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딕스전기-179화 (179/194)

179화

천벽의 벽주, 그의 이름은 에세누아다.

그리고 이 남자의 가족도가 딕스에게 꽤나 묵직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룩센, 아니 루세니엘이 녀석의.

“루세니엘이 당신의 어머니라고?”

클라우드를 통해 천벽의 벽주가 루세니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루세니엘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조직차원에서의 관심이라 생각했다.

클라우드 역시 그러한 느낌을 풍겼었다.

누가 봐도 루세니엘의 능력은 다른 그림자 마법사들과 차별화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이 모자관계.

“그렇다.”

에세누아는 다시 본래의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감정을 내고 거두는 것이 참 쉬워 보이는 녀석이다.

그러고 보면 루세니엘도 그와 비슷한 태도를 보였었다.

연연함이 없다, 라고 할까.

충격을 선물한 상대가 저리 태연하니 놀라고 있는 제 자신이 오히려 무색해지는 딕스다.

딕스는 제 감정을 겨우 추슬렀다.

따지고 보면 남의 일이 아닌가.

“그렇군.”

상대가 저리 쿨 하게 나오니, 그에 맞춰주는 것도 잘 배운 자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딕스는 더 이상 자신과 에세누아 사이에 루세니엘을 세워두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서 사무적인 느낌만이 지금 풍긴다.

루세니엘의 아들, 적어도 그녀의 아들이라면 에세누아에게도 한수가 있음이다.

그럼에도 순순히 납치되어 준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으리라.

“아주 오래전, 주술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인류역사상 최강이라 불리던 주술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카로얀, 당시 우리 종족의 임무는 이 땅에 남은 마지막 세계수를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선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수는 점점 말라갔었지. 우리의 지식과 지혜와 마법으로도 시들어가는 세계수의 회복은 불가능했다. 그때, 나타난 인간의 주술사가 세계수의 회생을 대가로 거래를 요청했다.”

에세누아의 말에 딕스는 귀를 기울였다.

루세니엘에겐 시간이 없어 상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딕스에게 에세누아의 이야기는 늪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딕스는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오직, 귀만 활짝 열어둘 뿐이다.

“세계수의 눈물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우리 종족에게 매우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래서 선조들은 인간과의 거래를 기피하셨지. 하지만 그의 숙적인 역천의 주술사 바라모스에 대해 그가 말한 뒤 카로얀의 요청을 선조들은 수락했다. 덕분에 우리종족은 세계수의 회복과 카로얀의 도움으로 평행차원에 우리들만의 왕국을 무사히 건설할 수 있었다. 나의 어머니와 어머니, 그 어머니는 카로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국을 나오셨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며 역천의 주술사 바라모스와 대적할 자를 찾아다니셨지.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고향을 떠난 그 세월은, 그러다 우리는 굳이 카로얀의 안배를 통해 바라모스를 상대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우린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가 직접 바라모스를 제거하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전에 카로얀이 말했던 자를 찾아내면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인간과 달리 우리는 약속의 무게를 아니까.”

루세니엘이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세계수의 눈물의 연유에 대해 이제야 알게 된 딕스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대로 고향을 떠나 부평초처럼 떠돌던 자들, 엘프니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일, 이백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수천 년을 대대로 떠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역시 약속의 종족이란 엘프답다.

“그런 너희들이 왜 제국의 관료가 된 거지?”

카로얀과 약속에 저들은 융통성을 발휘했다.

어차피 바라모스만 처리하면 카로얀과의 약속은 안 지켜도 된다.

저들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는 일이다.

결과는 저들이 발휘한 융통성이 쓸모없어 졌지만.

“바라모스의 흔적을 제국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천벽에서 발견했다. 네가 씨를 말려버린 그림자 마법사. 난 어머니가 너를 발견하고, 너를 카로얀의 안배라고 했을 때. 화가 났었다. 인간세상에서 살아오다보니 나도 모르게 인간의 비효율적인 감정을 배우고 말았다. 이에 어머니는 화를 내셨다. 물론, 그분의 성격상 언성을 높이거나 하지는 않아다. 그저 매운...”

매운... 이다음에 이어질 말을 에세누아는 하지 않았다.

아니, 꺼려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딕스는 본능적으로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듣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식에게도 칼질 했군.’

