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시위 (5)
* * *
그렇게 한 통 속이 된 그레이스 씨와 경찰 분들.
세 분 다 우리 카페의 단골이라는 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다보니 친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영화 존 도의 감독님이 이 카페의 단골일 줄은 몰랐어요."
신원불명의 존재를 뜻하는 존 도.
가상의 인물로 언급되는 사람인 존 도를 여러 곳에서 차용하게 되면서 생긴 단어였다.
한국어로 생각해 보면 김 아무개 씨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베일리 씨.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녀는 그레이스 씨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레이스 씨를 바로 못 알아본 거죠?"
애슐리 씨의 단순한 질문.
그 질문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그레이스 씨였다.
"간단해. 내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거든."
덤덤히 말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그녀의 작품이 객관적으로 판단되길 바라는 느낌이었다.
"영화계 쪽에서는 내 얼굴이 잘 알려져서 소용이 없지만 말이야."
"그레이스 씨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성공했는데도 그레이스 씨가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신기해요."
타나야 씨.
그녀도 그레이스 씨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저를 숨긴 건 이유가 있었어요. 대중들에게 상업 영화로써 성공했지만 작품성도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그렇군요..."
상업성과 예술성.
둘 다 챙기고 싶어 했던 그레이스 씨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
비평가들이 흔히 말하는 비평 중 하나인 예술병.
비단, 영화 감독 뿐만 아니라 창작에 관련된 사람들의 딜레마였다.
자기 자아를 그림에 담아 예술성을 원하면 예술병이 걸렸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예술성을 지향하던 사람이 상업성을 지향하면 돈에 물들었다고 욕을 먹었다.
이 두 개의 선을 지키기에는 어려웠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업성이 있어야 했고,
반대로 명작으로 남기 위해서는 예술성이 있어야 했다.
물론 둘 다 그 끝에 다다른다면 서로 연결되긴 했다.
예술성이 정말 뛰어난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었고,
반대로 상업성이 뛰어난 영화는 어떤 면에서 예술성을 인정받곤 했다.
그레이스 씨가 영화계에 몸담은 건 5 년.
그런 그녀의 작품이 명작에 반열에 오르기까지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나저나 너랑 애슐리는 내 영화 안 본 거야?"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그러고 보니 우리 둘 다 그녀의 영화를 따로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하하... 제가 좀 취향이 올드해서..."
"실망이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레이스 씨.
그 말에 맞장구를 치듯 베일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도 꽤 유명하다고 들었는데요?"
"한국에서요?"
"영화 시장이 4 번째로 큰 나라니까."
덤덤히 말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영화 감독 답게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아..."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우리나라 영화 산업의 규모.
나름 영화 규모로는 세계 4 위권인 우리나라.
1 위는 당연히 중국이고 2 위가 미국, 3 위가 일본 그리고 4 위가 한국이었다.
2020 년도 영화시장 규모를 소개한 칼럼에서 말한 것이니 지금은 어느 나라가 큰 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도망자라고 알려져 있을 거야. 이름을 로컬라이징 하기로 했거든."
"아...도망자....네? 도망자요?"
들어 본 적이 있는 영화.
한국 포털 사이트 기사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작품이었다.
8 주간 1 위를 한 외국 영화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 영화의 감독이 그레이스 씨인 줄은 몰랐다.
"그런데...감독 이름은..."
"내 본명으로 했어."
탈레드리엘.
그게 그녀의 본명이었다.
"아...그렇군요."
이제서야 알게 된 그녀의 본명.
이걸 들으니 한국에서 말했던 감독 이름에 대한 논란이 조금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이 종족이 없는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
그러다 보니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감독보다는 영화 제목과 내용에 더 집중해서 소개한 느낌이 강했다.
"도망자라면...한국 자막이 있는 거로 본 적이 있어요. 애슐리 씨는 아직 보지 못 했을 거구요."
애슐리 씨를 만나기 전에 봤던 영화.
그래서 그녀는 아직 영화 감독, 탈레드리엘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애슐리 씨와 볼 영화가 하나 더 늘어나 기분이 좋았다.
