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딕스의 연인인 레이첼과 동명이인, 그 여자가 딕스를 바라보는 눈은 질려 있었다.
요하렌 지역 제일의 도시를 단 일인으로 반파시켜버렸다.
그것도 불과 2시간 남짓에 말이다.
도시의 치안대와 이곳을 찾은 외지의 능력 있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 맞섰다.
물론, 초반에 그랬다.
하나 그가 진짜 노도인 것을 그의 한수를 통해 깨닫자 겁먹은 양떼처럼 모조리 흩어져버렸다.
하긴 그의 가공할 능력을 보고 덤벼드는 것 가체가 기름단지를 들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다.
그렇게 홀로 도시를 반파한 뒤.
“요하렌 지역 소수부족민들에게 당신은 영웅이 되었군요.”
“길이나 가.”
딕스는 요하렌의 노예들을 모조리 풀어주었다.
모두가 그를 칭송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반대로 이들을 잡아들인 노예사냥꾼과 업자들은 혹독한 벌을 받아 평생 앉은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딕스는 왜 이들을 죽이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삶이 때론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칫, 알았어요. 숙녀의 말을 그리 매정하게 끊다니. 남자로서의 매력은 빵점이군요.”
“혓바닥을 잘라버리는 수가 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너의 길안내지, 그 혓바닥이 아니다. 여자.”
딕스의 음성에선 서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실제 제 말을 현실화시킬 그런 마음도 그에겐 있다.
이를 느꼈음일까?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던 여자도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앞장선다.
한참을 그렇게 이동하던 여자가 걸음을 멈추며 전방을 가리킨다.
“요하렌에서 풀려난 원주민들인가 보네요.”
여자가 여러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침묵하는 자의 숲으로 사람들이 속속 들어간다.
숲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 곳의 환경에 적응한 이들에게 숲이야 말로 아기의 요람 같은 곳이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자신의 자유를 구속할 자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무리의 몇몇 남자들이 딕스와 여자를 보게 되었다.
제국 인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하늘마저 뚫어버릴 지경이다.
스윽.
살심을 풀풀 날리며 남자들이 딕스와 여자를 향해 곧장 걸어온다.
주변에 이들 말고는 아무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구한 자들이 당신에게 칼끝을 겨누는군요.”
여자는 발랄하게 말한다.
딕스는 여자의 주둥이를 박살내는 일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아니면, 치아를 왕창 박살내는 것도 괜찮다.
배가 부르니 힘이 남아 쓸데없는 말을 붙일 테니 말이다.
여자는 모르리라.
“제국 놈들 꼼짝 마라!”
누더기 같은 상의를 입은 남자가 남녀에게 소리쳤다.
밖으로 드러난 남자의 피부는 채찍자국과 흉터와 멍으로 가득했다.
이 남자뿐만이 아니다, 다른 자들 역시 이 남자와 비슷한 상처를 제 몸에 갖고 있었다.
이들의 뒤로 여자와 아이들이 적개심을 활할 태우며 버티고 있다.
거친 환경에서 자라난 자들답게 여자나, 아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적어도 이들이 발산하는 기세만큼은 맹수의 그것과 같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감히 어머니의 숲에 발을 디디려 하다니!”
“뼈와 살을 발라 숲의 청소부들에게 던집시다.”
남자들이 딕스와 여자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물론 그네들의 결정이고.
여자가 딕스의 뒤로 빠진다.
“당신이 한 일이에요. 그러니 안내자인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봐요.”
여자가 딕스를 향해 말하며 싱긋 웃는다.
남자들은 여자인 레이첼보단 남자인 딕스에게 더 큰 원한이 있어 보인다.
딕스는 몹시 귀찮은 표정으로 내려뜨렸던 팔을 흉부높이로 들었다.
이를 공격으로 오해한 남자들이 각자의 조악한 무기로 그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명도 딕스를 공격하지 못했다.
딕스의 손끝에 어린 물 덩이를 봤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게 물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물 덩이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노도의 상징.
“헉!”
“다, 당신은...”
“은인이십니까?”
딕스를 향해 쇄도하던 증오와 살심은 이 순간 눈녹듯 사라진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절망뿐이던 이들에게 희망을 준 이가 바로 그인 것을.
제국은 그를 마인 노도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하지만 적어도 요하렌의 원주민들에게 그는 구원자이자, 영웅이다.
털썩.
모두가 딕스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자존심이 강하여 결코 굴복을 모르는 요하렌의 원주민들이다.
이런 그들에게서 이러한 예를 받은 이는 이방인으로선 딕스가 처음이리라.
