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클라우드의 집을 방문한 이후 딕스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틈틈이 운명이 정하여준 숙적의 존재를 생각했다.
세상엔 공짜란 없다.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도 더불어 주어졌다.
역천의 존재 바라모스, 놈의 이름을 루세니엘에게서 듣는 그 순간 딕스는 전율을 느꼈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을 조우한 느낌이랄까? 무튼 그러한 감정은 아직도 그의 내면에 남아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 인생의 마지막 고비요, 벽.
꼬르륵.
무시무시한 능력을 소유했지만 일상의 배꼽시계는 오늘도 정확하게 정시를 알린다.
1층 식당으로 내려온 딕스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클라우드에게 한 경고가 먹혔는지 이전처럼 감시자가 따라붙지 않았다.
놈과의 첫 인연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놈은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다.
그저 필요에 의한 일시적인 동업자에 불과하다.
‘집으로 빨리 가고 싶군.’
그리움이 딕스의 내면에서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렇다고 당장 제 마음을 좇아 움직일 수는 없다.
딕스는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른 뒤 주문했다.
그의 주문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식당으로 몰려든다.
텅 비어 있던 식당이 가득 차며 여기저기서 대화의 꽃이 피어난다.
각자의 역할과 삶이 강물처럼 흐른다.
“이번에 내 아들이 하사관양성소에 들어갔어. 알지, 이번에 경쟁률이 무려 20대 1이었지. 하하하.”
중년인의 말투와 표정엔 아들에 대한 대견함이 가득하다.
이에 질세라 다른 이도 제 아들 자랑을 한다.
“내 아들은 이번에 행정학교에 들어갔어. 올해 경쟁률이 40대 1이라지 아마. 하하.”
“뭐? 그럼, 햄튼에 입학 한 건가 자네 아들?”
“당연. 하하하하하.”
하사관 양성소에 합격한 아들 자랑을 했던 중년인은 동료의 말에 축하를 해주면서도 내심 씁쓸했다.
위험하고 힘든 군인보단, 안전한 행정직 공무원이 장래를 생각하면 더 낫기 때문이다.
부모들에게 자식들의 미래와 성공은 제 삶의 질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자식들은 이들의 생활수준에서는 크게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들과 함께 온 자들은 다들 두 사람을 부러워하였다.
딕스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대화를 들으며 내심 혀를 찼다.
국가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도구로 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가는 학교란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 정원을 정하여 백성들에게 경쟁심을 선동한다.
노동자와 군인과 하급의 관리, 이들은 국가란 거대한 기계의 소모적인 부속품으로 그렇게 길러지게 된다.
하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이를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이라 다들 믿는다.
실제 그 이면엔 주입식 교육을 통한 맞춤형 도구로서의 자신밖에 없음인데 말이다.
반대로 지도자로 길러지는 이들이 다니는 상위의 교육조직은 결코 이러한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는다.
집단엔 반드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존재한다.
그러니 그에 따른 교육의 질도 방향도 다를 수밖에 없다.
딕스는 예전 엘리자베스 공주와 서커스단에서 생활할 때 공주로부터 지혜를 단련하는 공부를 하였다.
그것은 독서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공주는 딕스에게 어려운 인문학관련 서적을 장려했다.
몇 번을, 아니 몇 십번을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참으로 지루한 책이었다.
당시 딕스는 그 어려운 책을 권하는 공주가 싫었고, 그녀와의 토론 시간이 다가오면 두려움마저 느꼈었다.
그 교육을 통해 딕스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를 조금씩 기를 수 있었다.
‘지배자는 하늘이 내고, 백성은 그 지배자가 정하고 만드는 법이지.’
이러한 관계와 구조는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한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에서 딕스는, 상위 1%에 들어가는 지배층이다.
“손님,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딕스는 상념을 털어버린 뒤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그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본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혼자서 먹는 점심치곤 양도 많고, 가격도 너무 비싼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샘이 섞인 사람들의 시선, 그러거나 말거나 딕스는 제 몸이 필요한 양분의 보충에만 전념할 뿐이다.
