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사나이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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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건물.
요즘도 그렇고, 옛날에도 그렇고, 힙합 음악 뮤직비디오에서 자주나오는 건물은 ‘클라인’ 마을의 자랑이었다. 이곳은 클라인 마을 청년들의 축제 공터로 자주 애용되는 곳이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을 인원중 누군가를 축하하거나 위로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마을 청년들은 이곳에 모여 축제를 벌였다.
모닥불을 피우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시대가 지난 지금, 이런 구시대적인 축제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클라인 마을에서는 일상의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보배수였다.
어두운 저녁.
점점 깊어져가는 달빛 아래에서 오늘도 청년들은 그렇게 모였다.
“뭐야? 동양인이잖아?”
빌리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빌리를 둘러싼 흑색, 백색의 피부를 가진 수많은 청년들도 좋지 않은 눈으로 청색 모자를 쓴 동양인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낮에 뉴욕 시내에서 스트리트 뮤지션을 하는 것은 알고 있지? 그 때 장사가 안 될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야. 덕분에 할아버지 약값은 물론 식량도 풍족히 구입할 수 있었다고. 그러니까 너무 타박하지 말아줬으면 해.”
제인의 목소리.
마을의 귀염둥이인 제인이 싱긋 웃으며 말하는 데야, 마을 청년들이 더 이상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빌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동양인 청년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 웃고 있어. 허세가 아냐.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아주 담담한 표정인데… 마음에 들지 않아!’
빌리는 결코 이상성격의 소유자는 아니다.
오히려 화끈하고 화통한 성격, 그리고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마을 청년들에게 깊은 신뢰를 사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클라인 마을의 청년 대표는 빌리라고 누구나 입을 모을 만큼, 그의 인지도와 됨됨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문제라면 외지인이라는 것.
그것도 단순한 외지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이라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이봐. 무슨 배짱으로 이곳에 온건지 모르겠지만 조용히 있으라고. 알겠어? 조금이라도 나대거나 거슬리는 행동을 했다가는….”
그리고 빌리는 들고 있는 맥주캔을 꽉 움켜쥐었다.
- 콰자작!
“알지?”
처참하게 구겨진 맥주캔, 빌리는 그것을 동양인 청년에게 다가가 내밀어 보였다.
번들거리는 팔의 근육과 힘줄이 부셔진 창가로 틈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비춰져 반짝였다.
금발을 깔끔히 뒤로 넘긴 근육질의 빌리.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보는 사람이라는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만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의 나시 티와 갈색의 카고 바지의 이미지가 더해져 더욱 무서워보였지만 청년은 그저 말없이 웃고 있었다.
“…쳇.”
이런 스타일은 아무리 협박을 해도 먹히지 않는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아작을 내도 결코 굴하지 않을 스타일.
그것은 빌리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었지만 아쉽게도 동양인에게는 해당되지 못했다.
“자! 기름 부어! 파티를 시작하자고!”
"ok!"
빌리는 좌중을 향해 크게 외쳤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청년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쪽에 쌓아놨던 장작더미들을 공터의 가운데에 보기좋게 쌓아놓는 사람.
준비해온 기름통을 그 위에 붓는 사람.
어떤 사람은 준비해온 바비큐 꼬치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음료수 및, 과자와 맥주들을 골고루 분배했다.
‘흐음, 어찌보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축제 방식과 비슷하군. 원래 이런 건가?’
그 모습을 보며 청년은 조용히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아프리카에 갔었을 때, 만났던 원주민 부족들의 축제방식과 비슷했다.
그들도 그날 하루, 또는 며칠 동안 사냥했었던 육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불을 피워 전통음악을 하며 춤을 즐긴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의미중 가장 큰 맥락의 하나였다.
“이런 거 처음 봐?”
제인의 물음.
멀찍이 떨어져 청년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제인이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 뭐, 미국에서의 저런 축제는 처음 보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많이 봤었지.”
“아아… 아프리카도 갔었어?”
“응. 그곳 원주민들이 축제를 저런 식으로 하더군.”
청년은 제인에게 자신이 보았던 것들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현장 체험의 생생함이 담긴 설명은 제인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고, 일을 하고 있던 다른 남녀 청년들의 귀를 주목시켰다.
“와아~ 그곳 사람들 사납다고 하던데? 식인종도 있다면서?”
“뭐, 옛날에나 그랬지, 지금 식인종은 존재하지도 않아. 내가 못 만나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하하.”
“와~ 그럼 대부분 지역은 다 돌아다녀 본 거야?”
“응? 에이, 1년 동안 다니면 얼마나 다닌다고… 그냥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곳만 다녔어. 뭐, 그것만으로도 꽤 되겠네.”
“대단하다!”
어느 새 청년의 주위에는 여자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평소 외국에 관심 있었던 이들은 이것 저것을 물어보며 청년에게 관심을 표했다.
사실 타지인, 동양인들을 배척한다고는 했지만 빌리를 비롯한 남자들만 그랬다는 거지, 여자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연 여자들은 청년에게 더욱 더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연, 남자들의 시선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자! 지금부터 파티 시작한다! 파이어!”
“휘이이익!”
“타올라라!”
남자 청년들은 손에 든 횃불을 둥글게 쌓아둔 장작더미 위에 던졌고, 기름을 먹은 불은 시뻘건 혀를 낼름 거리며 매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음악 켜!”
쿠쿠쿵!
빌리의 외침.
그러자 청년들은 미리 설치해 놨던 미니 컴포를 플레이 시켰고, 강렬한 힙합 음악이 주변을 울리기 시작했다.
“먹고 마시자! 오늘은 즐거운 파티다!”
민대 머리에 다양한 힙합 스타일.