몸과 마음을 다한 원주민들의 인사가 딕스를 향해 물밀 듯 밀려온다.
이들의 진심에 대한 딕스의 답례는.
“꺼져라.”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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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콰콰콰콰.
땅을 부술 듯 아래로 내리꽂히는 거대한 물줄기.
새하얀 물방울이 사방을 안개처럼 덮고 있다.
세상의 모든 천둥이 여기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 소리도 웅후하다.
충만한 물의 기운.
운명의 사원이라 불리는 건축물은 놀랍게도 이 폭포수 뒤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기로 가야해요.”
여자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린다.
딕스는 여자를 힐끗 본 뒤 주저 없이 좁고 미끄러운 길을 향해 걸어 나간다.
그가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자 그의 정면에 깔려 있던 짙은 물방은 왕을 영접하는 충성스러운 백성들처럼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폭포가 만든 무수한 무지개가 꽃비처럼 그를 감싸며 신비로운 모습을 연출하였다.
여자는 그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들을 쫓아온 많은 수의 원주민들 역시 그녀와 심정이 다르지 않았다.
운명의 사원, 이곳은 침묵하는 자의 숲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겐 신앙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니 딕스를 위해 길을 터주는 안개와 무지개의 그 모습은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원주민들이 무릎을 꿇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을 향한 영혼의 기도 같았다.
그 기도가 힘을 발휘함일까? 거대한 폭포 뒤에 숨어 있던 운명의 사원에서 황금빛이 폭발하듯 일어나 딕스를 휘감았다.
마치 오랫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몹시 반갑게.
딕스를 이곳까지 안내한 여자의 눈이 커진다.
이건 이 여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여, 역시... 클라우드 님의 말씀이 맞았구나. 그가 그의 대적자였어! 운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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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딕스가 찾은 운명의 사원은 그 누구도 반기지 않던 곳으로, 이 땅에 사는 원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낸 클라우드 역시 갖은 노력을 다했음에도 끝내 거부당했다.
그렇게 수천 년을 폭포 뒤에 숨어 그 존재를 감추며, 외부인을 철저히 배척했던 사원.
그 사원이 처음으로 굳건한 그 문을 활짝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아니, 오랫동안 기다려온 주인을 맞는 듯하였다.
사원의 내부는 암반을 깎아 만든 구조로 무척이나 투박했다.
반들반들한 그 내부는 3개의 큰 방과 연결 된 ‘Y’ 모양의 길이 있었다.
방 하나하나를 살피며 들어간 딕스는 앞서 2개의 방에선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 번째 방 앞에 도착한 딕스는 이전의 방과 달리 석벽으로 된 문을 보게 되었다.
손잡이도 없는 이 문은 미닫이인지, 여닫이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벽과도 같은 문.
하지만 사원의 구조를 봤을 때 이곳엔 틀림없이 방이 있어야 했다.
한참동안딕스는 문을 살폈다.
그때, 오랫동안 쌓인 먼지로 인해 매몰된 홈을 찾을 수 있었다.
‘손바닥 모양의 홈이네?’
문의 좌측 하단의 홈은 예니 곱 살 된 어린아이가 앞으로 팔을 쭉 뻗으면 될 닿을 수 있는 높이에 위치해 있다.
이 사원을 저택한 자들이 전설의 소인 족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이 절로 들었다.
딕스는 몸을 낮춰 손바닥 모양의 홈을 살폈다.
그러곤 제 손과 홈을 비교했다.
“크기가 다른데.”
느낌에 이 홈이 문을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제 손과 홈을 비교하니 이건 맞지 앉은 열쇠였다.
그래도 모를 일, 딕스는 홈에 제 손을 대어보았다.
딕스의 손이 손바닥 모양의 홈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이래서야 문이 열릴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곧 그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결정하고 손을 떼려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손바닥이 갑자기 서늘해지면서 장심에서 무언가가 밖으로 배출되는 느낌을 받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했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황해하는 사이 문전체가 신비로운 푸른빛을 발산하더니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끔뻑끔뻑.
당황하여 두 눈만 여러 차례 깜빡이던 딕스는 제 손을 살펴보았다.
“이상은 없는데. 좀 전의 그건 무엇 때문이었지?”
꺼림칙한 표정으로 일어선 딕스는 방안 쪽을 밖에서 살펴보았다.
앞서의 경험이 다른 두 방처럼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문턱바깥쪽에서 살펴본 내부는 앞서 그가 본 방과 구조가 비슷했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방 중앙의 삼각형 모양의 거치대와 그 위쪽의 붉은색 수정구하나가 달랑 놓여 있다는 것뿐이다.
