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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전기-184화 (184/194)

184화

제대로 된 대응한번 못하고 꺾인 자존심이 수치심으로 뼈에 아로새겨진다.

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는 그때의 그 굴욕감이 살을 저미는 듯하다.

그림자 마법사 로키의 최근 심정이 바로 이러했다.

그의 마음속은 딕스를 향한 시퍼런 복수의 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딕스에게서 받았던 강렬함 때문이다.

덤비면 죽는다!

단순 명확한 이 결론이 로키를 두려움에 빠트려 주저하게 만든다.

으드득.

술을 진탕 마셔도 마음에 박힌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는다.

술김에 딕스의 집으로 찾아가 개미새끼 한 마리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 버리려했다.

실제로 깊은 밤 찾아가기도 했지만 그 높은 담장을 보자 술기운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발길을 돌렸다.

지독한 패배감.

‘내 반드시 네 놈을 씹어 먹고야 말겠다! 반드시!’

똑똑.

“로킨 님.”

자신을 찾는 소리에 로키는 금으로 만든 술잔을 와락 우그러뜨리며 못을 박듯 탁자를 탕 친다.

“들어와.”

잔뜩 굳은 얼굴로 한 사내가 들어온다.

최근 상관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얼마 전엔 그의 수청을 들던 여인 둘이 멘트하나 잘 못 날려 목숨을 잃었다.

단순하게 죽인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녀들은 생선포처럼 떠졌다.

고통에 발버둥치는 여자들을 바라보는 그때의 로키의 표정과 눈빛은 아직도 이 사내의 머릿속엔 선명했다.

한통의 서신을 로키에게 건넨 사내가 공손한 태도로 뒷걸음질 한 뒤 그의 명령을 대기한다.

신경질적으로 서신을 개봉한 로키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뭐시라, 1년... 1년을 나보고 이곳에 처박혀 있으라고!”

로키의 손에서 서신이 갈가리 찢겨 비산한다.

흩어진 종이쪼가리를 바라보는 사내의 안색이 암울하게 변한다.

상관, 그것도 몹시 두려운 상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였으니 그의 분노가 자신에게 떨어질까, 내심 두려움에 떠는 사내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는 짓은 어리석은 자충수임을 알기에 애써 제 감정을 다스린다.

“폴드.”

“예.”

“너의 주인인 클라우드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한동안 성질을 부리던 로키는 조금 진정된 태도로 폴드에게 묻는다.

클라우드와 로키의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다.

일종의 동업자라고나 할까? 그렇다보니 클라우드의 수하들에게 있어 로키는 애매한 존재였다.

폴드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다.

“저도 영문을 모릅니다. 용서하십시오.”

“이이익, 그럼 아우셔는 그녀에게선 왜 연락이 없는 것이냐!”

로키는 아우셔가 딕스에게 패해 죽은 걸 모른다.

로키가 클라우드와 동업자가 된 배경엔 아우셔가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연결고리다.

그런 연결고리가 사라짐은 두 사람의 관계에도 분명 불협화음의 소지가 되리라.

폴드는 아우셔의 일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발설하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임을 알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님과 함께 움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녀만 도와주면 그 자식을 갈아버릴 수 있을 텐데. 빠드득.”

천벽의 그림자 마법사를 전멸시킨 마인 노도와 딕스가 같은 인물인줄 안다면 결코 이런 생각은 하지 못하리라.

야반도주나 하지 않을는지.

벌떡 일어선 로키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러다 몸을 돌려세워 제 방을 본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다.

“청소나해.”

“예.”

로키가 완전히 나가자 그제야 폴드는 긴장감에서 해방됐다.

부서진 물건과 어질러진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한 폴드는 갈가리 찢긴 서신을 찌푸린 얼굴로 일별한 뒤 이를 봉지에 담아 건물 뒤편 쓰레기통에 버렸다.

스윽.