청년들은 인종에 구분없이 모두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 중에 마음이 맞는 몇몇 이들은 아예 팀을 짜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자신들의 열정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좋구나….’
비록 그들의 축제에 끼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청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옆에 있던 제인도 그들 무리에 참가해 열심히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헤이! 이리와봐! 혹시 춤 잘 춰?”
“응? 아, 아니, 그다지….”
갑작스러운 제인의 외침.
청년은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청년은 알고 있었다.
몇몇 여자들을 제외한 이곳의 모든 남자들이 자신을 크게 달가워하고 있지 않음을,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많이 쓰일 터였다. 일부러 이렇게 달빛과 모닥불이 비치지 않고 있는 것는 것도 저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비참하긴 했지만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 자~ 모두들, 이리로 끌어오자!”
“좋아!”
제인은 결코 그를 가만놔두지 않았다.
그녀도 눈치는 있었다.
왜 저 동양인 청년이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만 있는 다면 자신이 힘들게 이곳으로 데려온 의미가 없어진다.
‘가만 놔둘줄 알고? 절대 그렇겐 못하지!’
제인은 입맛을 다시며 악동끼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호감을 보였던 여자들을 선동하였다.
“어어~? 됐다니깐 그러네?”
“에이! 이리 와!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맞아~ 맞아!”
싫다고 손사래치는 청년.
그러나 이미 그녀들은 양쪽 팔을 붙잡고 등 뒤를 떠밀며 청년을 무리 속으로 끌어 당겼다.
“나 이거 참….”
청년은 당황스런 마음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신나게 춤을 추고 맥주를 마시던 모든 이들이 행동을 멈추고 있었다.
그들은 달갑지 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특히 빌리라 불리는 근육질의 거한은 인상을 일그러 뜨리고 있었다.
‘좋아! 아주 멋진 분위기야!’
이것은 제인이 너무도 바라는 바였다.
그녀는 항상 똑같은 분위기, 형태로만 흘러가는 파티가 지겨웠다.
항상 변화가 없는 축제.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형식.
그것을 과연 축제라 부를 수가 있을까?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할아버지의 말이 틀리지가 않다면 이 정도 위기야 거뜬히 흘러넘기겠지? 자! 뭔가를 보여줘 보라고!’
그녀는 눈이 반짝였다.
‘좋아! 그것으로 한번 해보자!’
분명히 가수라고 했겠다.
그러면 그것에도 자신이 있을 것이다.
“헤이 마이클!”
“왜 불러?”
그녀는 단체로 안무를 맞추던 무리 중 키가 가장 큰, 검은 색 모자를 쓴 흑인 청년을 불렀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춤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그랬지?”
“뭐, 힙합 관련이라면.”
“좋아! 그럼 한번 붙어보겠어?”
“… 뭐?”
“배틀말이야 배틀! 한번 떠 보라고!”
“… 허허.”
그는 기가막히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비로소 제인의 뜻을 알아들은 좌중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청년도 당황스런 마음에 제인을 내려다 보았다.
제인은 씨익 웃으며 청년에게 말했다.
“가수였다면서. 그러면 춤도 자신있을 거 아냐?”
“가, 가수도 가수 나름이지… 난 춤 전문이 아니었다고!”
“어허! 안 믿어~ 안 믿어! 뭐, 낮에는 잘만 나서더니 이번에는 겁을 먹은 건가? 참 소심하네. 남자 맞아?”
“… ….”
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에 공감이 가서가 아니라, 너무 기가막혀서 였다.
술렁이던 좌중은 점점 커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들뜨던 분위기는 급격히 사그러들었다.
그 분위기를 느낀 제인은 속으로 쾌제를 불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연주했을 때 나선 것도 솔직히 가소로워서, 한번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냐? 내가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보는 눈은 있다고! 솔직히 방금도 마이클들이 단체로 안무를 맞춰 춤추고 있을 때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잖아. 왜? 내 말이 틀려? 다들, 봤지?그렇지?”
“마, 맞아! 우리도 봤어!”
“분명 그런 눈이었어.”
“마이클은 가소롭다~!”
“멀대같은 게 휘적 휘적 춤은 잘추는 군! 이라고!”
“하하핫!”
제인은 자신과 행동을 같이 했었던 여자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고, 그녀들은 모두 장단을 맞추었다. 그게 익살스러웠던 탓일까? 굳어있던 분위기는 폭소의 물살을 타며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마이클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댔고, 하다못해 빌리 또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웃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아니었다.
‘… 이 지지배. 어쩜 그렇게 혜정이랑 성격이 똑같지? 남 이용해 먹으려는 거 하며… 하아, 짜증난다 짜증나.’
아리나의 리드 보컬 김혜정.
그녀에게 처음 화를 내었던 때가 떠오른다.
여의도 공원에서의 배틀.
프리덤과의 만남.
당시에야 많은 이들이 모인 장소에서 화를 냈을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운 추억이다. 그때도 이것과 상황이 약간 비슷했었다.
자신의 실력을 보기 위한 김혜정의 덫.
그 때 자신은 화를 내고 면박을 주며 혜정을 꾸짖었다.
그러나 그 후로 혜정은 자신의 일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물론 그 때의 화에 대해 서로 사과를 했음은 물론이다.
‘혜정이가 학교에서 내 옷을 붙잡으며 울었고… 그것 때문에 참 많은 오해를 샀었지. 인섭이 녀석과의 결투도… 후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따지고 보면 목이 트인 것도, 가수를 하게 된 것도 모두가 다 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 그때는 화를 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할까나….’
어느 새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던 짜증도 가라앉았다.
결국 이런 관계가 풀리게 되면 좋은 인연으로 남게 되는 법이다.
‘오 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이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재미있게 됐어.’
어느 새 눈빛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