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라틴 폰 야니스의 피습사건으로 프레드릭 성 전역은 검문검색이 강화됐다.
이 때문에 딕스의 성내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당장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제 자신의 몸을 추스르는 게 시급했기 때문이다.
쾅쾅쾅!
매너 없는 노크가 딕스의 상념을 깬다.
“누구요?”
“불심검문중이요. 협조해주시오.”
눈살을 찌푸린 딕스는 객실 문을 열었다.
병사가 딕스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딕스는 위조한 신분증을 내밀었다.
이를 꼼꼼히 확인한 병사가 말한다.
“여긴 무슨 일로 왔소?”
“지인의 장례식에 참가하러 왔습니다.”
“장례식?”
죽음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그가 누구건 일단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하게 된다.
이는 병사역시 마찬가지였다.
딕스의 신분증을 돌려주며 병사가 말한다.
“지금 외지인에 대한 검문검색이 엄격하오. 함부로 돌아다녔다간 경을 칠 수 있소. 되도록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관 내에 머무는 게 좋을 게요. 그리고 실례했소.”
병사들이 돌아가자 딕스는 문을 닫고 창가로 걸어갔다.
성의 모든 병사들이 다 출동했는지 민간인보다 병사가 더 많은 것 같다.
공작가문의 위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놈들... 제 살을 깎아내는 일을 왜 감수한 거지?’
자신을 찾아와 협박한 하기에는 천벽과 연관이 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렇다면 놈은 분명 천벽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일찍 자신을 잡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이 딕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돈다.
딕스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이 힘처럼 그의 몸 상태도 크게 호전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놈을 잡아 족쳐봐야 알겠군. 그런데 루세니엘은 누굴까?”
아우셔가 언급한 이 인물에 대해 하기에는 분명 꺼려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하기에, 놈을 잡는 것이다.
추적향을 놈에게 묻혀놓은 이상 놈을 찾아내어 잡는 건 어렵지 않다.
곤란한 것은 그림자 마법사 넷이 놈의 주변에 있을 경우다.
이럴 때 룩센이 있었더라면 일이 좀더 수월했을 텐데.
룩센의 존재가 참으로 아쉬운 딕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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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 애송이가 왜 안 나타난 거지? 네 말을 씹은 거 아냐?”
아우셔가 잔뜩 뿔난 표정으로 하기에를 닦달한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걸 의외로 싫어하는 그녀에게 임무의 장기화는 탐탁지 못한 상황이다.
답답하긴 하기에 역시 그녀와 별 다르지 않았다.
분명 그가 움직일 카드를 사용했고, 이번 일이 반드시 성사될 것이라 녀석은 확신했다.
딕스가 오지 않아 하기에는 물론 그의 주군인 클라우드까지 천벽에서 웃음꺼리가 될 처지였다.
‘이놈이 감히 내 말을 씹어! 그나저나 주군께서 회의석상에서 그리 호언장담을 해놨는데. 노도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허어. 이럴 어이할꼬.’
제 입장보다 주군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하기에다.
“하기에.”
“아, 예, 아우셔 님.”
“지금 내말 씹는 것이냐?”
“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정신이 없다보니 그만 까다로운 눈앞의 존재를 깜빡했다.
급히 정신을 수습한 하기에의 얼굴은 그래서 난감이란 두 글자가 두드러진다.
“귓구멍이 막혔다면 내 뚫어주랴!”
아우셔의 서슬 퍼런 태도에 하기에는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녀는 한다면 진짜 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알기에 하기에는 그녀의 이 말을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내 클라우드의 얼굴을 봐서 이번은 참겠다. 그럼 다시 묻겠다. 그 애송이 건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기에는 곤란한 기색으로 대답한다.
“제 독단으로 결정하기 힘듭니다. 주군께 연락을 드렸으니 곧 답신이 있을 겁니다.”
“흠, 이번일로 클라우드를 싫어하는 자들이 좋아라하겠군. 그래도 녀석에게 루세니엘이란 패가 있으니. 벽주의 눈 밖에 나는 일은 없겠지. 그래, 루세니엘은 언제 벽주에게 넘길 것이라더냐? 길면 그에게도 좋지 않아.”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하기에의 대답은 하나같이 아우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대답뿐이었다.