"아, 그렇구나. 그러면 이해해줄게."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경관 님들도 이 카페의 단골이신거죠?"
"네, 저는 제 파트너의 추천으로 자주 오게 되었구요. 이쪽은..."
베일리 씨가 가리킨 곳에 있는 타나야 씨.
그녀는 살짝 웃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베일리 씨의 추천으로 왔어요. 순찰을 돌면서 이 카페를 자주 보았는데 베일리 씨 덕분에 여기에 올 수 있었죠."
"두 분다 제게 중요한 고객분들이시죠."
"맞아요, 도움도 많이 받았구요."
맞장구 치는 애슐리 씨.
나와 애슐리 씨는 두 경관님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하하. 저희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고개를 갸웃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핫 초콜렛 드리면서 말씀해 드린 이야기 기억하세요?"
"아...그때 그 경관님들이...?"
"맞아요. 저희예요."
빙긋 웃는 타나야 씨와 베일리 씨.
그레이스 씨는 이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왜 이곳을 지키러 오셨는지 알겠네요."
"그렇죠. 저희에게도 소중한 공간이니까요."
모든 사람의 추억이 담겨 있는 카페.
그렇다 보니 나와 애슐리 씨와의 중요한 추억이 깃든 곳이면서,
어느새 타나야 씨와 베일리 씨 그리고 그레이스 씨에게도 중요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시위대가 카페 바로 앞을 지나가니 걱정이 되더라구요."
덤덤히 말하는 베일리 씨.
그녀의 배려심 넘치는 말에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 참 그런데 제임스는 괜찮아요?"
"제임스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다행히 회사측에서 오늘은 재택근무를 허락했거든요."
제임스가 일하는 애니메이션 회사.
유명한 회사들의 하청을 받는 인지도 있는 회사였다.
그런 제임스의 회사는 시위대의 행진로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자칫 잘못하면 해코지를 당할 수 있는 상황.
다행히 회사측에서 직원 보호를 위해 재택근무를 선택했다.
"죄송한데 파트너 분의 추천으로 이 카페에 오셨다고 하셨는데 파트너 분이...?"
그레이스 씨의 질문.
그 질문에 베일리 씨는 흔쾌히 대답하셨다.
"오크예요. 여기에 있는 존 씨의 친구이기도 하면서 제 파트너이죠.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처음 알았어요."
"제임스도 이 카페에 자주 오니까 나중에 오면 소개해 드릴게요."
내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씨.
이 카페에서 자주 마주칠 제임스를 그녀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사람 좋은 오크, 제임스.
그레이스 씨와 금방 친해질 거로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니까 좋네요."
"대화가 필요하면 이 카페가 적격이죠. 친절한 애슐리 씨도 있고 상냥한 존 씨도 있으니까요."
타나야 씨의 칭찬.
그 칭찬에 나는 감사를 표했다.
"좋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애슐리 씨의 감사의 말.
타나야 씨는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진심이예요. 베일리 씨와 근무하면서 많은 카페를 다녀봤는데 이곳만큼 편안한 곳이 없었거든요."
고블린 경찰인 타나야 씨.
그녀의 말 못 할 고충이 느껴졌다.
"이건 타나야의 말이 맞아요. 제가 이 카페에 가자고 하면 타나야가 정말 기뻐하거든요."
"베일리 씨... 그건 비밀로 해주시기로 했잖아요."
"여기서는 숨길 필요 없어. 타나야."
"맞아요. 여기서는 숨길 필요가 없죠."
어느새 그들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씨.
그녀의 말처럼 그레이스 씨도 이곳에서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세상이 이 카페 같았으면 좋겠어요."
베일리 씨의 말.
그 말에 모두 대답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람과 이 종족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레이스 씨가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던 공간.
내 카페라는 생각 이전에 모두의 카페, 모두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정적을 깬 건 베일리 씨.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부터 한 남성분이 카페 안을 살피고 있던데 아시는 분인가요?"
"네?"
그 말에 밖을 바라보자 바로 알 수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흔드는 남성분.
그러고는 손짓으로 날 부르셨다.
