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풍잎 카페-5화 (5/292)

〈 5화 〉 이민자의 도시 (4)

* * *

바쁜 시간이 지났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

12 시부터 2 시까지 밀려오는 손님들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손님들.

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커피와 음식들을 준비하는 것을 5 년 동안 해왔는데 이제 슬슬 한계점에 도달했다.

늙어 버린 몸.

한국에서는 판교의 등불이 되어 몸을 혹사 시켰는데 이곳에는 허리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인간용 우유와 초콜렛 같은 강한 당분에 알러지가 있는 수인들.

대부분 비건인 엘프들.

강한 단맛을 원하는 오크들.

은행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강한 카페인을 요구하는 드워프들.

평범한 맛을 좋아하는 고블린들.

거기에 극한의 오더로 날 고통받게 하는 사람들까지.

매일 같이 상대하고 있지만 늘 새로웠다.

기지개를 피는 날 바라본 그레이스 씨.

그녀는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마지막 오더 끝내줬지?"

"네, 오더가 너무 길어서 영수증 용지 대부분을 잡아먹었으니까요."

이종족들은 외형이 무섭지만 오더는 간단했다.

카페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들은 역시나 인간들이었다.

"파트타이머 하나 구하는 건 어때?"

"안 그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요. 구할까 생각 중이예요."

"이런 분위기 좋은 카페라면 금방 구할 거야."

무슨 일인지 따듯한 말을 건네는 그녀.

그녀 앞에 3 장의 사진만 따로 빠져 있는 걸 보면 그녀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신 것 같네요."

"맞아. 이 카페에서는 내 영감들이 마구 샘솟지. 정말 행복한 일이야."

번역기를 돌린 듯한 말투.

내 영어가 아직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영어가 아직 어설픈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들렸다.

"축하드려요. 음료라도 드릴까요?"

"좋아. 이번에도 비건용으로 부탁해. 단맛으로 말이야."

지금 생각난 건 카라멜 마끼아또.

단맛을 원하는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메뉴였다.

카라멜 시럽을 두 번 펌핑해 컵에 담아 놓고,

그 위로 따듯하게 덥힌 비건용 우유를 넣는다.

마지막으로 카라멜 드리즐로 마무리.

보통은 시나몬 가루로 마무리하지만 그녀는 시나몬 가루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 카라멜 마끼아또 나왔습니다."

"들고 이리로 와줄 수 있어?"

"서빙은 포함이 안된대요."

"우리 사이에 그런 말하는 거 아니야."

손짓해 날 부르는 그녀.

반테 안경을 쓴 그녀는 세 명의 프로필 사진을 내게 내밀었다.

"누가 느낌있어?"

"어떤 느낌이요?"

"딱 하면 부패한 경찰이다! 하는 느낌 말이야."

"부패한 경찰이라..."

캐나다에는 물총 쏘는 경찰이 있긴 하지만...

부패랑 좀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느와르 느낌이 나는 부패한 경찰을 살릴 수 있는 외형.

아무래도 강렬한 인상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리부리한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

수염과 곳곳에 있는 타투.

부패한 경찰이면서도 나중에 갱생할 듯한 느낌이 팍팍 났다.

내 시선이 그 남자에게 머무른 것을 본 그레이스 씨.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같은 생각이야."

"제 생각이 맞나요?"

1/3 확률.

운이 좋았다.

"응. 새로운 신입에게 감명받아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기 적당한 얼굴이지."

내 직감이 맞아서 다행이었다.

"느낌 좋은데? 원래 무슨 일 했어?"

"뭐... IT계열 쪽에서 일했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게임회사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날 그런 식으로 바라봤구나."

엘프에 대한 선입견.

아무래도 판교의 등불로 혹사 당했을 당시의 기억이 너무 선명한 게 문제였다.

"기분 나쁘셨으면 미안해요."

"아니야. 다른 쓰레기 같은 인간들보다는 훨씬 진솔하고 진정성 있어서 괜찮아."

