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풍잎 카페-54화 (54/292)

〈 54화 〉 늙은 공주와 라만차의 기사 (4)

* * *

조금 웃긴 상황.

모두가 할로윈도 아닌데 코스츔을 입고 한 자리에 모였다.

나름 역할도 나누어져 있는지 공주님 복장을 한 실리카 씨를 기준으로 각각의 역할이 나누어져 있었다.

실리카 씨의 옆에는 은박지 기사 프랭크 씨.

그리고 재상 같은 역할을 하고 계시는 제레미 씨.

그 주변으로 여러 관료들과 경비병들.

마지막으로 일반 시민들 역할까지 모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리 오거라."

"아...네."

나는 이 분위기에 휩쓸려 애슐리 씨와 함께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어느새 은박지로 만든 작은 티아라를 쓰고 게신 애슐리 씨.

그 옆으로 시종 역할을 하시고 계시는 한 분이 다가와 은박지로 만든 망토를 내게 걸쳐 주셨다.

조금 웃기는 상황이지만,

다들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고 심지어 애슐리 씨도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나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의 기사, 존은 내게 다가오라."

"네."

애슐리 씨와 실리카 씨 근처에 다가가자 그녀의 옆에 있는 프랭크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둘은 내게 축복받고자 했다. 맞는가?"

"네, 맞습니다. 공주님."

"네, 맞아요. 공주님."

나와 애슐리 씨의 망설임 없는 대답.

그 대답에 흡족한 듯 실리카 씨는 시종 역할을 하신 분에게 손 짓했다.

"내 펜던트를 가져오거라."

"예, 전하."

하겐닥즈 아이스크림 통이 다가왔고 그걸 엄숙하게 열자 그 안에는 새빨간 루비가 박힌 펜던트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통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목걸이.

이 목걸이는 예전에 실리카 씨가 목에 걸고 다니시던 것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맞다. 이건 유서 깊은 드워프 왕국의 펜던트. 이걸 끼고 있는 자는 축복을 받게 되지."

"하...하지만 이건...실리카 씨...아니 공주님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이잖아요."

이세계에 떨어진 공주님.

그 공주님이 그녀의 세계를 기억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이제 이것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바래진 펜던트.

그녀의 상처 많은 삶을 대신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너희의 것이다. 나는...내 기사가 있으니 더 이상 필요가 없구나."

"...실리카 공주님..."

이제 과거보다는 현재의 소중함에 더 신경 쓰겠다는 그녀의 말.

나는 그녀의 말에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프랭크 씨.

그의 곁을 지키겠다는 실리카 씨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미 지나간 그녀의 화려한 삶.

하지만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가장 환하게 웃으며 자기 사랑인 기사, 프랭크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상 아래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프랭크 씨.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영광스러운 날입니다...공주님."

"울지 말아요. 나의 기사."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

이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이 순간에 공감해주고 있었다.

마음으로 연결된 사람들.

그들은 실리카 공주님과 라만차의 기사 프랭크 씨의 사람들이었다.

"자...이리 와서 받도록 하거라."

펜던트를 들고 계신 실리카 씨.

그걸 본 애슐리 씨는 나와 실리카 씨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실리카 씨의 결정을 따르는 것뿐.

애슐리 씨가 용기 낼 수 있게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애슐리 씨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 실리카 씨 앞에 섰다.

그녀의 목에 걸리는 화려한 루비 펜던트.

살짝 일렁이는 기운이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처럼 보였지만,

진실은 실리카 씨만 알 뿐이었다.

"그대는 평생 존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네."

"그대는 자기 기사이자 평생 함께할 파트너를 서로 믿고 의지할 것인가?"

"네."

"그대들은...우리의 왕국을 기억하겠는가?"

"...물론이에요."

밴쿠버에서 가장 소외되고 잊혀진 사람들.

이 사람들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실리카 씨와 프랭크 씨.

이들의 삶에 있어서 나와 애슐리 씨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리카 씨와 프랭크 씨는 애슐리 씨에게 펜던트를 주며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고 하셨다.

마치...

벽화에 영원히 남아 있는 그녀의 왕국과 프랭크 씨의 풍차처럼 말이다.

애슐리 씨의 얼굴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

그걸 본 실리카 씨는 애써 애슐리 씨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존, 나의 또 다른 기사. 이리로 오거라."

"네, 공주님."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가장 높은 존재.

나는 그녀의 부름에 그녀의 앞에 섰다.

"너는 평생 동안 너의 파트너를 지킬 용맹한 기사가 될 것을 맹세할 수 있느냐?"

"네."

"서로 의지하며 다툼 없이 영원할 것을 맹세하겠느냐?"

"네."

"너는...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할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

"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겠습니다."

"...좋다."

실리카 씨의 질문들.

이 질문들이 끝나자 실리카 씨는 그녀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나, 사라키르라 에스펠 델 레베스카는 기사, 존과 그 기사의 파트너, 애슐리에게 축복을 내리겠노라."

"와!"

"실리카 공주님!"

"만세!"

이곳저곳에서 뿌려지는 종이 조각들.

언제 준비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분들의 화려한 축하에 감사를 드릴 뿐이었다.

작은 결혼식 같은 느낌.

나는 미소 지으며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고,

애슐리 씨는 그런 나를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봐 주셨다.

* * *

"휴우...이제는 더 못 마셔요..."

"그 정도 주량으로 너의 공주님을 어떻게 지키려고? 하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프랭크 씨.

나는 오랜만에 그에게 붙잡혀 술을 진탕 마시고 있었다.

작은 결혼식 같은 이벤트가 끝나고 이어진 파티.

모두 코스츔을 입은 상태로 신나는 노래에 맞춰 파티를 즐겼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 하는 나와 애슐리 씨.