다른 이가 이리했다면 아우셔는 상대의 목을 날려버렸거나, 머리통을 뚫어버렸을 것이다.
아우셔에게 클라우드는 인간진정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노도인가, 노물인가 그 놈이 여기 안 오는 바람에 우리는 놈의 단서를 찾아 곧 떠나야한다. 넌 어쩔 것이냐? 이리가라, 저리가라. 위에 것들의 처사는 이래서 마음에 안 든다니깐.”
“전 이곳에서 주군의 답신을 기다린 뒤 움직여야할 것 같습니다.”
“그 놈의 답신, 답신. 쳇, 알았다. 그나저나 이놈을 어디서 찾는담. 귀찮아, 정말... 귀찮아.”
하기에의 진을 모조리 뺀 아우셔는 그제야 사무실을 나선다.
그녀의 모습과 냄새가 눈과 코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하기에는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감히, 날 무시해. 오냐, 애송이. 네가 그리 나왔으니 내 너의 소중한 물건 하나를... 지상에서 없애버리마.’
하기에의 두 눈에 불길함을 부르는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대체, 딕스의 무엇을 없애겠다는 걸까? 놈의 입이 꾹 닫혀버린 이상 알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것은 놈의 이 생각이 딕스를 무척 화나게 만들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성패를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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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성에도 어김없이 어둠이 찾아들었다.
성을 발칵 뒤집은 사건의 주역 라틴은 수행원들과 함께 황도로 떠나버렸다.
그가 떠나자 프레드릭 성의 검문검색도 자연 느슨해졌다.
딕스는 이 틈을 이용하여 하기에가 머물고 있는 건물주변을 꼼꼼하게 정탐했다.
그는 바람의 아우셔와 세 명의 남자들이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이 삼일 전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곧장 건물로 들이닥치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가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오늘 하기에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한 딕스다.
‘건물 안에 존재감은 총 열셋. 추적향은 건물 4층에서 짙군.’
딕스가 바라보는 건물은 5층 건물이다.
수면약과 일체가 된 안개가 건물을 감싼다.
안개는 건물내부로 스며들어가 모두를 깊이 잠재워버렸다.
물의 척후를 보내어 건물 내 움직임의 유무를 확인한 딕스는 그제야 건물내부로 진입했다.
1층 입구에 세 명의 남자들이 엎어져 있었다.
이를 지나쳐 2층에 도착하자 계단 앞에 두 명이 보였다.
그렇게 4층까지 올라가면서 딕스가 확인한 사람은 총 아홉 명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굳이 그들을 신경 쓰지 않는 딕스다.
어차피 그들은 내일 아침까지는 세상모르고 잘 테니.
“이 방이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이다.
그러나 이 문을 바라보는 딕스의 두 눈은 예사롭지 않다.
냉랭하다.
방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딕스는 물의 검을 면도날처럼 얇게 만들어 안쪽 걸쇠를 잘라버렸다.
툭.
발끝으로 문을 툭 쳐서 열어젖힌 딕스는 내부를 살핀 이후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하기에는 책상에 엎어져 하늘이 무너져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놈을 향해 곧장 성큼성큼 걸어간 딕스는 놈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책상 아래로 패대기쳤다.
손가락에 붙은 놈이 잔재(?)는 입김으로 날려버렸다.
우당탕.
강력한 수면 약에 취한 하기에는 그럼에도 꼼짝도 안했다.
딕스는 놈에게 잠깨는 약의 향기를 맡게 했다.
이 냄새는 석상도 진저리쳐지게 할 만큼 몹시 지독한 것이다.
얼른 뚜껑을 닫은 딕스는 찌푸린 얼굴로 책상다리자세로 책상에 앉았다.
나직한 신음과 함께 하기에는 흐리멍덩한 두 눈을 끔뻑거렸다.
“... 내가 왜?”
바닥에 패대기쳐진 이유를 모르는 하기에다.
흐릿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하기에의 얼굴이 일순간 크게 경직되었다.
책상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낯선 인물.
