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엘리자베스 공주의 안전을 고려하여 일행은 너무 번잡한 곳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딕스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군중의 물결에 휩쓸리면 그도 딱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행은 퍼레이드를 잘 볼 수 있는 전망장소를 섭외하여 그곳에서 최고급 식사와 함께 이를 관람했다.
어쨌든 이런 화려한 곳에서의 식사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돈이 많이 들긴 했지만, 뭐 그래도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나은 데이트다.
‘이게 행복인데. 하아.’
제 여인들을 보니 눈도 즐겁고, 마음도 즐겁고, 배도 절로 부른 딕스다.
이리 즐거운 인생이 여기 이처럼 화려하게 피어 있는데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전장으로 조만간 떠나야한다.
그 생각만하면 온 몸에 소름이 무서운 기세로 돋는다.
하지만 자신의 심정을 어찌 여기서 드러낼 수는 있겠는가.
모두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추억을 위해, 그리고 남자라서... 속으로 삭인다.
그래도 지금은 무척 행복한 딕스다.
“레이첼, 왜? 입에 안 맞아?”
고기를 잘 썰지 못하는 레이첼을 위해 딕스는 그녀의 접시를 가져와 고기를 썰어주었다.
그 모습을 공주와 시모나가 보더니 새침한 표정으로 제 접시를 딕스 쪽으로 스윽 내밀었다.
한 접시나 세 접시나, 고기 써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다 제 여자들인 것을.
그래서 딕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들의 고기를 정성을 다해 신나게 썰어주었다.
뽀각뽀각.
그리고 고기를 오물오물 먹는 그 입술을 보며 다시 배가 불러오는 딕스였다.
“왜 안 먹어?”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딕스를 본 공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걱정이 스며든 음성으로 물었다.
레이첼과 시모나도 걱정하며 그를 보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 저처럼 제사지내는 남자가 아니기에 다들 이리 반응한다.
“이상하게 배가 부르네.”
“무슨 말이야?”
공주가 묻고 레이첼과 시모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들 오늘따라 딕스가 이상하다 여겼다.
그들의 행동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보자 딕스의 기분은 한층 더 좋아졌다.
이래서 다들 연애에 목을 매는구나싶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들이 내 앞에 이리 만개했잖아. 그 향기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불러.”
세 여자가 동시에 나이프와 포크 쥔 채 진저리친다.
각각일 때는 그의 이 멘트를 참으로 좋아했던 그녀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듣지 말아야할 소리를 들은 듯 질색했다.
그러곤 저희끼리 쑥덕거렸다.
함께 목욕을 해서 그런가? 객실에 짐을 풀 때와 달리 무척이나 친해진 모습이다.
‘나도 좀 껴주지. 쳇.’
아직은 완벽한 가족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다보니 여인들이 목욕하는 데 아쉽게도 동참할 수 없었던 딕스다.
아니, 사실은 몇 번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억지를 부리면 함께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랬다간 음란한 변태소리를 들을 것 같아 꾹 눌러 참았다.
물러설 때를 아는 남자가 진정한 남자이기에.
그래도 뼈에 사무치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세 여자들이 어디 얼굴만 예쁘던가!
꿀 피부.
꿀 몸매.
꿀꿀꿀... 이래서 연인을 허니 라고도 하나보다.
‘그래, 그래 어서들 빨리 친해져라. 허물없는 사이가 얼른 되라.’
딕스가 세 여인에게 바라는 점은 현재 이것이 유일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이 승리의 영광을 안고 돌아왔을 때, 모두가 함께 호호하하 웃으며 서로의 몸을 씻겨주는.
“헤헤.”
“바, 바보 같아, 딕스 그 표정.”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딕스님. 그 표정 다신 짓지 마세요. 무서웠어요.”
‘아프세요?’
엘리자베스, 시모나, 레이첼의 이러한 반응에 딕스는 급히 제 표정을 수습했다.
“나 멀쩡해. 잠시...”
아,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당신들과 함께 목욕하는 상상을 했어! 라고 했다간 세 여인의 지탄을 받을게 분명하다.
그러니 이 상황을 피해갈 수 있는 적절한 멘트가.
“돈 줘.”
어느새 룩센이 딕스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뻔뻔하게 남의 데이트를 방해하며 손을 내민다.
저 손모가지를 확 잘라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었다.
룩센의 등장에 다들 깜짝 놀란 세여인.
그 모습에 딕스는.
‘역시, 내 개똥이구나!’
오늘은 기분도 좋고 하니 술이나 사 묵으라고 웃으며 돈을 줄 마음이 든 딕스다.
“여기 있다. 가서 술이나 사먹어.”
순순히 돈을 내주는 딕스의 태도에 룩센의 머리가 갸웃거린다.
이 상황을 이 괴벽한 녀석도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딕스는 룩센에게 돈을 쥐어준 뒤 가보라며 손짓했다.
일단 돈을 챙긴 룩센이 또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한다.
“목욕하는 거 훔쳐봐서 기분이 좋아진 거구나. 거기 여자들 목욕자주해라. 나도... 더불어 눈이 즐거웠다.”
빠지직.
우당탕.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딕스는 룩센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세상을 살다보면 지켜야 할선이 있으며, 정도란 게 존재한다.
방금 룩센은 그 선과 정도를 추월해버렸다.
그리고 뭐? 이들의 목욕 장면을 봤다고.
“야이, 개흡충이 시키! 도저히 못 참아! 오늘 너 죽고 나죽자!”
딕스 오늘도 룩센에 의해 제대로 뚜껑 열렸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허공에서 허무하게 메아리치고 말았다.