"미안 해요. 잠시 여기 좀 맡아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다녀오세요. 존 씨."
애슐리 씨에게 손님들을 잠시 맡기고 밖으로 향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랭크 씨.
홈리스 분들이 모여 있는 장소의 대표 같은 역할을 하셔서 봉사활동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이 카페의 전 주인인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몇 안되는 분들 중 한 분이셨다.
"프랭크 씨. 오랜만이예요. 카페로 들어오시지 그러셨어요."
백발에 주름진 얼굴.
고된 길거리 생활에도 나를 보고 활짝 웃어 주시는 분이었다.
"잘 지냈나? 나 같은 길거리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좀 그래서 말일세..."
말을 흐리는 프랭크 씨.
그는 헤진 모자와 넝마가된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예요.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언제든지 오셔도 된다구요."
"그래도 자네랑 이 카페 전 주인 한테 받은 게 많아서 말이야."
"오랜만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 잔하시고 가세요."
"아니야.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만 말하고 가려고 해."
내 제안을 완곡히 거부하시는 프랭크 씨.
그는 결연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걱정되어서 말이야."
"네?"
"자네 카페 말이야. 시위대가 혹시라도 무슨 짓하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왔지."
프랭크 씨의 진심 어린 걱정.
그의 걱정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카페를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사할 다름이예요."
"우리 같은 노숙자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마는...그래도 최소한 받은 건 돌려 주려하려 한다네."
덤덤히 말하는 프랭크 씨.
그가 가리킨 곳에는 그와 봉사활동에서 만났던 분들이 함께 있었다.
다들 카페를 지키려 오신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카페가 걱정되어 이곳까지 오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들어와서따듯한 커피 한 잔씩하고 가세요."
"안에 손님들도 있지 않나? 우리도 최소한 그 정도는 알고 있다네."
"안에 계신분들도 이해해 주실거예요."
"자네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러다가 단골들 다 잃어버릴걸세. 노숙자들이 다니는 카페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게 대수인가요. 이렇게 걱정돼서 와주신 분들에게 따듯한 음료라도 드리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욕할지도 몰라요."
"하하. 그 양반이라면 그렇지."
너스레를 떠는 프랭크 씨.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카페 안에 들어가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안에는 안 들어가."
"프랭크 씨."
"대신 커피는 받아가지."
빙긋 웃는 프랭크 씨.
나는 그의 고집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대신 음료랑 샌드위치도 받아가셔야 해요? 알겠죠?"
"어이쿠? 요즘 돈 많이 버나보네?"
"여러분들 샌드위치 값 정도는 법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을 텐데?"
장난스럽게 말하는 프랭크 씨.
나는 그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모두 오늘 저녁 것까지 챙겨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하하하. 재밌는 친구로구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만들어 올 테니까요."
그렇게 돌아온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분들은...?"
"예전에 봉사활동 때 만났던 분들이예요."
"아..."
예전에 애슐리 씨에게 이야기한 봉사활동 이야기.
그걸 기억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카페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오셨다고 하셨어요. 카페로 들어오라 했는데 완곡히 거부하시더라구요."
"우리는 괜찮은데..."
"들어오셔도 되는데."
오히려 미안 함을 드러내시는 베일리 씨와 타나야 씨 그리고 그레이스 씨.
이분들이 잘못한 것은 없지만 오히려 미안 해하는 것 같아 내가 죄송했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대신 음료랑 샌드위치를 드리려구요."
바로 이해한 애슐리 씨.
그녀는 날 바라보았다.
"어떤 걸 도와 드리면 될까요?"
"보온통에 커피를 담아주세요. 저는 샌드위치를 준비할게요."
"세 통 정도면 될까요?"
"네 통 정도 부탁할게요."
바로 음료를 준비하는 애슐리 씨.
그걸 본 베일리 씨와 타나야 씨 그리고 그레이스 씨가 날 바라보았다.
"저희가 도울게 있을까요?"
"괜찮아요. 손님들에게 부탁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친구로서는요?"
타나야 씨의 갑작스러운 말.
그 말에 그레이스 씨와 베일리 씨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로서는 언제든지 환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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