폴드가 건물내부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폴드가 버린 쓰레기를 수거하여 안개처럼 현장에서 사라졌다.

@

제 연인들과의 소풍을 끝내고 돌아온 딕스는 더덕더덕 붙인 누더기 서신을 바로로부터 건네받았다.

서신과 바로를 번갈아보던 딕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신을 펼쳐들었다.

퍼즐처럼 맞춰진 서신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글의 맥락을 못 알아 볼 정도는 아니었다.

“클라우드가 대체 어디로 갔다는 거지?”

제국의 현 상황을 고려할 때 클라우드의 외유는 딕스에겐 의문의 도화선이다.

이 도화선에 불이 붙어 치지직 타들어간다.

“파견한 수하들이 아직 제국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알아보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딕스 님.”

전격의 파울로부터 음지의 그림자 단의 지휘권을 인수받은 딕스는 그 즉시 이들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키와 그 주변인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클라우드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빠른 조치를 취했지만 리안부족연합과 제국 수도까지의 거리가 있다 보니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맛살을 오므린 딕스는 탁자를 검지로 툭툭 치며 생각을 정리한다.

떠나기 전 에세누아는 딕스에게 클라우드를 유념하라 하였다.

그의 충고가 없었다면 딕스는 클라우드를 야망에 눈이 먼 녀석으로만 생각하고 완전히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음지의 그림자 단을 파울에게 달라한 이유 중 하나가 클라우드 때문이다.

한데 가장 중요한 놈을 일도 시작하기 전에 놓쳐버렸으니.

“바로 천장.”

“예.”

“현상금을 내걸어 현존하는 모든 민간정보조직을 움직이고 싶은데, 물론 익명으로 말이야. 가능할까?”

익명으로 하면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러니 천문학적인 현상금을 내걸어도 그들이 움직일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딕스는 이점을 해소할 방법이 있는지 바로에게 물었다.

“제가 알기로 분쟁을 조정하는 비밀 협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접선하여 그들에게 내걸 현상금을 맡기면 될 것입니다. 한데, 왜 클라우드란 자를 신경 쓰시는지요?”

한때 클라우드는 최연소 마법사로 대륙에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딕스 르 시리우스 백작의 등장으로 말이다.

한데 그런 그가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2인자로 물러선 자를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에겐 이상하게 여겨졌다.

딕스는 바라모스와 카로얀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알아봐야 골치 아프고, 해결할 수 있는 자도 없다.

그래서 딕스는 그 모든 짐을 혼자 감내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게 있었군. 흠, 녀석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 일에 매달리게 하려면 얼마가 적당할까?”

딕스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돈 나가는 일이다.

한데 그 일이 발생했다.

한두 푼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아까워서 배가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이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지 않고서는 내내 심사가 편치 않음인데.

‘그 재수 없는 엘프 자식이 내게 헛소리한 거라면... 내 반드시 놈의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고야 말겠다!’

루세니엘의 아들 에세누아, 딕스에게 그는 이래저래 마음에 안드는 엘프다.

조사해서 클라우드와 바라모스가 연관이 없다면 차원을 돌파해서라도 엘프의 왕국으로 찾아가 에세누아를 용서치 않을 생각이다.

피 같은 제 돈을 축낸 대가를 받아내지 않으면 결코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없는 심성의 소유자가 바로 딕스 르 시리우스였다.

조마조마한 심정이 된 딕스를 향해 바로가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한다.

“큰 거 한 장은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거?”

딕스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된다.

큰 거 한 장이라니!

꿀꺽.

“십만?”

소심하게 묻는 딕스다.

도리도리.

“배, 백만?”

창백한 얼굴로 묻는 딕스다.

도리도리.

“그럼... 처, 천만!”

“그쯤은 돼야 할 것입니다.”

딕스의 영혼이 이 순간 피를 토한다.

제 머리를 움켜잡은 딕스는 번뇌와 마주하며 몸을 떤다.

