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뼈가 깎여 나가는 고통과 참담한 겨우 억누르며 딕스는 치열하게 고민하였다.
어릴 때부터 온갖 고생을 해왔던 그에게 있어 세상은 이제야 살만한 세상으로 다가왔다.
인생의 재미나고 행복한 면을 알게 되었지만 운명은 그의 행복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들과 가족과 친구와 천문학적은 재산, 그리고 사회적 위치와 명에까지.
18살의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갖고 있었다.
하나, 그것이 일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딕스는 바라모스를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여 타협이란 전제를 깔아두었다.
한데 카로얀의 잔류사념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자신의 생각이 완벽하게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내내 사원에서 뜬눈으로 보낸 딕스는 드디어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로얀의 사념이 담겨 있었던 신비로운 수정구는 이제 평범한 돌덩이로 변해버렸다.
딕스는 슬펐다, 안타까웠다, 아팠다, 그리고 외로웠다.
자신의 운명을 수천 년 전에 제 멋대로 재단한 카로얀에게 참기 힘든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었다.
딕스에겐 바라모스보다 카로얀이 더 극악무도한 악당이었다.
세상이 망하든, 박살나든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인가! 라는 삐뚤어진 마음을 한때 먹기도 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외면하고 싶었다.
오히려 억울하고 분한마음에 바라모스가 흥하게 하고 싶었다.
카로얀을 제대로 물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모두를 깊은 불행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딕스는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격랑을 죽을힘을 다해 잠재웠다.
그러곤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효율적!
딕스가 좋아하는 그 단어처럼 그는 자신을 그렇게 내주기로 제 살을 씹으며 그렇게 결정 내렸다.
엘리자베스, 레이첼, 시모나를 더는 품에 안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볼 수도 없다.
먹먹함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피를 토하듯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우연이라도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순간 그녀들과의 제대로 된 작별을 하지 못한 게 원통하고, 분하고, 괴로웠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 슬프다는 말이 왜 나온 것인지 딕스는 이제야 그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이건 뼈가 시리는 아픔이다.
영원히 그 괴로움을 이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 한다니, 이건 끔찍한 저주였다.
모두를 지켜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겨우 결정을 내렸지만.
‘세월이... 세월이... 날 보듬어주었으면 좋겠구나.’
슬픔을 간직한 불멸자, 딕스는 그 길로 걸음을 내딛는다.
안녕, 내 사랑하는 사람들아.
딕스가 남긴 발자취에 깊게 새겨진 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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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쾅쾅쾅!
번개가 지상을 쉴 새 없이 폭격한다.
그러나 이는 파괴의 굉음이 아니라 만물을 보듬어 성장시키는 넘쳐나는 생명의 소리다.
거대한 물줄기를 뚫고 딕스는 사원을 뒤로하고 걸어 나왔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요하렌의 원주민들이 모두 몰려와 폭포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사제들처럼 엄숙했으며, 표정마다 간절함이 가득하였다.
문명은 진실을 가리고, 원시는 진실과 공존한다.
요하렌의 원주민들은 사원의 수호자이며, 인류의 지속을 위한 최후의 경비대라 보면 된다.
이제 수천 년을 내려온 그들의 업이 사라지고, 그들의 전설이 완성되어 자신들 앞에 현신하였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에 있어 딕스는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끔찍한 악당이었지만, 이곳 요하렌의 원주민들에게 지금의 딕스는 파멸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신령한 전사였다.
모두가 경건한 표정으로 딕스를 향해 경배한다.
딕스는 이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곧장 레이첼에게 걸어갔다.
“바라모스는 어디 있나?”
주변의 분위기는 레이첼마저 흥분에 빠트렸나보다.
딕스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여자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150킬로미터쯤 가면 바위산이 있어요. 그 중턱에...”
필요한 정보를 얻었으니 더 이상 들을 이야기도, 머물 이유도 사라졌다.
딕스는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그 짧은 순간 여자는 딕스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슬픔과 우울함이 가득한 참으로 공허한 눈빛이다.
여자는 딕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흠모와 추앙이 쏟아진다.
