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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 카페-72화 (72/292)

〈 72화 〉 회의 (3)

* * *

당혹스러운 그레이스 씨의 요청.

나는 그 요청에 그녀를 바라보면서 재차 확인했다.

"정말 저희 집에서 주무시려구요?"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위층에 있는 애슐리 씨와 올리비아를 바라보자 그레이스 씨는 이해하셨다.

"동거인들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네, 그것도 있구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일단 네 의사가 궁금한데."

"제 의사요?"

"응, 내가 같이 자도 될까?"

많이 당혹스러운 요청.

하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 씨라면 괜찮아요."

내 진지한 말에 날 빤히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그러고는 갑자기 크게 웃으셨다.

"하하하."

"왜...왜요?"

"보통은 이유 먼저 물어보고 그다음에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유도 안묻고 무작정 허락해준다니. 너 다워서."

"하하...하."

그레이스 씨의 장난에 걸린 상황.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해.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아니예요. 그리고...그레이스 씨라면 이유가 없어도 괜찮거든요."

"그거 애슐리 한테 실례되는 말인 거 알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씨.

나는 그녀를 돕겠다는 생각에 애슐리 씨의 마음을 신경 쓰지 못했다.

"착해 빠져가지곤. 그러니까 매일 같이 애슐리가 네 볼에다가 흔적 남기고 그렇게 매일 같이 관계를 맺는 거 아니야."

듣고 보니 맞는 말.

나는 조금 내 행동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사람 관계에 대해 미숙하고 더 배워야할 점이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레이스 씨가 어떻게 내가 애슐리 씨와 매일 같이 관계를 하는지 아시는 게 궁금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네 몸 전체에서 애슐리의 향기가 나니까."

"아..."

"아무튼, 이건 내가 장난쳐서 잘못한 거니까 사과할게."

"그러면 주무시고 가신다는 것도..."

"아니, 그건 장난이 아니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내게 사진 하나를 보여주셨다.

"샴페인이네요?"

"이 끝내주는 샴페인을 마시고 여자 혼자 보낼 생각은 아니지?"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어디서 구하긴. 선물 받은 거지. 예전에 LLVM 그룹이랑 협업한 적이 있어서 그때 인플루언서들에게 준 거 잘 보관하고 있었어."

사진 속 샴페인.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이라 부를 수 있었는데 이건 그중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샴페인이었다.

100 만원 이상 호가하고,

샴페인계의 주식 같은 샴페인이라 오래 보관할수록 가격이 치솟았다.

"오늘 저녁에 마실거야."

"진짜요?"

이 비싼 술을 오늘 우리 집에서 마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레이스 씨.

난 그녀의 말에 놀라서 그레이스 씨를 바라보았다.

"오늘 너희 집 저녁 식사 때 마시려고 가져온 거야. 초대 받았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큰 선물이었다.

"애슐리가 술을 못 마시고 그런 건 아니지?"

"그녀는 비건이긴 한데...술은 물어봐야 할 거 같아요."

예전에 한 번 나온 술에 대한 이야기.

전시회를 가는 길에 스몰비어가 많은 그랜빌 아일랜드를 지날 때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럼 내가 이야기할게."

"그레이스 씨가요?"

"너 오늘 바쁘잖아. 나는 한가하고."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라떼가 담긴 컵의 입술 닿는 부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씀하셨다.

조금 독특한 행동.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뭐 하냐는 듯한 표정이네?"

내 속마음이 너무 쉽게 들켜서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뭔가 생각할 때면 이런 행동을 하는데... 공공장소에서도 이래서 문제지."

"무슨 고민 있으신가요?"

그러자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컵을 들고 일어나시더니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애슐리랑 올리비아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하는 생각?"

"네?"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스 씨는 그녀가 자주 가는 구석진 자리로 이동하셨다.

그러고는 그녀는 늘 그렇듯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일을 시작했다.

내가 그레이스 씨에게 정신 팔린 사이 내 곁에 온 올리비아.

그녀는 나랑 그레이스 씨를 번갈아 보았다.

"저분이 그 분이예요?"

"그 분?"

"그 영화 감독 님 말이예요."

예전에 꼭 만나고 싶다고 말했던 올리비아.

그런 그녀는 내 말이 진실이길 원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맞아. 그때 이야기한 영화 디렉터 분이셔."

"저 잠시만 다녀와도 될까요?"

발을 동동 구르는 올리비아.

그녀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지만,

올리비아가 애슐리 씨와 함께 단체를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괜찮아. 대신 애슐리 씨에게 허락 받으면 보내줄게."

"단체 관리 때문에 그러시죠? 지금 다들 프레젠테이션에 관심이 가 있어서 괜찮을 거예요."

"일단 허락 받고와."

"알겠어요."

그렇게 2 층으로 올라간 올리비아.

그녀는 윗층에 보이는 애슐리 씨와 대화를 나누고는 기쁜 듯 1 층으로 내려왔다.

"허락받았어요!"

정말 기뻐보이는 올리비아.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일단 그녀를 진정시켰다.

"네가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단다."

"존 아저씨...저 이제 곧 학교 졸업하는데 너무 아이처럼 보시는 거 아니예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네가 너무 흥분한 상태인 건 너도 잘 알잖아."

"맞아요."

이성을 되찾은 올리비아.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날 바라보았다.

"준비됐어요."

"좋아. 같이 가자."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정말?"

빙긋 웃으며 혼자 그레이스 씨에게 다가간 올리비아.

