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그때였다, 오메가의 눈부신 빛기둥이 향한 창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활짝 핀 존재가 지상으로 강림했다.
거대하고 신비로운 이 존재는 지상의 그 누구도 느끼지 못했다.
파앗!
뮬 공국의 왕궁상공에서 거대한 마나의 파동이 일었다.
쾌청한 날씨임에도 물방울이 온 수도를 적신다.
엘리자베스, 시모나, 레이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다 제 몸을 만지는 따뜻한 물의 기운을 쓰다듬는다.
‘나 다시 돌아왔어.’
환청 같은 속삭임이 세 여인의 마음속으로 찾아든다, 아주 깊은 곳까지.
주르르.
보석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 눈물이 세 여인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세 여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정원 입구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 통한의 피눈물을 흘리며 타 차원으로 떠났던 딕스가 서 있었다.
따뜻하고 환한 표정으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웠었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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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 햇살아래 딕스는 왕궁의 뜰에 나와 있었다.
아름다운 세 아내와 그녀들이 낳은 그의 2세들이 아장아장 이곳저곳을 모험심 많은 탐험가처럼 살펴보고 있었다.
딕스는 마법사였지만, 이전과 달리 그는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평행차원의 또 다른 자신에게 들어가 그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와 함께 보냈다.
시작의 오메가라는 선택받은 존재가 되었을 당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그 심정은 처참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하나 마지막 전투(역천의 주술사 바라모스)에서 그는 하나의 희망을 보았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몹시 설레는 기회였다.
딕스는 바라모스를, 예전 물의 그림자 마법사들을 흡수할 때처럼, 놈의 영혼을 모두 녹여 제 영혼에 흡수했다.
놈이 가진 강력한 영혼력은 수천 년의 제 삶만큼이나 깊고 강대하였다.
평행차원의 또 다른 자신과 합일(合一)을 이룬 순간에도 제 자신을 잃지 않은 이유가 바로 바라모스가 지닌 그 강대한 영혼력 덕분이었다.
또 다른 차원에서의 자신과 함께 딕스는 흡수한 바라모스의 영혼을 완전한 제 힘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수련했다.
물의 핵, 물의 오메가였던 딕스는 200년을 그 차원에서 또 다른 자신 속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희망을 꿈꾸며!
놀랍게도 또 다른 차원의 딕스는 그의 도움으로 궁극의 경지인 9서클의 경지를 이룩했다.
그는 공국에 불과했던 뮬을 제국의 반열에 우뚝 세웠으며, 딕스가 피눈물을 흘리며 이 세상에 남겨둔 엘리자베스, 시모나, 레이첼을 그곳에서 아내로 거두었다.
하나, 당혹스러운 점은 그 차원의 또 다른 자신이 마리아 데 란스에를 4번째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그녀는 이곳에서와 달리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지혜와 무예를 겸비한 여장부였다.
이쪽 차원과 저쪽 차원의 환경과 사람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하나 마리아만은 딕스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물의 핵으로 살던 딕스는 여기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딕스는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였다.
문제는 노력의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오로지 결과를 하늘에 맡겨야만 했다.
다행히 9서클에 오른 타 차원의 자신과 물의 핵으로 그의 내부에서나마 존재할 수 있었던 딕스는 교감을 하게 되었다.
그때, 타 차원의 딕스 나이 180세였다.
‘타 차원의 또 다른 나라고? 네가?’
‘그래, 내가 다른 차원의 너였다. 부탁이 있어.’
‘... 무슨?’
‘카로얀과 바라모스의 주술의 기술서가 필요하다. 난 너에게 기생하는 존재, 나의 의지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너는 이 세상에서 네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부탁이다, 날 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다오.’
마법의 궁극에 이르렀고, 제국의 초대 황제를 지내다 그 자리를 아들에게 양위했던 딕스는 자신의 남은 삶을 타 차원의 자신을 위해 쓰기로 하였다.
지상최강의 마법사!
지상최강의 부자!
이 모든 것이 타 차원의 딕스에게 붙어 다니던 수많은 수식어중 일부다.
그가 하고자하면 못할 게 없는 절대 권력자다.
‘당시 네가 날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들판의 잡초처럼 속절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내 남은 삶을. 널, 너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또 다른 나여...’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딕스의 상념에 간직된 기억이 그렇게 흐른다.
“여보, 뭘 그리 생각해요?”
엘리자베스 공주, 아니 뮬 왕국의 고귀한 여왕이 된 여인이 그를 깨운다.
여왕은 딕스의 팔로 제 목을 두르며 상체를 그의 품에 묻었다.
딕스는 자신의 기나긴 여정에 대해서 아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는 차원과 차원을 지키는 자들에게 발설하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계의 역사흐름에 관연하지 않는다는 맹세도 더불어 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세 아내의 목숨이 다 하는 날)이 끝나는 그날 그들과 함께 차원의 수호자가 되겠노라! 서약했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지.’
딕스는 엘리자베스의 따뜻한 기운과 제 아이들을 돌보는 두 아내를 둘러보며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이 왕국에서 저들을 사랑하며 함께하리라.
200년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살아왔던 딕스에게 가족은 세상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값진 존재였다.