흥분으로 가슴이 격동 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오히려 설명할 길 없을 만큼 크게 슬퍼하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잘 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잘 못 봤겠지, 그럴 거야... 하지만 내가 왜 마음이 이러 짠하지.’
저벅저벅.
딕스가 걸어가는 길, 원주민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길을 비켜주며 그를 향해 온 마음을 다해 경배한다.
인파를 가르며 딕스는 그렇게 숲속으로 느릿느릿 그 모습을 감춘다.
이것이 인간이었던 그와 세상과의 마지막이었다.
전설의 완성을 본 사람들은 흥분하여 눈물을 흘렸고, 그들의 조상을 향해 기도를 올렸으며, 요하렌의 평화가 대대손손 이어지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날의 딕스는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설처럼 세상에 퍼져나갔다.
요하렌의 왕이 나오셨다, 그는 노도!
노도의 노자만 들어도 질겁하는 제국에 있어 노도의 소문은 큰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써 정복한 요하렌, 제국은 이 땅을 다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노도와의 충돌보단 그 지역을 버리는 게 그들 입장에선 훨씬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존재감하나로 제국을 굴복시킨 딕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한걸음, 한걸음 떼어질 때마다 더욱더 무거워질 뿐이다.
아니, 슬픔이다.
‘왜... 하필이면... 나지?’
정의감이 투철한 녀석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정의감이라곤 개뿔도 없는 자신에게 운명은 지나치게 영광스러운(?) 짐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예지몽에서 보았다.
어머니와 누나를 지키지 못해 무력하게 쓰러지는 그 통한의 아픔을, 아마 이를 몰랐다면 딕스는 자신을 희생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꿈속이었지만, 뼈가 깎여 나가는 듯 아팠고, 살이 찢기는 듯 참담한 슬픔을 맛보았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예지몽, 한때 이것이 자신이 만난 최고의 축복이라 그는 생각했었다.
한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자신의 선택을 강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보고 싶다.
엘리자베스, 시모나, 레이첼, 부모님과 형제들, 누나.
그리고 크고 작은 인연을 맺은 그 모든 사람들이 간절하게 떠오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모두를 만나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러한 외유가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딕스의 내부를 꽉 채운 힘, 이것이 인간인 그를 점점 정령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불멸... 참, 슬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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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바라모스의 영혼이 담겨진 수정이 흉흉한 적광을 뿌린다.
그의 타락한 영혼은 이 순간 흥분으로, 승리감으로 대취하여 몹시 들떠 있다.
한쪽에서 이를 클라우드가 바라본다.
클라우드의 내심엔 초조감이 쉴 새 없이 파도친다.
자유인으로 살지, 아니면 비참한 노예로 살 것인지 이제 그 결과가 판가름 나는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준비하겠습니다. 바라모스 님.”
‘영광의 순간은 나 홀로 맞이하겠다. 크하하하하-!’
바라모스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녀석은 카로얀의 안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지난 수천 년간 영혼전이를 하지 않고 축적한 그 힘이 얼마인가.
대륙을 찰나에 양단해버릴 거대한 힘을 갖고 패한다? 바라모스는 자신의 패배를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의 바라모스는 카로얀이 전성기의 힘을 갖고 들이닥쳐도 죽일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 이런 바라모스도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자신이 거할 그릇이 정령 화 되어가고 있음을 말이다.
타락한 영혼과 순수함의 상징인 정령.
두 존재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정령이 악의 그릇 따위가 될 리 없다.
바라모스가 딕스를 자신의 그릇으로 삼으려했다간, 도리어 딕스의 자양분이 되어버릴 것이다.
물의 그림자 마법사들이 이전에 그러했듯.
‘오라! 어서오너라! 나의 육신이여! 우하하하하하하-!’
우쭐한 승리자의 웃음을 뒤로한 채 대전에서 빠져나온 클라우드, 약간은 불안한 기색으로 그는 그곳에서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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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나무를 만지고, 그 줄기를 지나 풀을 만진다.
크고 작은 마찰음이 주변에 가득하다.
이 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온갖 곤충들이 노래한다.
모닥불 주변 반딧불이 들이 빛의 향연을 펼친다.
타닥타닥.