실리카 씨는 애슐리 씨와 함께 어디로 사라졌고,

나는 이렇게 프랭크 씨에게 잡혀 술을 마시게 되었다.

"어떤가! 내 자랑인 아과르디엔테의 맛은?"

"으...너무 독해요."

"하하하. 그 맛에 먹는 거지!"

내 모습을 안줏거리 삼아 술을 마시는 프랭크 씨.

나는 그에게 지지 않기 위해 그의 건배를 받아 한 잔 더 마셨다.

"이 술이...정확하게 뭐라고 하셨죠?"

점점 꼬이기 시작하는 혀.

그래서 서서히 프랭크 씨가 둘로 보이기 시작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가 말한 두 개의 영혼처럼,

내 눈에는 프랭크 씨의 모습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두 개가 보였다.

"아과르디엔테! 증류주지. 코르도바에서 생산되는 녀석인데 도수가 30 도 정도 라네."

"30 % 나요...?"

"그래! 보드카보다는 약한 녀석이지만 취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지."

기쁜 듯 말하는 프랭크 씨.

그의 말처럼 보드카보다는 낮지만 특유의 코코넛 향과 달짝지근한 맛 때문에 주는 대로 마셨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

그나마 다행인 건 차를 끌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자네, 춤 출 줄 아나?"

흥이 오르시는 지 어깨를 들썩이는 프랭크 씨.

그는 스페인에서 오신 분 답게 흥을 즐길 줄 아시는 분이었다.

"출 줄은 모르지만 박자에 맞출 수는 있어요."

"기사의 덕목은 언제나 춤과 노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이지."

"네?"

"그런 의미에서 춤을 추자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사의 덕목.

하지만 술에 취해 저항조차할 수 없는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무대 위에 올라갔다.

환호와 박수.

무대 위에 프랭크 씨와 내가 올라오자 모두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자, 잘 보게!"

허리에 손을 올리고 손을 들어 올리는 프랭크 씨.

그가 선보이는 춤은 너무나도 유명한 춤인 판당고였다.

원래는 남녀 짝을 이루어 춰야 하는 스페인 전통춤.

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혼자서 무대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캐스터네츠처럼 박자를 맞춰가는 그의 손뼉.

그 손뼉에 맞춰 같이 호응해주는 사람들.

그 속에서 프랭크 씨는 그의 또 다른 이름,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대범하면서도 거칠게.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하게.

그의 판당고 속에는 그의 삶이 깊에 녹아들어 있었다.

후회와 고뇌.

한때는 그의 과거에 집어먹혀질 뻔한 불운의 기사.

하지만 그는 이 무대 위에서 가장 화려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자...이제 자네 차례일세!"

날 가리키는 프랭크 씨.

내가 그의 화려하면서 노련한 춤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바로 옆에서 추는 그의 춤을 보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엉성하지만 비슷한 모양새가 나왔다.

그걸 본 사람들은 놀랍다는 듯 크게 호응해 주었다.

알콜에 젖어 든 몸.

그 덕분에 프랭크 씨의 춤을 따라 할 수 있었다.

"과연 기사의 덕목을 갖춘 자로다!"

연극처럼 과장되게 웃는 프랭크 씨의 웃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가 원하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춤에 빠져 있는데 눈에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르겠지만 화려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애슐리 씨.

그 옆에는 공주시절 입었을 법한 드레스를 입은 실리카 씨가 같이 서 있었다.

애슐리 씨가 입은 드레스는 목이 드러난 화려한 드레스.

실리카 씨에게 받은 루비 펜던트가 정말 잘 어울렸다.

내가 춤추는 걸 실리카 씨와 바라보는 애슐리 씨.

나는 그녀에게 취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프랭크 씨의 춤에 맞춰 더 빠르게 춤을 추었다.

드디어 끝난 노래.

이어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에서 들었던 노래, 볼레로.

이 노래는 사실 춤을 위한 노래였다.

유명한 스페인 볼레로.

이 춤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프랭크 씨는 빙긋 웃고는 먼저 시범을 보여주셨다.

프랭크 씨가 손을 내밀자 천천히 다가오는 실리카 씨.

그녀와 호흡을 맞추는 프랭크 씨는 천천히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조금 에로틱하면서도 알 수 없는 고양감을 주는 춤.

둘은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 그 미묘함 속에 유영하는 존재들 같았다.

기사처럼 가슴을 활짝 피고 걷는 프랭크 씨.

그 주변을 맴도는 실리카 씨.

화려한 꽃처럼 펼쳐지는 치마와 간결한 프랭크 씨의 움직임에 감탄이 나왔다.

시범을 보인 프랭크 씨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들어 올린채 내게 다가왔다.

마치 내 차례라는 듯 말하는 듯한 느낌.

나는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조심스럽게 애슐리 씨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이에 호응하는 애슐리 씨.

둘은 실리카 씨와 프랭크 씨에 비하면 엉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볼레로를 추기 시작했다.

어려운 춤.

하지만 그 속에서 실리카 씨와 프랭크 씨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느낄 수 있었다.

중간중간 파트너의 도움이 필요한순간들.

그리고 완전히 가까워지는 순간부터 멀어지는 순간까지.

내가 술에 취해 감성적으로 변한 것일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이 연인의 삶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이 춤을 통해 프랭크 씨와 실리카 씨는 우리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주시고 계셨다.

그들이 실수 했던 것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축복해주셨다.

춤이 끝난 뒤.

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달아오른 몸.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거친 숨결까지.

내 맞은편에 있는 애슐리 씨는 단연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존 씨."

"애슐리 씨."

나는 술기운을 빌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내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실리카 씨의 왕국에 울려 퍼지는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

마치, 모두가 바라는 동화의 마지막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를 즐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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