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용의 불꽃 (4)
* * *
밴쿠버 시티홀 역.
오후 5 시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차량보다는 자전거나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밴쿠버.
그렇다 보니 퇴근 시각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자전거 도로를 차지한 자전거를 탄 오크들.
하늘을 수 놓은 조인족들과 드래곤들.
몸의 특성상 차를 타야하는 슬라임등.
이런 다양한 모습이 5 년전부터 밴쿠버에 스며들었다.
태평양 연안에만 열린 포탈.
5 년이 지나서 많은 이 종족들이 토론토나 몬트리올, 캘거리 같은 도시로 옮겨 가긴 했지만,
밴쿠버나 샌프란시스코 만큼 이 종족이 많은 도시는 손에 꼽았다.
구석에 보이는 외신들.
5 년이 지나도 이런 다양한 모습은 언론이나 미디어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여기야!"
손을 흔드는 레드 드래곤, 메간 씨.
그녀의 옆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우리를 보고 가려고 했다.
"그쪽 분은?"
"내 직장 동료. 슬라임인 바네사야."
"안녕하세요..."
슬라임 특유의 울리는 듯한 목소리.
그녀의 희끄무레한 느낌의 모습이 그녀가 슬라임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형상.
도심 생활에서 변신한 모습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 퇴근 길이면 저렇게 변하는 슬라임들이 많았다.
검은 머리카락, 구릿빛 피부.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에 빛나는 눈.
밴쿠버에 가장 많이 사는 인도아리아 계열인 펀자브 인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계셨다.
이쪽에서는 흔히 펀자비라 불렀다.
"안녕하세요. 저는 메간 씨의 지인 존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안녕하세요. 저는 애슐리라고 해요."
"네...안녕하세요."
떨리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메간 씨는 그런 그녀가 걱정되는 눈치였다.
"내일 봐. 바네사."
"네, 메간 씨도 내일 봐요."
지하철로 들어가는 그녀.
많이 지쳐 보였다.
"바네사 씨는 괜찮을까요?"
애슐리 씨의 걱정어린 질문.
메간 씨도 조금 걱정되는지 지하철로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메간 씨.
그녀는 오전에 패기 넘치는 말투와 달리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조금 걱정되긴 해. 오늘 엄청 깨졌거든."
"깨지다니..아... 일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개 수인이 그녀의 상사인데 실수 한 번한 거 가지고 엄청 늘어지더라고...누가 개 수인 아니랄까 봐."
툴툴대는 메간 씨.
이 종족들 사이에서도 이런 불화가 종종 생겼다.
도심 생활.
그 안에 있는 직장 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내가 조금 도와 줬는데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어."
"메간 씨가 도와주셨다구요?"
애슐리 씨의 질문.
메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마법을 걸어 주었어. 뭐, 간단한 마법이라 법을 어기는 일은 아니지만."
이 종족법에 의해 힘에 제약이 생긴 이 종족들.
인간들과 융화되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를 거부하는 이 종족들도 존재해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감옥이 만원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이 종족 법은 꽤 엄격해서 조심해야 해. 평생 감옥에서 썩는 수가 있으니까."
"메간 씨 정도면 부수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가능하지. 대신 평생 떠돌이로 살아야 하는 건 사양이야."
그녀가 인간 세계에 머무는 이유.
오전에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들이 좋아서였다.
"자, 이야기는 이쯤하고 옷을 사러 가볼까? 나도 스트레스 좀 받았거든."
"드래곤도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푸나요?"
"물론이지."
빙긋 웃는 메간 씨.
그녀의 등에 달린 날개와 꼬리만 아니면 드래곤인지 인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 참, 먼저 속옷 쇼핑부터 갈까?"
"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애슐리 씨.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메간 씨를 바라보았다.
"귀엽구나. 하하."
성공적으로 애슐리 씨를 놀렸다는 기쁨으로 가득한 메간 씨.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너와 단둘이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나를 살짝 바라보는 메간 씨.
애슐리 씨와 속옷 쇼핑하면서 단둘이 이야기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메간 씨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근처에 인디고 서점이 있으니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이동하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내 등에 타고 날아가겠느냐. 아니면 걸어서 가겠느냐?"
...
살면서 드래곤의 등에 타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을 만난 것도 5 년 전 이야기.
그런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받으니 조금 많이 난감했다.
"아뇨, 괜찮아요. 걸어가죠."
"뭐, 좋다."
"애슐리는?"
"저도 거...걸어갈게요."
"겁 많은 토끼로군. 좋다. 걸어서 가자꾸나."
의기양양하게 앞장서는 메간 씨.
그런 그녀의 뒤를 쫓았다.
북적이는 거리.
이쪽에서 서쪽으로 가면 한인마트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대학 광장과 랍슨 거리가 있다.
우리가 갈 곳은 빅토리아 비밀 속옷 가게.
유명한 브랜드다 보니 이곳저곳에 다 있지만 랍슨거리 근처에 있는 것이 조금 더 커서 그쪽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중.
메간 씨는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애슐리 씨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저쪽 크라페 집 맛있지."
"크라페가 뭐예요? 제가 아는 디저트는 케이크이랑 이런 것들 뿐이라..."
"이런...그렇게 맛있는 디저트를 모른다니...나중에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디저트 투어를 다녀야겠군."
여자들의 대화.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서 그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 종족들이 오기 전부터 많은 인종들이 섞여 살던 밴쿠버.
그렇다 보니 음식들이 엄청 다양했다.
가장 대중적인 인도 음식이나 중국음식.
이것들을 제외하고도 각국의 음식들이 이 많은 상점가들 사이에 존재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싸고 저렴한 비엣썸.