하나 세상은 딕스의 이러한 바람을 들어주기에는 너무 위태로웠다.
저 남쪽, 내부의 혼란을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진정시키려는 카페니스 제국의 황제 때문이다.
국제정세는 지금 편 가르기를 하고 있었다.
북부동맹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후방의 왕국들이 걱정이 된 제국의 황제는 그들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언제 어느 때 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놀라울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
“쳇, 딴 여자 생각하는 거죠?”
“뭐?”
“전에 당신이 잠꼬대 하는 소릴 들었어요. 마리아는 대체 누구죠?”
이백년의 그 기억이 어찌 단 몇 년 만에 사라지겠는가.
딕스 본인이 겪은 것은 아니지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게 여자는 당신과 시모나, 레이첼뿐이라고. 사람을 어찌 보고!”
솔직히 타 차원에서 본 마리아는 레이첼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놀라운 미녀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 차원에서의 마리아는 삐뚤어진 성격의 못난이일 뿐이다.
“수상한데, 정말, 아니죠?”
“하늘에 맹세한다!”
우르릉.
쾅쾅!
화창한 날씨였다.
그랬던 날씨는 딕스가 맹세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시커메지더니 장대 같은 빗줄기를 세상에 퍼부었다.
하필, 맹세의 순간에...
“하, 하, 하. 비 오네.”
어색하게 웃음 짓는 딕스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새치름하다.
저 표정의 또 다른 이름은 의심이리라.
하나 증거가 없으니 더 이상 남편을 닦달할 수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애들의 건강을 위해 비를 피하기는 게.
“가긴 어딜 가, 옆에 있어.”
장대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는 딕스가 펼친 물의 장막에 의해 뜰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딕스의 현재 경지는 측정불가다.
재구성한 지금의 이 육신을 벗어던지는 날, 그는 신으로서의 운명을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물의 막이 비바람을 막아내는 모습에 딕스의 아이들은 신기한 듯 그 자리에서 방방 뜨며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한다.
“아빠, 아빠!”
“오 카샤르, 왜 그러느냐?”
엘리자베스의 눈을 피해 냉큼 아들을 안아든 딕스는 그 얼굴에 반가움을 크게 들어냈다.
“나두, 마법사 할래요. 시켜주세요. 네!”
마법사가 어찌 제 하고 싶다하여 되겠는가.
하나 카샤르는 이미 마법사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딕스는 아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마지막 오메가를 본다.
‘내 아들 잘 부탁한다. 친구.’
딕스의 말에 화답하는 걸까? 카샤르의 오메가 문장에서 황금의 신성한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카샤르.”
“응.”
“마법사는 부단한 수련이 필요하다. 그건 알지?”
카샤르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는 제 아버지처럼 강물도 움직이고, 지금처럼 빗줄기도 막아내는 놀라운 마법사가 빨리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늘 부단한 수련만 강조하였다.
아들의 실망하는 모습에 딕스는 잠시 고민한다.
‘3서클까지만... 만들어줄까?’
딕스는 아들의 완전 마력문장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카샤르에게 가르쳐주고, 물의 마나를 북돋아 준다면 3서클은 지금의 딕스에겐 일도 아니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분에 넘치는 힘을 갖게 될 시 아이가 교만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눈앞에서 그 작은 얼굴에 실망감을 내비치자 그 교육관이 여지없이 흔들린다.
아들 바보, 딕스는 자식들에겐 초콜릿 같은 아버지였다.
“음, 알았어. 아빠, 나 노력해서 아빠처럼 멋진 마법사가 될 거야!”
“안 돼, 그 전에 제왕 학부터 열심히 해!”
흐뭇한 얼굴로 부자의 모습을 보던 엘리자베스가 벌떡 일어나 카샤르에게 한소리 한다.
하나, 어린 카샤르는 국왕보다는 제 아버지처럼 마법사가 더 되고 싶었다.
마법사가 왕이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싫어요, 전 마법사가 될 거예요!”
어린 반항아는 제 어미를 향해 그리 빽 소리치며 아비의 품을 벗어나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엘리자베스가 카샤르를 쫓아가려하자 딕스가 급히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놔요! 저 녀석 당신이 오냐오냐 하니까...”
“엘리자베스.”
딕스의 부드러운 부름에 엘리자베스의 기세가 확 꺽인다.
딕스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귀에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카샤르 동생 만들러 가자.”
“이, 이이가.”
붉으래.
“싫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얼굴만 붉히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끌고 딕스는 날듯이 침실로 향했다.
남녀의 모습을 애들을 돌보던 시모나와 레이첼이 물끄러미 응시하다 이내 뜰에서 하나 둘 자취를 감춘다.
꿈처럼 행복한 일상, 하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전란의 바람은 곧 딕스의 이러한 평온한 나날을 깨부수었다.
대륙전쟁!
일찍이 딕스가 타 차원에서 보았던 그 전쟁이 벌어지려는 것이다.
하나 운명은 패자와 승자를 이미 결정지어놓은 상태였다.
노도의 딕스.
전격의 파울.
그리고... 삭풍의 아서.
10년 간 펼쳐질 대 전쟁의 서막은 그날 불온한 남풍과 함께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