수련도 싸움도 평소 잘 먹는 놈이 더욱더 잘하는 법이기에.
“여기, 스테이크 이 인분 추가!”
딕스의 위장은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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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의 통보이후 클라우드는 내내 고민하다 이틀 만에 겨우 결정을 내렸다.
그는 천벽의 벽주를 찾았다.
클라우드의 방문에 벽주는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
“노도에 관한 정보가 입수되어 이를 보고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클라우드는 천벽에서 중관관리자에 불과하다, 그의 위로 상관들이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제 직속상관들을 줄줄이 물 먹이는 행위다.
그럼에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클라우드, 이 때문에 그는 이래저래 미운 털이 많이 박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벽주의 두 눈에 기광이 스친다.
페슈아 대숲으로 파견한 그림자 마법사들에게서 연락이 없자 이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파견할 생각이었던 벽주는 클라우드가 노도의 정보를 갖고 왔다는 말에 내심 눈살을 찌푸린다.
“말해보라.”
“노도가 천벽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단도직입적인 클라우드의 보고에 벽주가 짓던 내심의 찌푸림이 그 얼굴로 옮겨진다.
벽주는 당당한 태도로 자신을 바라보는 클라우드를 한참을 응시했다.
천벽 내에서, 그리고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그 앞에서 이처럼 당당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벽주에게 클라우드는 신선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도가 지나치면.
“프레드릭 성에서의 실수는 만회되지 않았다.”
벽주의 어감은 나직했지만 뚝뚝 끊어 치는 그 어조에 담긴 뜻은 명백한 책망이다.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이 다들 납작 엎드려지기 마련이다.
하나 클라우드는 그러질 않았다.
“만회하기 위해 전력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제 자리를 걸겠습니다.”
젊은 야망가에게 천벽이란 도약을 위한 훌륭한 발판이다.
클라우드의 야망을 일찍부터 파악한 벽주였다.
그는 이를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야망이 없는 젊은이는 향기 없는 꽃이자, 관을 짜는 노인에 불과하기에.
더욱이 그 젊은이는 야망을 꿈꿀 충분한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그가 제 모든 것을 내걸었다.
들어두어 나쁠 것은 없으리라, 이리 마음을 정한 벽주다.
“보고하라.”
“앞으로 3일 후, 노도는 이곳을 들이칠 것입니다.”
클라우드의 보고에 벽주는 어이가 없었다.
노도를 잡기 위해 파견된 그림자 마법사가 무려 이십이다.
이 전력이면 뮬 공국의 수도를 하룻밤에 잿더미로 만들 전투력이다.
그러한 막강한 전력이 노도에게 패하지 않고서야 어찌.
“너의 그 말은 페슈아 대숲에 파견된 자들이 전멸했다는 의미다. 그 말, 책임 질 수 있느냐?”
“거기에 제 목을 걸겠습니다.”
확신이 가득한 클라우드의 말에 벽주의 눈빛이 무거워진다.
제 자리와 목까지 건다.
이는 절대적인 확신이 상대에게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톡톡.
검지로 책상을 두들기던 벽주의 검지가 멈춘다.
의자에서 일어선 벽주는 창가로 걸어갔다.
클라우드는 묵묵히 벽주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정보의 출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클라우드의 대답에 벽주가 몸을 돌린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차가운 느낌이 강성한 벽주의 눈빛은 마치 화살처럼 클라우드에게로 쏟아진다.
클라우드는 이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맞섰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태도일 뿐 실제 그의 마음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 상태다.
“좋아, 믿어주지. 노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씀드렸듯이 천벽입니다.”
“이깟 건물하나 부수려고 놈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놈이 네게 전한 바를 정확하게... 말해라. 클라우드.”
벽주의 말투에서 클라우드는 섬뜩함을 느꼈다.
짧은 시간 심력의 뿌리까지 활활 불태우며 클라우드는 고심했다.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린 클라우드가 대답한다.