"여기서는 그 단어가 아닌 거 같은데요."

"영어가 이상한 건 대충 넘어가."

대충 둘러대는 그녀.

아무래도 거짓말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럼 신입 역할로는 누가 좋을까?"

그녀가 새로 꺼내드는 세 명의 사진.

작은 사진이지만 너무나도 눈에 확들어 오는 사진에 당황했다.

오크, 드워프, 고블린.

모두 특색이 너무 강하다 보니 당황스러웠다.

늘 부랑자 역할을 맡던 오크들.

은행이나 깐깐한 장인 역할을 하던 드워프.

마지막으로 좀도둑이나 악역으로 나오는 고블린까지.

모두 사회적으로 안 좋은 시선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 영화로 그녀가 표현하고 싶은 것.

그것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사회에 찌들고 일에 치여 내가 생각하는 엘프와 많이 달랐지만,

그녀는 그 누구보다 이종족들을 챙기는 그런 존재였다.

"날 그렇게 보지 말아 줄래?"

"그레이스 씨가 착한 분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조용히 해. 난 순진무구한 엘프 순둥이들이 아니야!"

약간 컴플렉스가 있어 보이는 그녀.

그녀 답지 않게 화를 내고 말았다.

"...미안."

"아니에요. 이해해요."

영화계를 주름 잡은 엘프들.

그런데도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용해 먹기 좋은 종족임은 변하지 않았다.

Naive로 불리는 이들.

이제는 아에 엘프다운 결정이다라는 속어까지 만들어졌다.

"후우...요즘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말이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화를 낸 것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아무래도 정신과를 다시 다녀야겠어."

숲에 살던 엘프들.

이들은 그 어느 종족보다 현대적인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챙겨 온 약이 있으세요?"

"아, 언급해 줘서 고마워."

진정제를 꺼내는 그녀.

나는 물을 가져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이거 마시면 돼."

신경안정제를 먹고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는 그녀.

그러고는 크게 쉼호흡하더니 다시 날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하고 싶어."

"받아들일게요. 대신 약속 하나만 받을게요."

"약속?"

"다음에는 담배 펴도 되냐고 묻지 말아 주세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

이런 종류의 엘프들을 많이 보아왔다.

합법으로 흡연 가능한 대마초를 뛰어넘는 마약들.

코카인이나 암페타민 같은 마약을 복용해 길에서 좀비처럼 서 있는 이들도 종종 보았다.

밀집된 공간.

엘프들이 살기에는 가혹한 세상이었다.

담배와 전자담배로 불안증을 다스리는 그레이스 씨.

그녀 정도면 양반이라 할 수 있었다.

"다시 이야기에 집중할까요?"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시 쉼호흡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

나와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다른 쪽을 가리켰다.

"왜 고블린인데?"

"그러는 그레이스 씨는 왜 드워프인데요?"

"그거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잠시 멈추었다.

"네 이야기를 먼저 듣고 내 이야기할게."

"좋아요. 비전문가의 논리를 들어 보세요."

내 논리는 단순했다.

그 고블린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서는 절대적으로 아니다.

그리고 고블린 경찰이라는 설정이 신기해서도 아니다.

내가 많이 본 독립 영화에서 가장 많이 본 얼굴.

이 고블린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비굴한 부랑자 역할부터 우주 탐사하는 우주선의 선장까지.

그는 모든 역할에서 빛나는 감초 역할을 했고 작은 역할에도 그는 눈에 띄었다.

그뿐이었다.

내가 본 고블린.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 고블린을 보았을 것이다.

"...맞아. 너도 이 고블린을 아는 구나?"

"맞아요. 리오 극장에서 연극하는 것도 봤거든요."

"내가 로버트를 본 것도 연극을 할 때였지. 시민 극장에서 하는 걸 봤어."

"BCC 대학 앞에 있는 거 말이죠?"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레쥬메를 건네더군. 우리측 메이크업 담당자가 이쪽 일도 하는데 그를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나 봐."

