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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 카페-60화 (60/292)

〈 60화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6)

* * *

물끄러미 핫초콜렛을 바라보는 타나야 씨.

그러고는 날 바라보셨다.

"따듯할 때 마시는 게 좋아요."

"알아요."

단호한 타나야 씨의 말.

하지만 그녀는 내게 답을 원했다.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요? 저는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다시 경찰로 돌아가야 해요. 제 동생들 앞에서는 언제나 의지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부모님 앞에서는 믿을 수 있는 딸이 되어야 한다구요."

"..."

"미안 해요. 존 씨. 제가 너무 ..."

"이해해요. 제가 타나야 씨가 아니니까요."

그녀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

가끔은 무책임한 말일 수 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따듯한 핫 초콜렛이 필요했다.

당신이 혼자 다 책임질 필요 없다.

당신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혹은 기다리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다 등등.

상대방의 입장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들.

이런 말보다는 그저 묵묵히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따듯한 음료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도 그걸 원했다.

위로.

그뿐이었다.

따듯한 핫초콜렛을 바라보는 타나야 씨.

내가 물끄러미 초콜렛을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모금 마셨다.

"달죠?"

"네, 맛있게 달달하네요. 포근하기도하고...뭐랄까..."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그러나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타나야 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셨다.

"제 어릴 때는 이런 걸 마시지 않았어요. 과일을 으깨서 즙을 먹거나 그냥 아무거나 먹었죠."

"타나야 씨도 넘어오신거죠?"

"맞아요. 제가 어릴때 넘어왔죠. 완전히 어릴 때는 아니지만...그곳의 기억보다는 여기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있어요. 5 년 동안 엄청 고생했거든요."

덤덤히 말하는 타나야 씨.

밴쿠버에 정착한 이 종족들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맨바닥부터 시작하는 삶.

이 종족과 이민자가 같다고 말할 수 없지만 나도 그렇게 시작했기에 조금이나마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을...가족을...포기할 수 없어요."

"이해해요. 그리고 라피 씨도 이해해 줄거구요."

"그래서 항상 그에게 고맙고도 미안 해요. 이런 저를 좋아해 주고 사랑해 줘서요."

밖에서 전화 받는 라피 씨.

우리가 바라보자 손을 흔들며 금방 들어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봤죠?"

"어디가도 찾기 힘든 일등 신랑감이신데요?"

"맞아요. 놓치면 분명히 평생 후회할 거 같아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타나야 씨.

그녀와 라피 씨의 관계는 그 어느 사람들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딸랑.

"많이 기다렸죠? 미안 해 타냐."

"아냐, 릭. 바쁜 거 알고 있어."

"내가 없는 사이 존 씨에게 내 흉을 본 거 아니지? 막 벌레 먹는다고 말이야."

벌레?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당황해 라피 씨를 바라보았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릭, 네가 방금 이야기한거뿐이야."

"정말로요. 처음 들어요."

"하하. 장난이예요. 존 씨랑 타냐 둘 다 울적해 보이길래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라피 씨.

그의 농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번에 울리는 건 타나야 씨의 전화.

이렇게 공교롭게 전화가 올지 몰랐다.

"레일리 씨네...미안 해요 존 씨. 잠시 라피랑 있어 줄래요?"

"물론이죠. 천천히 다녀오세요. "

그렇게 자리를 비운 타나야 씨.

방금 전 밖에 있었던 라피 씨와 자리가 바뀌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라피 씨.

그는 내게 진실을 요구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으시다면 타냐랑 무슨 이야기했는지 알려주실수 있나요?"

난감한 상황.

이걸 말해야 하나 싶었다.

밖에 타나야 씨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안 해요. 제가 남인데 라피 씨와 타나야 씨의 이야기에 끼어들어서요."

"괜찮아요. 저는 그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을 뿐이예요."

단호한 라피 씨의 말.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힘들 거 같아요."

"그러면 힌트만 주실수 있나요? 그녀가 정말로 저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예요."

"네?"

"그녀가 이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지만...어째서죠? 그러니까 제 말은..."

"아, 오해가 있나 보네요. 저는 그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예요. 저도 그녀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건 알고 있어요."

덤덤히 말하는 라피 씨.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 조차 잡히지 않았다.

"가족과 연인, 둘 다 가지고 가고 싶어 하는 걸 잘 알고 있어요."

"..."

"제가 조인족이라 생각이 짧았어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좋은 선택은 아니었죠."

"하지만...라피 씨도 타나야 씨를 걱정해서 하신 말이잖아요."

"저는...그녀가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더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많아질 거로 생각했어요."

그의 이어지는 이야기 속 타나야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뒤늦게 들어간 이 종족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얻어 전교 1 등으로 졸업을 했다.

이어서 사람들의 이 종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며 경찰학교에 들어갔고 당당히 성적 우수자로 졸업했다.

예전에 한 번 베일리 씨가 이야기한 한 마디.

그녀는 정말 유능하다는 말이 다시 생각이 났다.

"최근에 형법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구요. 그녀는 정말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그걸 바로 옆에서 바라봤구요."

라피 씨의 말.

그 말에 왜 그가 타나야 씨의 가족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조인족인 그의 눈에는 그녀의 가족이 그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시위 이후 괴로워할 때도 동생들을 등하교 시킨 것을 본 뒤 이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존 씨?"

"..."

창밖을 바라보는 라피 씨.