딕스가 기억하는 루세니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들의 재정 상태를 ‘0’ 상태로 만들었거나.

딕스의 표정에서 그의 속내라도 읽은 것일까? 엘프는 민망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여러 번 토했다.

이를 통해 엘프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라는 것을 딕스는 알 게 되었다.

역시, 루세니엘만 이상한 엘프였다.

칼 휘두르는 고급 주정뱅이.

그런 이가 어머니거나, 연인이거나, 아내였다면.

‘나 같으면 평생 가출하고 만다.’

내심 혀를 차는 딕스다.

하지만 에세누아를 보니 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몹시 깊어 보인다.

그러니 그를 자극하여 순조로운 대화를 막을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딕스는 다시 한 번 청자의 자세를 견고히 한다.

“무튼, 그분은 재능자로. 난 관리로써 천벽에 접근했다. 우린 두 방면으로 조사를 하였지. 역천의 바라모스를 찾으려고. 안타깝게도 주술의 흔적은 찾아냈지만 놈에 대해선 끝내 알아내지 못했지. 그래서 나와 어머니는 다시 생각했다. 카로얀의 주술이 완성되지 않았듯, 바라모스의 역천의 주술도 아직 시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하고. 나와 어머니는 그래서 각자 바라모스의 혼이 담길 그릇과 세계의 진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기로 하였다. 어머니는 찾았고, 난 아직.”

카로얀과의 약속을 엘프는 지켜냈다.

그러니 저들은 더 이상 인간들의 세상에 관여할 이유가 사라졌다.

천벽의 벽주인 에세누아가 순순히 잡혀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계수의 눈물, 그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하긴 엘프인 그가 어찌 이를 알아보지 못했겠는가.

당시 현장에서 에세누아가 그림자 마법사들과 진심으로 합심하였다면, 어쩜 천벽의 붕괴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세니엘처럼 에세누아도 강하다면.

“앞으로 어쩔 건가? 에세누아.”

“인간세상은 알면 알수록 혐오와 허무만 쌓였다. 그래서 난 돌아갈 것이다. 나의 고향으로.”

세계수의 눈물을 담은 루세니엘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세계수의 눈물은 자신의 소멸이 동반되는 이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세누아는 아니다, 그는 오직 제 어머니를 돕기 위해 나왔을 뿐이다.

인간세상에서 긴 세월 살아온 에세누아, 그에게 인간세상은 그저 더럽고 끔찍한 똥 무더기였다.

인간사회를 동경한 엘프의 가출과 인간과의 사랑?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군.”

딕스는 아쉬움을 느낀다.

에세누아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저 결연한 표정을 보니 이는 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 같았다.

“그전에 알려줄 말이 있다.”

“......?”

“클라우드, 그 자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와 내 어머니가 예상한 바라모스의 그릇 중 하나가 클라우드였다. 그 자는 음흉하고 속이 깊다. 그리고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지. 원래 그의 성격은 이러지 않았다. 처음, 제국의 황제를 의심했지만 그는 아니더군.”

딕스 역시 제국의 황제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에세누아의 단언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혹을 알아본 에세누아가 말하였다.

“내가 해줄 말은 이것이 전부다. 노도.”

“딕스, 내 이름이다.”

“나에겐 상관없다. 네가 무엇이건.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상관있지.”

에세누아가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마나를 풀었다.

깊은 숲속에 온 듯한 청량한 마나다.

그 마나에 딕스의 심장이 반응했다.

두근두근.

‘뭐지?’

뜻밖의 이 현상에 딕스는 의문을 느꼈고, 어지럼증이 일어날 만큼 크나큰 당혹감을 맛보았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딕스를 향해 에세누아가 말한다.

“세계수의 눈물,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뜻이지?”

세계수의 눈물은 딕스의 몸과 힘에 완전히 결합된 상태다.

한데, 이 힘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저 말은 언젠가 세계수의 눈물을 회수하겠다는 뜻이 된다.

그럼, 이 몸과 제 힘은 어쩌란 말인가.

이는 딕스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운명의 적이라는 바라모스를 처치하는 대가가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그 누가 이를 하겠는가.