베트남 스타일의 샌드위치 가게인데 한인 마트 옆에 있어서 종종 사 먹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도중 속옷 가게 도착했다.
섹시한 속옷들을 입고 있는 마네킹들.
애슐리 씨는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메간 씨만 가시면 안 돼요?"
울 것 같은 그녀의 표정.
메간 씨는 그녀를 힘으로 끌어당겼다.
"저항하지 말고 들어가!"
"누가 저런 야한 속옷을 입어요!"
"내가 입는다! 왜! 보여 줄까?"
투닥거리는 애슐리 씨와 메간 씨.
나는 물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았다.
"존, 보기만 하지 말고 도와줘!"
불똥이 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도와드려요."
"남자들은 이런 속옷 좋아한다고 말하면 효과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게 통할 리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는 애슐리 씨.
그녀는 메간 씨의 말에 살짝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은 저런 속옷 좋아해요."
저항을 멈춘 애슐리 씨.
그녀는 순순히 메간 씨의 손에 이끌려 속옷 가게에 들어갔다.
내게 엄지를 날리는 메간 씨.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었다.
애슐리 씨가 설마 날 좋아하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녀는 이전의 '동거인' 들로 부터 안 좋은 기억이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 아픔을 더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혼자 착각해 그녀의 아픈 기억을 들출 수 있는 상황.
조심해야 했다.
"정신 차려라, 존. 넌 30 대 아저씨야."
스스로 되내이는 말.
그녀의 개인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20 초반이었다.
나와는 7 살 차이.
이어지기에는 무리었다.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다 잡고 서점으로 향했다.
2층에 별다방이 있는 서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점 중 하나였다.
원래는 진청이라는 옷가게 맞은편에도 있던 작은 서점.
그 서점은 사라지고 현재는 이 가게만이 오프라인 서점이었다.
커피 향과 책이 어울리는 공간.
내 개인적인 취미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으면 무언가 있어 보이는 그 느낌이 좋았다.
20 대나 30 대나 똑같은 상황.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이런 모습은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이런 '겉멋' 취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애초에 영어가 부족해서 어려운 책을 완독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어려웠다.
오랜만에 온 서점안.
빳빳한 새책 냄새와 새로 들어온 굿즈들로 가득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30 대 아저씨에 어울리지 않는 취향이라 말해도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내 지인이 있을 리가...
"어, 존 씨 아니세요?"
...젠장.
"아, 헤일리 씨?"
서점 직원 복장.
포니테일로 묶은 복장에 큰 안경.
수더분한 얼굴에 잘 보이지 않는 주근깨가 있는 그녀.
여기까지만 보면 일반인으로 볼 수 있지만,
그녀의 머리에는 염소의 뿔과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우리 카페의 단골 중 한 명.
서큐버스, 헤일리 씨였다.
"오랜만이예요.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저두요. 여기서 일하시는 거예요?"
"맞아요. 대학교생활하면서 알바할 만한 곳은 여기 뿐이더라구요."
BC주 대학으로 불리는 BCU,
그 대학교의 철학과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철학을 하는 서큐버스.
처음에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지만,
그녀와 친해진 뒤로는 왜 그녀가 철학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최근 카페에 안 오시길래 바쁘신 줄 알았어요."
"맞아요. 최근 엄청 바빴거든요. 실험도 있고... 랩도 있고...미팅에 레포트에..."
"저도 이곳에서 대학 생활해서 잘 알아요. 끔찍하죠."
레퍼런스를 첨부해야 하는 각종 작업들.
자료를 찾는 것부터 팀플레이를 해야 하는 것까지 너무나도 고된 일이었다.
"그래도 대부분 잘해결 되었어요. 곧 카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곳은 제2의 집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빙긋 웃는 그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정말 고맙네요. 아 참, 이번에 새로운 파트타이머가 들어왔어요."
"아, 이제 혼자서 안 하시는 군요?"
"맞아요. 매일 허리가 아팠는데 다행히 구했어요. 그녀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친근한 사람이예요. 헤일리 씨도 만나면 금방 친해질 거라 믿어요."
레드 드래곤인 메간 씨와 금방 친해진 애슐리 씨.
그녀라면 헤일리 씨와도 금방 친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네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건 언제나 좋죠.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나중에 카페에서 봬요."
"저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자신을 부르는 고객에게 다가가는 헤일리 씨.
매사에 열심히인 그녀를 보면 나까지 긍정적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되려나..."
혼잣말.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촉박한 시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좀 읽어보려 했는데 불가능할 것 같았다.
"책 몇 개만 사고 나가야겠다."
오랜만에 온 서점.
표지가 예쁜 책 몇 권을 구매할 생각으로 바꾸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최근 들어 표지가 예쁜 것을 많이 찾게 되었다.
카페 인테리어용으로도 사용하려는 목적.
집에는 책을 둘 만한 곳이 없어서 그런 식으로 이용했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은 대부분 E북을 이용하거나,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E북 사이트를 이용했다.
베스트셀러 코너.
예전에는 남들이 모르는 책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베스트셀러에서 고르게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책들.
사람들이 많이 읽는 다는 뜻이니 나도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드래곤들은 어떻게 인간 사회에 적응했을까?'
'이 종족 심리학'
'젊은 오크에게 미래를 선물하다.'
'인간과 이 종족'
크게 변하지 않은 베스트 셀러 목록.
최근 5 년간 이 종족 관련된 책들이 베스트 셀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종족 심리학은 궁금하네."
Buy Get One Get One Free 스티커가 붙여진 책.
절대로 하나사니까 하나더 주는 것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사는 거라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
"이건..."
내 눈을 사로잡은 책.
'토끼 귀 그녀과의 로맨스.'
나도 모르게 그 책을 내 장바구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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