날쌘 고양이처럼 벌떡 일어선 하기에는 품에서 단검을 빼들려 했다.
더듬더듬, 그런데 없었다.
하기에는 더욱더 당황했다.
딕스의 느긋한 음성이 하기에를 찾는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하기에 만을 위한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걸 찾나? 하기에.”
“너, 넌 누구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기에는 이 상황이 몹시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신은 자지도 않았고, 술은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이탈해 있었다.
자신만 쏙 빼고 세상이 뒤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일을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딕스를 혀를 차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쯧쯧, 협박범이 피해자를 잊으면 쓰나.”
“......?! 노, 노도!”
걸려도 된통 걸린 하기에다.
하지만 자신에겐 놈을 꼼짝 못하게 할 패가 있지 않은가.
이에 용기를 내보는 하기에다.
그러나 놈은 상대를 잘 못 봐도 한참을 모른다.
딕스가 어떤 인물인지.
“내 말을 무시했더군. 노도, 아니 딕스 백작. 그 결과에 대해서 백작은...”
“그 주둥이 닥치고 내 말부터 들어. 나 지금 몹시 예민하니까. 그러니 넌 최대한 내 비위를 맞추며 질문에 협조적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아니면, 널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찢어주겠다. 겨울은 유독 밤이 길지.”
딕스는 한다면 하는 인물이다.
평소의 그는 나름 착하다, 그리고 그런대로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적이라 판단되는 자들에게 그는 몸서리쳐질 만큼 잔인하고, 혹독하다.
인간이 종이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찢는단 말인가.
하나 딕스는 인간의 종이 화를 가능케 하는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다.
딕스에게서 뿜어지는 냉철한 분위기 그래서 더욱더 위험하다.
하기에는 순간 온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혀, 협조! 날 건드리면 네놈의 정체가 온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방금 넌 내 말을 무시했다. 화가 잔뜩 난 사람에게 너의 그런 행동은 아픈 보답으로 돌아가는 거야. 좀 아플 것이다. 하기에, 아! 정정하지. 많이.”
“......?”
하기에의 다리를 물 덩이가 감쌌다.
그 물 덩이는 하기에의 다리 살을 천천히 조금씩 찢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아! 헙!”
온 몸을 쪼개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하기에의 비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의 비명이 시끄럽다며 딕스가 물 덩이로 그 입을 채워버렸기 때문이다.
생살이 찢기는 고통과 익사의 두려움에 빠진 하기에는 온 몸을 간질 환자처럼 떨어댔다.
정신이 쏙 빠진 놈에게 딕스는 뼛골이 시릴 만큼 차가운 물세례를 퍼부어 깨웠다.
덜덜덜.
하기에의 길고 끔찍한 밤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물? 그건 매우 무서운 흉기였다.
딕스는 하기에를 밤새 조금씩 찢었다.
그러나 그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들은 그의 이와 같은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았다.
하기에는 악에 받친 얼굴로 저주만 밤새 퍼부어댔다.
곤경에 처한 자의 저주 따위 신경 쓸 딕스가 아니다.
오히려 놈을 더 독하게 다루었다.
그럼에도 놈은 끝까지 정보를 토설하지 않았다.
하기에는 딕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종이야, 독종.’
하지만 그 건물에 입은 하기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놈보단 질(?)이 떨어지지만 다른 녀석들도 있었다.
개중 하기에와 판박이 같은 독종도 있었지만 아닌 녀석도 두엇 있었다.
양질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천벽과 별개로 하기에가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과 놈들이 룩센을 낚기 위해 함정을 팠다는 것을.
딕스는 룩센이 놈들의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는 룩센의 능력을 딕스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손으로 하늘을 가렸다는 말이면 그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본업으로 돌아가야겠군.’
천벽에서 나온 네 명의 그림자 마법사.
딕스는 이들을 공략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인 노도가 건재함을 과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하기에의 배후를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아, 그나마 사부가 움직여줬으니...’
아련함이 깃든 딕스의 눈길이 여명에 물든 북쪽 하늘을 본다.
그 하늘에 떠 있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들.
내년엔 그녀들과 함께 벽난로 앞에 앉아 대화와 다과를 나누길 그는 진정으로 소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