가 원래부터 악하신 건 아니잖아요."
"뭐,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지."
원래는 숲을 뛰어다녔던 그레이스 씨.
그런 그녀가 강제로 이 세상에 넘어온 뒤에는 그녀의 삶의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런 그녀가 존재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악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 씨는 악하다고 믿고 계신거구요."
"그렇지."
"반대로 생각하면...제임스 씨도 선하다는 걸 믿는 거구요."
"혹시 이거 철학 교실이야?"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그레이스 씨.
선함이나 악함이나 이런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헤일리 씨와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아뇨. 그러니까...제 생각은 그레이스 씨의 취향도 선택하신 거니까...제임스 씨의 취향을 한 번 선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한번 해보라는 뜻이네."
"맞아요."
"흐음..."
고민에 빠지는 그레이스 씨.
그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기에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민에 빠진 사이.
나와 애슐리 씨는 정리를 끝냈다.
내일부터 주말이다 보니 방범 시스템을 작동 시켰다.
그동안 애슐리 씨와 그레이스 씨 그리고 올리비아가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 했어요."
내 말에 밖으로 나온 네 명.
이제 바로 위에 있는 집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그레이스 씨의 손에 들린 술.
우리가 제임스의 단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샴페인을 가져오신 모양이었다.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두긴 했는데 더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뭐 너랑 애슐리 그리고 올리가 만든 음식이라면 다 맛있겠지. 그거랑 별개로 혹시 집에 맥주 있어?"
"맥주요?"
"응, 샴페인 만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
술에 대해 열정을 보이시는 그레이스 씨.
나는 그녀가 오늘 하루 자고 간다는 말에서 그녀가 오늘 술을 잔뜩 마실거라는 걸 미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맥주가 있긴 한데...한 캔 정도 남았어요."
애슐리 씨를 처음 만난 날 마셨던 맥주.
그게 거의 마지막 남았던 맥주다 보니 내 기억이 맞다면 집에 있는 맥주는 1 캔 정도 남았다.
"그걸로 누구 코에 붙여?"
"그럼 맥주사러 갈까요?"
"좋아."
"일단 짐부터 내려놓고 가죠. 그리고 애슐리 씨랑 올리비아도 옷도 편안 하게 갈아입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생각 보다 많은 짐.
거기다 메이드 복으로 근무한 애슐리 씨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친구 엄청 챙기네."
입이 삐죽 나온 그레이스 씨.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도착한 우리 집.
우리 집에 처음으로 방문한 그레이스 씨는 우리 집을 이곳저곳 둘러 보셨다.
"여기에 너랑 애슐리랑 올리비아가 같이 산다는 거지?"
"네, 셋이 살고 있어요."
"그렇군..."
그렇게 집안을 계속 둘러보는 그레이스 씨.
그사이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했다.
"존."
"네?"
"혹시 네 명은 좀 비좁으려나?"
"네?"
당황스러운 그레이스 씨의 말.
나는 그레이스 씨를 바라보았다.
"넷이 살아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그레이스 씨.
하지만 그녀의 평소 대화나 행동을 보아서 이 말은 장난 반 진담 반이었다.
"내 직장도 여기 근처겠다. 같이 살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내가 당황하는 걸 본 그레이스 씨.
그녀는 내 당황하는 모습이 즐거우신 모양이었다.
"장난이야. 그렇 좋겠다는 이야기지."
"하하...하..."
그렇게 그레이스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사이 올리비아와 애슐리 씨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셨다.
평범한 레깅스에 간단한 티셔츠를 입은 올리비아.
그리고 마찬가지로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애슐리 씨가 나왔다.
여름에 맞는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그러면 맥주 사러 가 볼까?"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를 따라 리큐르 스토어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