딕스는 문턱을 넘어섰다.
잔뜩 긴장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지만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잠시 사방을 경계하던 딕스는 곧 방 중앙의 삼각거치대로 곧장 걸어갔다.
매의 눈이 된 딕스는 붉은색 수정구를 찬찬히 살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없었다.
특이한 구석은 오히려 손모양의 그 홈이 있던 그 문이 더 특이했다.
그러나 아직 모를 일.
‘만져볼까?’
앞서의 경험 때문에 딕스는 수정구를 만지는 일에 주저했다.
그래도 별탈이 없던 경험이 있어 곧 그는 용기를 냈다.
수정구는 지름 20센티미터로 한 손으로 다 덮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표면도 매끄러워 보여 한손으로 들려했다간 반드시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든다는 생각보단 만져본다는 개념으로 딕스는 손을 댔다.
한데!
딕스의 의식이 붉은색 수정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온갖 빛 덩이로 가득했다.
그 빛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제 감정을 들어내며 땅과 하늘의 경계가 없는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귀한자여!’
사방에서 울리듯 하나의 목소리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온다.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딕스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이리저리 시선을 던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의 시선에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있는지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물의 척후를 풀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곳에선 물의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무방비!
이 단어가 딕스를 경직되게 한다.
“누구냐?”
‘나는 운명의 주술사 카로얀,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오메가여!’
“카로얀? 당신이!”
딕스는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수천 년 전에 사라진 주술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당시 최고 주술사와 만나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딕스다, 카로얀이여!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생명의 오메가여, 고귀한 물의 정령이여, 그대와 나의 만남이 곧 그날이 다가왔음을 일터.’
카로얀은 딕스의 말을 아예 귀담아 듣지도 않는듯했다.
없는 취급한다.
제 3자, 딕스는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꼭 그러한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카로얀은 누구와 대화를 한단 말인가.
딕스의 의문은 미궁에 떨어져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몹시 영특한 청년이다.
카로얀이 언급한 오메가, 그 오메가를 딕스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물의 오메가가 아닐까? 라고 추측했다.
마법사로 밥 먹은 지 몇 해던가, 이제 그는 알고 있다.
자신과 합일한 물의 오메가 핵에 대해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요정 족의 신물...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고귀한 물의 정령이여. 어찌!’
카로얀의 음성에는 선명한 당혹감이 담겨 한참을 윙윙거렸다.
딕스는 의문이 크게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입은 닫고, 귀만 활짝 열어두었다.
한참동안 카로얀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기다렸던 그의 음성이 온갖 빛 덩이로 가득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흘러나왔다.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인간이여.’
소외받던 이웃에서 조명 받는 주연으로 급부상한 딕스.
“나에게 말한 겁니까?”
‘그렇다 인간이여. 그대는 아주 훌륭한 친구를 두었구나. 그대, 고귀한 물의 정령으로부터 사랑받는 자여. 그대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너에겐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삶과 다른 하나는 정령으로서의 삶이다. 바라모스와의 전쟁에 앞서 너는 반드시, 이 두 가지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과 정령의 삶이라니?”
당혹한 딕스의 목소리에 카로얀은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바라모스와의 전투에서 필승하고자하면 딕스 본인이 인간이 아닌 정령의 삶을 택하는 것이고, 운이 따라줘야 할 아슬아슬한 전투는 그가 인간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카로얀이 딕스에게 설명한 요지였다.
한마디로 압도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딕스 본인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내가 인간의 삶을 선택하면 어찌 됩니까? 바라모스가 이긴다면?”
‘바라모스가 바라는 세상은 영이 없는 세계. 사멸이 만연한 세상이다.’
지배가 아닌 파멸을 원한다, 바라모스의 뜻이 이것이라면 딕스의 승패가 세상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딕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살만하다 싶었는데.
바라모스와의 협상은 카로얀의 설명으로 불가능한 것을 딕스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세계의 지속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도.
“왜 하필... 나인가?”
딕스가 혼잣말처럼 반문한다.
그러자 카로얀이 그 반문에 답을 내려주었다.
‘그대의 혈통이 고귀한 오메가의 유일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릇, 그릇 망할 그릇!
딕스의 내심에서 욕이 폭설처럼 내린다.
자신은 인간인데 왜 다들 그릇 타령을 할까, 분노가 치미는 딕스다.
인간으로 살 것인가, 정령으로 살 것인가.
인생최대의 난제에 딕스는 봉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