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풍잎 카페-42화 (42/292)

〈 42화 〉 시위 (4)

* * *

잠깐의 슬픔.

그레이스 씨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휴우...어렵네."

"괜찮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

그저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다.

"응...괜찮아. 못 볼걸 보여줬네."

나지막이 말하는 그녀.

그녀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습을 숨겨 온 그녀.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자기 약점이자 치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가장 나약하고,

본질적인 자기 모습을 말이다.

사람이나 이 종족이나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에서 허무한 기분을 갖는다.

위로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넌 괜찮다고 듣고 싶어 한다.

나 또한 그러했고,

이 종족인 그레이스 씨도 그러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싸구려 동정이나 위로라도 자기 편이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살았던 우거진 엘프의 숲이 아닌,

매연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의 증오와 분노가 스산하게 깔려 있는 이 빌딩의 숲에서 말이다.

"...볼썽 사납지?"

"스스로 깎아내리지 않으셔도 돼요."

"왜? 이렇게라도 날 비난하지 않으면 안될 거 같아서 말이야."

"그 모습도 그레이스 씨 잖아요."

무너지는 그레이스 씨의 모습은 사실 내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내게도 내 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말이다.

"그래. 이것도 내 모습이지. 이렇게 나랑 이 모습을 따로 분리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네..."

평소에는 냉소적이었던 그레이스 씨.

그런 그녀의 내면에는 그녀의 처지에서 본 '이세계'인 밴쿠버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한 가면이었다.

"...단 거 한 잔만 더 줄래?"

"가장 단 것으로 준비해 드릴게요."

바로 움직이는 애슐리 씨.

그녀는 그레이스 씨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슐리 씨는 그 누구보다 그레이스 씨를 위로하는 것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다.

"화장 많이 번졌어?"

늘 짙은 화장을 하고 다닌 그녀.

눈물 범벅된 그녀의 얼굴 속 원래 얼굴은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엘프의 모습이었다.

살짝 벗겨진 그녀의 가면.

그 속에서는 연약한 엘프가 살고 있었다.

"네. 하지만 지금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자꾸 내게 틈을 보이려고 하지 마. 솔직히 지금도 애슐리가 부러워 죽겠으니까."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 씨라면 인기가 많을 거 같은데 안 그런가요?"

"물론 인기야 많지. 다들 날 어떻게든 자기 침대로 끌고 가려는 발정 난 놈들이 대다수지만."

"하하..."

그녀의 날카로운 한 마디.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나와 생각을 공유할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지 몸을 섞을 사람을 찾는 건 아니야. 그런 건 널리고 널렸지."

"사람이라 하시면..."

"뭐,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나 이 종족 가리지 않아.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것들이거든. 아 참, 성별도 가리지 않고."

덤덤히 말하는 그녀.

그녀는 텅 빈 가슴을 채워 넣기 위해 온갖 것들을 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 발버둥 치듯이 말이다.

"그치만...이렇게 운 건 처음이네."

"5 년만이죠?"

"맞아. 이 세상에 떨어진 뒤에는 이런 걸 숨기려고 했거든."

"왜 그랬어요?"

"모르겠어. 자기방어기제 중 하나였겠지. 숲속을 뛰어다닐 줄만 알았던 촌년이 뭘 알았겠어."

"지금은 아니시잖아요."

"맞아. 근데 이게 전부야. 난 모든 걸 잃었고 이것만 남았어. 이거라도 지키려고 하는 최후의 발악이지."

냉소적으로밖을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들이 저렇게 절박하듯...나도 절박했거든."

"누구나 절박할 수밖에 없죠."

캐나다의 이민자.

자리를 잡지 못하면 언제든지 비자가 만료되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녀도 이 엉성하고 부실한 삶의 투쟁에 있어서 누구보다 절박했다.

"핫 초콜렛 나왔습니다."

"아, 고마워. 마침 따듯한 게 먹고 싶었어."

한 껏 속을 풀어낸 그녀.

이제는 속을 덥히기 위해 따듯한 음료를 찾았다.

"저번에 만든 핫 초콜렛이랑 완전히 똑같은데요?"

일 전에 테네시 사건 때 내가 만든 핫 초콜렛.

그것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비슷한 음료가 그레이스 씨 앞에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애슐리 씨의 습득 능력.

나도 모르게 뿌듯하게 느껴졌다.

"헤헤...그때 많이 봐두었거든요."

"둘이 무슨 이야기하는 거야?"

"미안 해요. 그레이스 씨. 예전에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테네시 사건.

이걸 자세히 말해도 되나 싶었는데 이미 다 말해 버리고 생각이 나서 늦은 상태였다.

"그렇구나. 잘됐네."

냉소적으로 말하는 그녀.

그녀는 그저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엘프들이 다들 이래. 이기적이고, 심술 많고, 자기 중심적이지."

"원래부터 그랬다고 하기에는 조금 전에는..."

"쳇...이제는 거짓말도 안 통하네."

테이블을 빙빙 도는 그녀의 검지 손가락.

아무래도 그녀는 이런 거짓말로 자신을 숨겨 온 것 같았다.

원래 매정한 사람 혹은 냉정한 사람인척하면서 말이다.

"조금 진부하고 오래된 이야기 같아서 말이야. 미안 해. 내 본업이 감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어."

조심스럽게 핫 초콜렛을 한 모금 마신 그녀.

그녀는 자기 말을 이어서 했다.

"대신, 따듯하네."

"그럴 줄 알았어요."

애슐리 씨의 한 마디.

그 말에 그레이스 씨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이야기 한 거 같지?"

"저희에게 그렇게 숨기시는 이유가 뭐예요?"

"이게 이제는 내 가면이 아니라 내 얼굴이 되어 버렸거든. 원래 성격은 뭐였는지 기억도 안나."