그의 눈에는 타나야 씨의 모습이 드리워 있었다.

"제가 이기적인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제가 악역을 자처해서라도 그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전 할 수 있어요."

그의 단호한 말투.

라피 씨의 처지에서는 이게 그녀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오지랖을 부려도 될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라피 씨와 결혼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녀의 가족도 포기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라피 씨.

나는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를 도와주는 건 어때요?"

"네?"

"오지랖 부려도 된다고 하셨으니 말해 보는 거예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도와 준다는 게 정확하게...?"

"그녀의 삶을 공유하길 원한다면 그녀의 부분도 이해해 주길 바라요."

"..."

"가족도 그녀의 일부분이예요. 라피 씨에게 강요하는 것같이 말해서 죄송하지만...그녀가 지금까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자기 정체성이자 의지할 장소.

이세계에 떨어진 고블린 가족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버텨 왔다.

모진 차별도,

경제적 어려움도.

이 모든 것을 함께 해온 가족들.

그런 가족은 타나야 씨에게 가족이라는 단어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자 그녀 그 자체였다.

"...제가 실수 했네요."

"미안 해요.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니예요.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어요. 그녀가 말하는 '가족'이란 의미를 말이예요."

타나야 씨를 바라보는 라피 씨.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웠다.

"겨울에 시간 있으세요?"

"겨울이요?"

"네, 타나야와 더 이야기해야겠지만 이번 겨울에 꼭 하고 싶어요."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흔쾌히 와주신다고 해주셔서요."

"물론이죠. 타나야 씨는 저희 카페의 은인이시기도하고...이제 라피 씨도 저희 카페의 단골이 될 거 같으시니까요."

"영업 잘하시는데요?"

장난스럽게 웃으시는 라피 씨.

나는 그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와서 부케 받아가세요."

"네?"

"파트너 분은 벌써 기대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예요."

"아..."

그녀와 나의 결혼.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딸랑.

다시 들리는 종소리.

타나야 씨가 전화를 끝내고 카페로 돌아오셨다.

"무슨 이야기하셨어요?"

"그건 내가 아까 말했던 거잖아. 타냐."

"나도 궁금해서 그래."

타나야 씨의 말.

그 말에 나는 라피 씨를 바라보았다.

"일단 앉아봐."

"무슨 말인데?"

"간단해. 존 씨를 초대했어."

"어디에?"

"우리의 결혼식에."

잠시 멈춘듯한 타나야 씨의 표정.

그녀의 표정은 기쁨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나...나는 아직...그러니까..."

"괜찮아."

타나야 씨의 손을 포근히 덮어 주는 라피 씨.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괘...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어."

"..."

갑자기 타나야 씨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

그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걱정하고 있었다.

가족도 연인도 포기할 수 없는 그녀.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 선택의 기로에 선 그녀를 이해해준 건 라피 씨.

그의 사려 깊은 행동에 타나야 씨는 그동안 쌓여 있던 고민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리 와 타냐."

"..."

말없이 라피 씨의 품에 들어간 타나야 씨.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보아.

그녀는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는 잠시 이들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었다.

"타나야 씨는 괜찮아요?"

애슐리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적이는 카페.

사람들에게 그사이에 있는 저 커플의 고민은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내게는 특별한 일이었다.

타나야 씨가 지인이라서라기보다는 그녀의 눈물이, 그 뜨거운 눈물이.

라피 씨의 깃털에 천천히 스며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와 사랑하는 일.

이렇게 누군가의 옷을 적시는, 그런 일이었다.

두 커플을 위한 티슈와 미지근 한 물.

둘의 감정을 진정시키기에는 부족할 수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다시 돌아간 테이블.

그곳에는 퉁퉁 부은 눈의 타나야 씨와 그런 타나야 씨를 다독이는 라피 씨가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들 앞에 물 두 잔과 티슈를 내려 두었다.

"고마워요. 존 씨."

"감사해요."

"아니예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라서요."

"오늘 저희에게 많은 걸 해주셨는 걸요?"

라피 씨의 말에 나는 손을 저으며 부인했다.

"존 씨 덕분이예요. 저희의 감사를 받아주세요."

타나야 씨의 감사.

나는 그 말에 머쓱해져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카페에서 울어서 어떻게 해?"

라피 씨의 장난 어린 말투.

그 말에 타나야 씨는 그를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네가 울렸잖아."

"내가 운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내 탓이다?"

장난스럽게 투닥거리는 두 분.

나는 이 사랑스러운 커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존 씨. 그러니까..."

"감사하다는 말씀은 그만하셔도 돼요. 타나야 씨는 저희 카페의 은인이시니까요."

"그래도 하고 싶은걸요. 존 씨는 언제나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사시 잖아요."

"하하...하..."

어색한 웃음.

애슐리 씨도 이런 말을 하더니 타나야 씨도 비슷한 말하실 줄은 몰랐다.

"그래서 존 씨의 조언이 언제나 고마워요. 주변 사람들의 그런 조언이 아닌 정말 저희를 생각해 주시는 조언이니까요."

"절 너무 치켜세워주시는데...그러시면 핫 초콜렛 서비스 한 잔 더 나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내가 장난스럽게 타나야 씨에게 말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너무 단 걸 많이 먹어서 이제 더 이상 힘들어요."

두 잔의 핫초콜렛.

하지만 타나야 씨는 자신 앞의 핫 초콜렛보다 자기 옆에 있는 라피 씨를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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