과연 영화계는 좁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 중에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머뭇거리는 그녀.

아무래도 그가 고블린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휴우...나도 이종족인데 이런 편협한 시각에 빠져서야..."

내 눈에는 다 같은 이종족인 이들.

하지만 엘프의 눈에서 보는 고블린은 다른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와 비슷했다.

이종족도 그들의 눈으로 본 인간들은 다 똑같은 인간들이다.

"좋아. 조금 더 시간을 가져야겠어."

"좋은 선택이예요. 이제 곧 마감 시간이거든요."

3 시 30 분.

조금 일찍 마감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오늘 뼈저리게 느낀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날 도와줄 일손이 필요했다.

일찍 마감을 하고 마크 씨를 만나볼 생각이다.

아내 분에게 언제부터 도와주실수 있는지 직접 물어보기보다는 마크 씨를 통해서 말하는 게 나아 보였다.

마크 씨의 말로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인간의 생각으로는 출산 후 바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일찍 마감하네?"

"그렇죠. 일손을 좀 구해 보려구요."

"잘했어. 혼자서 고전? 이걸 어떻게 말하지?"

"고생한다구요?"

"맞아. 고생하는 건 한편으로 불쌍해 보였으니까."

짐을 정리하는 그레이스 씨.

그녀가 떨군 한 프로필 사진을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요."

"아 고마워. 엑스트라 사진을 흘렸나보네."

"엑스트라는 이종족으로 채우실 건가요?"

"뭐...솔직히 인간들을 구하고 싶은데. 인건비가 너무 높아서 말이야. 예산이 빠듯하거든."

비교적 인건비가 낮은 이종족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엑스트라들은 CG처리가 되거나 저렴한 이종족들로 채워졌다.

"혹시 엑스트라 면접 자리 하나 구해주실수 있나요?"

"왜? 너도 보려고? 환영이긴 한데 말이야."

흥미를 보이는 그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 오지랖이긴 한데 아는 연기자가 한 명 있어서요."

"인간이야?"

"네. 한 번 의사를 물어봐야겠지만요."

케인 씨.

그의 면접자리를 구해주는 건 한국인으로써의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의 꿈을 이어가게 해주고 싶었다.

"뭐 좋아. 자 여기."

그녀가 건네준 명함.

유니벌스 스튜디오.

그리고 디렉터라는 직함과 그녀의 이름.

마지막으로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중에 이쪽으로 연락줘. 개인번호니까 유출하지 말고. 밤에 외로울 때 연락해 줘도 돼."

"밤에는 연락 안할게요."

"눈치는 빠르다니까."

그녀는 숄더백을 매고 손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다시 텅 비어 버린 카페.

내일 아침을 위한 준비하면서 청소를 동시에 해야 했다.

"끄응...진짜 파트타이머를 구하야지 원..."

허리에 지속되는 통증.

오늘따라 더 심하게 느껴졌다.

설거지를 하고 재고를 정리하고 남은 케이크들을 랩으로 밀봉해 냉장고로 옮겼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당근 케이크.

토끼 수인들을 위해 항상 구매하는데 수요가 없었다.

"토끼 수인들은 당근을 싫어하나?"

이것도 어떻게 보면 종족차별일 수도 있었다.

덩그러니 남은 당근케이크.

오늘 저녁은 이걸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소용으로 쓰는 케이크 상자에 옮겨 담은 뒤 카운터에 올려 두었다.

버려야 하는 것들은 밖에 있는 수거용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한국과 달리 분리수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캐나다.

이런 부분에서는 나름 편했다.

물론 분리수거를 하는 주도 있겠지만 BC주에서는 100% 분리수거를 하지 않았다.

검은 봉지에 넣어서 버리면 된다.

양손에 두 개씩 둘린 쓰레기 봉지들.

낑낑거리며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 앞에 무언가 앉아 있었다.

메이드 복을 입은 토끼 귀를 한 수인.

머리에 달린 토끼 귀만 아니었다면 수인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저..."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토끼 수인.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