딕스 입장에선 분노하고, 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내 어머니에게서 듣지 못했는가? 하긴, 그런 걸 시시콜콜 이야기할 분이 아니시긴 하지.”

이 중대한 이야기가 겨우 시시콜콜? 분노를 넘어선 감정이 딕스에게서 분출한다.

그의 흉험하고 살벌한 기세에도 에세누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체 저 자신감이란.

“말해라. 네가 지껄인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 어차피 네 운명의 쓰임이 다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인데.”

츠팟!

에세누아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나의 양이 더욱더 많아졌다.

마나는 에세누아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었고, 이 원이 빠르게 회전하며 주변의 것들을 끌어당겼다.

엘프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딕스는 그에게서 듣고자 하는 말을 다 듣지 못했다.

에세누아를 붙잡기 위해 딕스는 힘을 발출하였다.

안타깝게도 딕스의 그 강대한 힘조차 눈앞의 이 현상을 멈추지도, 막지도 못했다.

메아리처럼 에세누아의 음성만이 이 낡은 창고 안에 맴돌았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고.

‘망할... 엘프!’

@

“망할 자식.”

딕스의 입에서 도도한 강줄기처럼 욕설이 끊이지 않는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일이 척척 처리되어가는 중에 똥물을 맞았음인데.

엘프!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종자들, 눈에 띄면 모조리 그 껍데기를 벗겨버리리라.

하지만 이 세상에 엘프는 더 이상 없다.

평행차원? 그 우라질 괴상한 곳에 지들만의 왕국이 있다고 한다.

한숨 푹푹.

발걸음 묵직, 묵직.

금의환향은 바라지 않지만 내심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콧대가 하늘을 찔렀던 딕스에게 에세누아의, 세상엔 공짜가 없다! 라는 놈의 마지막 멘트.

루세니엘, 그리고 그녀의 아들 에세누아 이들 모자는 딕스에게 운명의 원수가 아닐까 싶다.

카로얀 대 바라모스.

딕스 대 엘프 모자.

피 토하는 심정으로 딕스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제국 수도에서 벌어진 노도의 활약으로 곳곳에 딕스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소문에 살이 붙는 건 당연하다.

노도는 어린아이를 삶아 먹는 걸 즐긴다더라, 사람의 눈알을 파서 장신구로 만드는 게 취미가 있다더라, 노도가 제국을 못살게 군것은 제국의 사탕이 맛이 없어서라더라와 같은 말들이 풍성하게 나돌았다.

다른 때였다면 딕스는 자신에 관해 퍼진 이 과장된 소문에 티끌만큼이라도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딕스는 그 정신이 아주 먼 곳으로 출장 중에 있었다.

한마디로 넋이 빠졌다고 봐야한다.

억만금을 쌓아두었다.

절세미녀 셋과 결혼할 일만 남았다.

부모님과 형제들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순풍에 돛단 듯하다.

힘도 철철 넘치고, 권력도 빵빵하다.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다.

이제 그걸 누리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이런 개새 같은 엘프 모자연놈이 내 인생을, 망칠 줄이야.’

세계수의 눈물로 인해 큰 힘을 얻었을 때, 태산 같은 자신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제 인생이 탄탄대로 인줄 알았다.

너무 큰 행운이라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행운과 불행.

운명이 정한 이 알뜰한 공식이 이번에도 딕스를 찾아와 괴롭힌다.

바라모스, 놈이 왜 역천을 꿈꿨는지 딕스는 진심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이 이리 가혹한데, 그 아래 사는 놈이 언제까지 고분고분하랴.

“왜 나만 궁지에 모는데! 이 빌어먹을 하늘아! 아르온아!”

하늘과 유일신을 싸잡아 욕하며 광분하는 딕스다.

그를 본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피한다.

하아.

길길이 날뛰다 곧 긴 한숨과 함께 딕스는 터벅터벅 넋 놓고 걷는다.

그러다 문득 그의 뇌리를 하나의 생각이 스친다.

‘바라모스랑 안 싸우면 되잖아!’

운명? 엿이나 사드시라고 해라.

상품도 상금도 없는 대회에 누가 참가하랴.

딕스는 절대, 바라모스와 싸우지 않을 결심을 한다.

필요하다면 그와 동업까지 할 생각이다.

빠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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