5 년의 시간.

엘프에게는 찰나의 순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모두의 시간은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은 인간이나 이 종족 모두 비슷했다.

"자 여기 음료값이랑 갑질한 대가."

100 달러 지폐.

그걸 내게 건네는 그레이스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 저렴하게 주시는 거 아니예요?"

"응?"

내가 이렇게 답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

나는 그레이스 씨를 바라보는 대신 애슐리 씨를 바라보았다.

"밴쿠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감독 님이랑 식사하는 정도는 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애슐리 씨?"

내가 윙크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애슐리 씨.

애슐리 씨는 장난스럽게 그레이스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존 씨의 말에 동의해요. 그레이스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와 애슐리 씨를 바라보는 그레이스 씨.

이렇게 행패를 부렸는데도 되려 식사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애슐리 씨가 비건 요리를 잘해요. 저도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구요."

"그리고 이 건물 바로 위라서 접근성도 좋구요."

애슐리 씨와 나의 초대.

그레이스 씨는 나와 애슐리 씨를 번갈아 보고는 아무 말도 안하셨다.

잠깐의 침묵.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유명한 감독이라 바쁜데 말이야. 특별히 시간을 내어 줄게."

"헤헤. 고마워요. 그레이스 씨."

기뻐하는 애슐리 씨.

그리고 나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찍 문을 닫고 감독 님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야겠죠?"

"그 말은 오늘 저녁 식사 초대를 말하는 거야?"

"맞아요. 보통 저희가 오후 5 시면 문을 닫는 데 오늘은... 점심시간만하고 일찍 닫아야겠어요."

내 손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는 이상 우리 가게의 주요 손님인 이 종족 분들이 더 오실 것 같지는 않았다.

가장 바쁜 점심시간만 하고 일찍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죠? 애슐리 씨?"

"그레이스 씨의 초대 때문이라면 전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애슐리 씨.

그녀의 동의도 얻었겠다 모든 게 완벽했다.

"...보기 좋네."

나지막이 말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구석에 있는 자리로 향하셨다.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나중에 불러."

"여기 계시는 게 어때요?"

"네 손님들 다 내쫓을 생각이야? 이렇게 화장이 다 벗겨진 엘프 얼굴 보여 봤자 뭐가 좋다고..."

"저희가 좋아요."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그레이스 씨.

그녀는 우리의 요청대로 카운터에 같이 있는 바 테이블에 있기로 했다.

"대신, 나 작업할 거야. 새로 배우를 찾아야 하거든."

"도와 드릴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빙긋 웃는 애슐리 씨.

그걸 본 그레이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그리고...고마워."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노트북 컴퓨터를 꺼낸 그녀.

자기 부끄러운 행동을 잊으려는 듯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도 그레이스 씨가 마신 음료의 컵을 닦으며 다시 업무로 돌아가려 했다.

딸랑.

"별일 없죠?"

"저희 왔어요."

"아, 베일리 씨, 타나야 씨."

경찰관인 베일리 씨와 타나야 씨.

두 분이 다시 우리 카페를 찾아주셨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늘 그렇듯 순찰이죠."

손가락으로 시위대를 가리키는 베일리 씨.

그녀는 테이블에 앉았다.

"미안 해요. 좀 앉을게요."

"괜찮아요."

살짝 비좁은 테이블.

베일리 씨 옆에 타나야 씨가 앉으려고 그레이스 씨에게 양해를 구했다.

"시위대 때문이신거죠?"

"맞아요. 갑작스러운 시위대지만 나름 경찰에 신고도 한 법적인 시위라서 저희가 이렇게 다 끌려왔지 뭐예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베일리 씨.

지친다는 듯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타나야 씨는..."

"저는 베일리 씨의 파트너니까요.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가야죠."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 타나야 씨.

그 말에 베일리 씨는 빙긋 웃으며 타나야 씨를 바라보았다.

"타나야 덕분에 든든하죠."

"아 참, 타나야 씨 저번에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잘해결되었어요."

감사를 표하는 애슐리 씨.

그녀는 타나야 씨가 건네준 명함으로 그녀의 과거의 흔적들을 무사히 지울 수 있었다.

불법적인 행위.

이런 부분에 있어서 강제성이 있었기 때문에 애슐리 씨는 사실혼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걸 법적으로 확실히 해준 타나야 씨.

아무래도 그때 만난 레일리 씨가 도와 준 것 같았다.

"아니예요. 제가 도울 수 있어서 좋았어요. 무엇보다 애슐리 씨와 존 씨 덕분에 그 골치 아픈 슬라임 강도들을 잡을 수 있었구요."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는 타나야 씨.

그녀의 배려넘치는 말에 어떻게든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두 분께 음료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건 제가 사는 걸로 할게요."

"현명한 선택이예요. 존 씨. 저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을 주신다는 건 저희가 이곳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타나야 씨.

그 말에 베일리 씨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다 설마...?"

"조금 속이 보이긴 하지만... 여기가 걱정돼서 왔어요."

베일리 씨의 친절한 설명.

두 분은 시위대 때문에 우리 카페가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하신 모양이었다.

"이건 비밀이예요? 아셨죠?"

"이미 여기에 다른 분이 듣고 계시는데요?"

내가 가리킨 곳에 있는 그레이스 씨.

그걸 본 베일리 씨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혹시 방금 전에 이야기 들으셨나요?"

그 말에 빙긋 웃는 그레이스 씨.

이미 다 듣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일에 집중하느라 전혀 듣지 못했어요. 무슨 말을 하셨죠? 경관님?"

한 통 속인 그들.

베일리 씨와 그레이스 씨는 나와 애슐리 씨를 보며 빙긋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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