나뭇가지하나를 모닥불에 던지는 로브의 사내, 그는 딕스였다.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걸음으로 바라모스와의 결전장소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세상과 작별이라도 나누듯.
숲은 인간들에게 매우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지금의 딕스에겐 그 모든 것들이 자발적으로 친절과 배려를 베풀었다.
탈 인간의 경지.
자연의 관리자.
정령이 되어가는 딕스에게 자연의 일부인 숲은 더 이상 그의 적이 아니었다.
나무와 바람과 땅과 달과 별과 어둠이 그에게 속삭인다.
딕스는 그들의 음성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명 같았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뚜렷해졌다.
자연의 위로가 조금씩 그의 공허를 채워준다.
“네가 오메가인가?”
그리고 딕스가 받아들인 물의 오메가와도 대화가 가능해졌다.
‘딕스, 나의 유일한 친구. 넌 고귀한 일을 하는 거야. 알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하지만 유한한 모든 것들이 다 그렇듯 그들도 언젠가는 너를 떠나거나, 네가 그들을 떠나게 되어 있어. 자연의 엄정한 이치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어.’
“왜 나였지? 아니군. 내 혈통이 그렇다고 하니... 하지만 거부할 수 있었잖아. 처음에 넌 나를 알아보지 못했었어.”
‘나는 그때 온전하지 못했지. 힘과 정신에서... 하지만 너에게 거하면서 난 나의 힘과 정신을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었어. 이건 진심이야.’
이제 와서 녀석의 변명을 들어봐야 무엇 하겠는가.
지금의 그의 심정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화가 난다.”
‘미안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 먹고, 자고, 그들과 사랑하며 그렇게 늙어가고 싶었다. 아이도 갖고, 여행도 하고, 때론 그들과 싸우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난 많은 것을 정말 바라지 않았어. 그냥 아무 탈 없이 평범하게 살기만을 바랐을 뿐이야. 이게 지나친 욕심인가?”
감정이 복받친 딕스의 음성은 습기로 가득하다.
그의 슬픔을 느꼈음일까? 오메가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오메가는 딕스를 보듬어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을 먹었다.
숲에 떠도는 물의 기운을 불러 모은 오메가는 육체를 만들었다.
반투명한 물의 육신에 오메가가 깃든다.
딕스는 물의 육체를 가진 오메가를 보았다.
녀석이 저리 하듯 자신도 저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인간은 아니다.
이슬처럼 맑고 시냇물소리처럼 상쾌한 음성이 물의 육체서에 흘러나온다.
‘안아줘도 되니?’
“난 사내새끼한테 안기지 않아.”
역시, 딕스다운 대꾸다.
‘난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데. 그럼 괜찮지 않을까?’
“그게 더 싫다.”
딕스는 고개를 틀어버렸다.
그가 외면하자 오메가는 몹시 슬퍼했다.
오메가에게 딕스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에게 외면 받고, 또 단 하나뿐인 친구가 몹시 슬퍼하자 오메가도 가슴이 아팠다.
‘지금의 너와 다른 너에게 기회를 줄 수 있어. 네가 꿈에서 보았던 19살 너에게.’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가?”
‘딕스, 네가 예지몽이라 생각한 것은 다른 차원의 너였어. 엘프들이 사는 차원에 대해 너도 알거야. 이를 평행차원이라고 해. 딕스, 네가 원한다면 너를 그곳으로 보내줄 수는 있어. 하지만 거기서도 넌 여전히 정령일거야. 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겠지, 다른 차원의 너를 통해서. 이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야. 네가 원한다면...’
이러한 말을 해주는 오메가는 무척이나 슬퍼하였다.
단 하나뿐인 친구와 영영 작별해야하기 때문이다.
오메가는 자신의 말을 딕스가 거부해주길 바라면서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그와 함께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고, 우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비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였지만.
딕스는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오메가의 말처럼 그렇게라도.
‘그렇게라도 보고 싶어.’
주르르.
딕스는 울었다, 엉엉 울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자신의 막막한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그래서 참을 수 없었다.
“부탁한다, 오메가.”
‘그것이... 너의 뜻이라면, 시작의 오메가여.’
딕스 르 시리우스, 이제 그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시작의 오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