“놈이 원하는 것은 천벽의 괴멸입니다.”
“괴멸이라... 노도의 배포가 참으로 크군. 클라우드.”
“예.”
“배신자의 최후에 대해 너도 알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 표정, 지나치게 당당하군. 배신자가 아니라는 항변의 뜻인가?”
“제국에서 제 야망의 열매가 맺기를 바랍니다. 매국 따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벽주의 입가가 씰룩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클라우드는 알지 못하였다.
“3일 후라 했나?”
“예.”
“놈을 기다리지. 이 일은 너와 나의 비밀이다.”
클라우드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인다.
벽주의 성격을 파악했기에 클라우드는 오늘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눈앞의 저 남자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타입은 아니지.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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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는 올가의 부친 말슨 드 레볼리 자작의 저택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말슨 자작은 천벽의 요인이니, 분명 자신이 공격할 시점에 그도 천벽에 있을 것이다.
상대를 확인해가며 날붙이 휘두르는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보니 전투의 여파에 휩쓸리면 말슨 자작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올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딕스는 미리 언질을 넣기 위해 그녀를 찾아왔다.
저택의 입구에서 서성이던 그를 본 하인하나가 딕스에게로 다가온다.
“무슨 일입니까?”
딕스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하인이 묻는다.
그의 옷차림은 화려하지도 않았고, 비싸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하인은 딕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는 딕스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 때문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 귀족가의 저택에 일하다보니 나름 사람 보는 안목이 향상된 탓이다.
“올가 영애를 보러 만나러 왔습니다.”
“아가씬 아카데미에 가셨는데요.”
하인의 말에 딕스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휴일인데 아카데미에 갔습니까?”
하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딕스를 본다.
올가를 찾는 딕스가 그녀의 동기이거나, 혹은 아카데미 선배쯤으로 생각했다.
한데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하인의 얼굴에 경계심이 드러난다.
이를 읽은 딕스는 뒤로 한발 물러서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딕스라고 합니다. 영애께서 언제든 찾아오라 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그리 볼 필요는 없습니다. 결코, 나쁜 사람 아닙니다.”
“가만, 딕스라면... 아! 생각났다. 그 분이시군요.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던.”
저택의 집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두겠다는 말을 올가에게서 들었지만, 설마 저택의 하인에게도 자신에 대해 말해뒀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딕스다.
“그리 이상하게 보실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정문 근처에 일하는 자들에게 딕스라는 분이 찾아오면 귀하게 맞으라 하셨거든요.”
“음, 그랬습니까?”
자신을 향한 올가의 마음이 새삼 깊이 느껴지는 딕스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마음이 향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전의 친분을 생각하여 부친의 화를 모면하게 해주는 게 인간적인 도리라 생각하여 찾아왔을 뿐이다.
한데, 그 당사자가 없으니 저택엔 볼일이 없었다.
“어쩌죠, 오늘 아가씨께선 늦으실지 모르는데. 내일 방문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아가씨 들어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올가의 당부가 어떠했는지 이 하인의 태도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음, 제가 아카데미로 찾아가죠.”
“그러시겠습니까?”
딕스는 하인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한 뒤 돌아섰다.
그때, 모퉁이에서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던 딕스는 마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데, 마차는 그의 앞을 지나치지 않고 멈추어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그곳에서 딕스가 아는 얼굴이 쏙 나온다.
“딕스 씨.”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이는 올가의 사촌이자, 딕스도 익히 아는 레나였다.
“레나 씨군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올가 만나러 오셨어요?”
마차에서 내린 레나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하다.
저택의 하인은 레나에게 인사를 한 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올가 씨는 아카데미에 있다더군요.”
“알고 있어요. 저 아카데미로 가는 길인데. 올가를 만나러 갈 거면 저랑 같이 가실래요?”
수줍은 빛을 띠며 제안하는 레나.
딕스는 고민 없이 바로 승낙했다.
남녀는 곧 마차에 올랐다.
“이럇!”
멈추었던 마차는 아카데미를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