그녀를 본 그레이스 씨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올리비아가 날 가리키며 말하니 반갑다는 듯 올리비아와 악수를 하셨다.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그레이스 씨.

그 앞에 있는 올리비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올리비아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에 미소가 걸렸다.

"뭘 그렇게 헤실헤실 웃는 거야?"

"제발 인기척 좀 내줄래?"

내 앞에 선 제임스.

그는 장난스럽게 날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못 느낀 네가 잘못한 게 아닐까?"

"...변명할 수가 없네."

거대한 덩치의 제임스.

그런 제임스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내 잘못이 컸다.

"그런데 왜 내려온 거야? 모두 프레젠테이션 중이라며?"

"내 파트는 끝났고 내 팀원들이 나 없이 자유롭게 말하며 결정하길 바라서야."

"무슨 말이야?"

"그들과 평등한 관계로 있고 싶지만 팀원들은 자연스럽게 상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거든."

장난스럽게 말하는 제임스.

하지만 그의 말은 진지한 이야기였다.

매니저의 직급을 달고 있는 제임스.

그렇기에 그는 팀원들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보면 볼수록 넌 매니저라는 직급이 잘 어울리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초반에는 엄청 깨지면서 배웠어. 그리고 나쁜 것도 많이 봤지."

"나쁜 것?"

"조직 생활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는 거."

덤덤히 말하는 제임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의 직장 생활이라곤 이 카페가 전부인데 이 카페에서 나의 상사는 할아버지 뿐이었다.

그래서 캐나다의 직장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한국의 경험으로 제임스의 말을 이해하자면 직무와 책임 그리고 더 얽히고 섥힌 것들의 이야기였다.

"절대라는 건..."

"맞아. 절대라는 건 없지. 그래서 조금씩 조직 문화를 바꿔나가고 있고 이것도 그것 중 하나야."

같은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제임스.

그는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이런 생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날 물끄러미 보는 제임스.

나는 장난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 뛰어난 리더 분은 음료 한 잔 안 필요하시나요?"

"아까 마신 프로틴 쉐이크 맛있더라. 어디 프로틴이야?"

"네가 추천하지 않은 브랜드."

"...진짜?"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의 제임스.

나는 그에게 프로틴 가루가 담긴 통을 보여 주었다.

"진짜네."

못 믿겠다는 표정의 제임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괜찮네. 다음에는 이걸로 사야겠다."

"그래서 음료는?"

"아, 미안. 이번에는 우유에 바나나 넣은 다음 프로틴 두 스쿱에 크레아틴 7g만 넣어 줘."

"크레아틴까지?"

"요새 펌핑 중이라 10g 정도는 먹는데 혹시라도 회의 중에 배탈날까 봐 7g만 먹으려고."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대충 근비대를 위한 영양제인 크레아틴.

체내 수분을 흡수해 운동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역할했다.

일반 카페에 헬창들을 위한 크레아틴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뭐야? 없어?"

"있긴 있어."

"거 봐."

애초에 제임스가 단골이다 보니 일반 카페가 아닌 우리 카페에는 있었다.

나는 제임스의 요청에 따라 음료를 만든 뒤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 이건 네가 사는 거지?"

"매니저도 빠듯하게 사네."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제임스는 머쓱하게 웃었다.

"나중에 내가 식사로 대접할게."

어제 제임스에게 들은 이야기.

아직 주급이 들어오지 않아서 빠듯하는 말이 기억이 났다.

"부담 가지지마. 너라면 언제나 공짜로 줄 테니까."

"정말이지?"

"..."

"장난이야."

그렇게 프로틴 쉐이크를 마시는 제임스.

그는 바에 걸터앉아 구석에 앉아 있는 올리비아와 그레이스 씨를 발견했다.

"올리비아가 안 보이더니 저기에 있었네."

"그녀가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을 만났거든."

"저 앞에 계신 엘프분 말이지? 나도 자주 봤어."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 카페의 단골인 그레이스 씨.

서로 통성명은 안 했지만 서로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응, 그레이스 씨라고 우리 카페 단골 중 한 명이야."

"유명하신 분이야?"

"응, 영화 감독이시지."

"영화 감독?"

바로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제임스.

나는 그의 표정이 꽤 재밌어 일부러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영화 '존 도' 라고 알아?"

"존 도? 세상에! 그 끝내주는 영화의 감독님이셨어?"

전혀 몰랐다는 듯한 제임스의 표정.

예전에 그레이스 씨가 미디어에 자주 나오지 않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기억났다.

제임스도 그들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이런 세상에..."

단숨에 그레이스 씨가 있는 테이블로 갈 것 같은 제임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 제임스."

"아, 미안. 너무 흥분했나?"

머쓱하게 웃는 제임스.

다행히 그는 자기 성급함을 인지하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너도 그 영화 본 거야?"

"물론이지. 우리는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우리 작품에 도움이 될 영감을 얻지."

"가끔은 네 다양한 모습 중에 애니메이터가 있다는 걸 종종 까먹게 돼."

헬 창에서부터 시작해 오타쿠 같은 모습,

매니저를 할 때의 책임감 넘치는 모습, 친구일 때 친근한 모습, 베일리 씨와 같이 있을 때의 닭살 돋는 모습등

너무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가끔 그가 애니메이터인 걸 잊게 되었다.

"내가 가진 매력이 많아서 말이야."

"...그 잘난 척하는 모습까지 더해서 말이야."

제임스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날 바라보았다.

"그게 내 매력 아니겠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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