클라우드 놈 행방을 알자고 자신이 굳이 천만 골드를 쓸 필요가 있을까? 만약, 놈과 바라모스가 연관이 없다면 이건 길에 버리는 돈이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제국 귀족들의 금고라도 자주자주 털 것을, 돈도 안 되는 사탕가게는 왜 털었을까? 후회막급이다.

“좀... 많군.”

“그렇지요.”

“하아, 바로.”

“예.”

“알아봐.”

“진정이십니까?”

딕스의 저택에서 생활하다보니 그의 씀씀이에 대해서, 그리고 금전에 대한 그의 인색함에 대해서 바로는 파악하게 되었다.

한데 그런 이가 무려 천만 골드를 쓰겠다고 한다.

‘대체 왜 그 자를 경계하시는 거지?’

본인이 함구하고 있으니 독심술이 없는 바로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명령을 따를 수밖에 어차피 자신의 돈도 아니고.

“할 수 없지. 하지만 내가 쓴 만큼... 그 열배, 수무배로 뜯어내야지. 언젠가.”

어디서 뭘 뜯어낸다는 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바로가 본 딕스라면 분명 어디서건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재물에 있어 저 남자는 순수한 욕망덩어리기 때문이다.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바로가 나가자 딕스는 혼이 빠진 표정으로 탁자에 제 이마를 쿵 박는다.

도움 안 되는 것들, 누가? 엘프.

하아.

천만 골드짜리 한숨이 딕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내가 다시 엘프랑 상종하면, 내가 개자식이다!’

급 우울해진 딕스, 그러나 그의 우울함도 레이첼의 방문으로 인해 싹 사라진다.

‘목욕물 준비됐어요.’

밖에서 돌아오면 청결과 건강을 위해서 꼭꼭 씻어주어야 한다.

딕스는 그 어떤 상황에서건 제 몸의 청결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아, 그래. 몸이 뻐근하네. 베스랑 시모나도 목욕탕에 있지?”

오늘 딕스는 세 여인과 함께 목욕을 하기로 했다.

약속을 받아냈다.

이는 그가 세 여인들에게 베푼 특별한 산책에 대한 답례다.

물론 홀딱 벗고야 하지는 않겠지만.

‘난 벗어도 좋은데.’

딕스의 속내,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레이첼은 수화로.

‘베스 언니는 궁에서 찾아온 사람이 있어 급히 나가셨어요. 인사 못하고 간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참, 시모나 언니는 파울 님이 수도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함께 쇼핑을 나가셨어요. 약속 못 지켜 미안하다고, 그렇게 전해 달랬어요.’

공무에 바쁜 엘리자베스 공주, 오늘 소풍도 그녀에겐 큰 맘 먹은 일이다.

그리고 내일 귀국할 파울, 아버지와 한동안 헤어져야 할 시모나 입장에선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억울한 심정이 드는 건 모두 함께하는 목욕에 딕스가 큰 환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망감!

딕스의 심정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대변하는 단어도 없으리라.

“아, 그렇구나.”

내심 입맛을 쩍쩍 다시며 실망감을 곱씹는 딕스다.

하지만 곧 그 실망감은 흥분으로 들뜬다.

3대 1로 목욕하면 놀이가 된다.

하지만 1대 1이면.

번쩍!

‘오늘 사고한번 쳐버려!’

급격하게 변한 딕스의 표정과 눈빛에 레이첼이 몸을 움츠린다.

막다른 길목에 갇힌 순진하고 여린 어린사슴처럼.

“둘이 해야겠네.”

레이첼이 거부하면 어쩌나 싶어 내심 발을 동동 구르는 딕스다.

일각이 여삼추 같다.

레이첼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딕스에겐 3년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리고 드디어 듣게 된 레이첼의 대답.

‘... 예, 같이 해요.’

“고마워!”

발그레.

순진하고 아름다운 사슴도 아는가보다, 딕스의 감사에 담긴 그 속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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