룩센은 이미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추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딕스는 그 자세 그대로 식당 출입구 쪽으로 엉거주춤 걸어 나간다.
살다 살다 오늘처럼 민망해보긴 처음이었다.
도저히 이곳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어디 미분양 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분양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허리에 양손을 척 걸치더니 딕스를 향해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사람 방금 한 이야기는 무슨 의미지? 대답해줄래.”
시모나와 레이첼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쩔쩔매고 있었다.
여자 셋이 모이다보니 별 뜻 없이 그의 험담을 하였다.
그걸 그가 듣지 않았을까를 먼저 걱정하는 두 사람이다.
반면 공주는 이들의 맏언니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딕스를 쏘아붙였다.
“난 여러분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책임감, 뭐 그런 건데. 공주님, 그 시키 아주 질 나쁜 놈이니까. 그 말 믿으면 안 돼요.”
“질 나쁜 사람과 친구인 넌 뭐니?”
“그게 그러니까. 그 시키랑 나랑은 절대 친구가 아닌데.”
“휴우, 네가 우리랑 목욕하자고 조를 때부터 알아봤어. 이 변태! 시모나, 레이첼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자야겠다. 그만 나가자.”
엘리자베스 공주의 주도로 반 딕스 연합이 결성됐다.
공주는 어찌 저리 결성하는 걸 좋아하는지.
세 여인이 딕스의 앞을 스쳐지나간다.
시모나가 그를 바라보며 입 모양새로 이리 말한다.
‘이해해요.’
대체, 뭘 이해한단 걸까? 그리고 레이첼도 빠른 수화로 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잘 먹었어요.’라고.
세배의 행복이 순식간에 딕스의 코앞에서 그렇게 우르르 사라져버렸다.
오늘 멋진 추억을 만들리라 단단히 결심하고 넓은 마음으로 목돈을 썼건만,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너무 잘하려고 해도 안되는 게 인생.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딕스는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룩센의 얼굴이라 생각하며 빡빡 긁었다.
참을 수 없는 이 분노.
그러나 어쩌랴.
놈은 바람 같은 존재인 것을.
“어째 술술 잘 풀리나 싶더니만... 에휴.”
그 누굴 탓하겠는가.
너무 예쁜 연인을 무려 셋씩이나 둔 자신을 탓할밖에.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많은 게 나은 법.
‘가... 가만, 이 시키 내게서 하루에 두, 두 번 삥 뜯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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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임에도 도시 루브자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높은 종탑에서 한 인영이 내려다보며 와인 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펄럭.
차가운 바람이 룩센의 로브자락을 힘차게 잡아당긴다.
위험천만한 곳에 앉아, 그것도 음주를 즐기고 있다.
자살을 고려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지만 룩센은 자살 따위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도 좋은데 가고 싶은데. 그게... 될까?’
룩센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죽으면 천국과 지옥, 둘 중 한곳에 간다고 한다.
종교인들의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막상 자신의 죽음이, 그게 죽음인지 아니면 그냥 소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현상이 서서히 다가오자 한번이라도 더 착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 다 가고 싶다던 천국이란 곳에 자신도 갔으면 싶었다.
누군가 낑낑 거리며 종탑을 찾았다.
“이 시키야! 너 나랑 진지하게 대화 좀 하자!”
물의 척후를 사방으로 푼 딕스는 룩센을 찾았고, 드디어 그를 찾아냈다.
평범한 인간은 결코 가지 않는 곳.
그리고 녀석이 평소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점을 기억하곤 수색범위를 정했다.
문제는 막상 룩센을 찾았지만 녀석이 앉아 있는 급경사의 지붕에는 도저히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는데 있었다.
“여긴 왜 왔냐?”
“내가 오고 싶어서 왔냐! 남의 연애 사에 제대로 똥물 끼얹더니, 야야, 팔자 좋다, 팔자 좋아. 그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냐! 이 시키야! 그리고 왜 두 번이나 돈 달래? 너 그거 고용주에 대한 모독인거 알아? 몰라! 하긴 네가 그걸 알면 이제까지 그 지랄을 했겠냐마는. 야! 안 내려와! 대화 좀 하자니까!”
“여기까지 올라오면 진지한 대화... 고려하마.”
“뭐?”
룩센의 제안에 딕스는 심각하게 이를 고민했다.
그는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보았다.
아래를 보니 10년 전에 먹은 것 까지 모조리 게워 올릴 것 같다.
도저히 저 지붕까지는 올라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녀석이 진지한 대화를 고려한다고 하니 이 기회가 아깝기도 했다.
문제는 저 지붕까지 올라갈 방법이 외벽의 좁은 턱을 밟고 가야하는데 있다.
발을 잘못 헛디뎌도.
‘인생 쫑 인데.’
“겁쟁이.”
룩센이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사나이는 새가 아니다.
날개 없는 육상동물 일뿐이다.
“야야,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이야기하자. 봐봐 사람도 없고 조용하잖아.”
딕스는 룩센이 내려오게 하려고 살살 달랬다.
그러나 여기에 넘어갈 룩센이 아니다.
“공주가 너 찾는 것 같다. 가 봐라.”
“뭐?”
“혼자서 여관 옥상에서 어슬렁거리고 있군. 널 찾으러 나온 것 같은데. 가봐.”
딕스는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그의 위치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곳이다.
“정말이냐?”
“실수는 해도, 헛소리는 안 해.”
“알았다, 알았으니까. 이거 하나만 묻자.”
“아프지 않게.”
“어울리지 않는 농담 집어치워. 나 굉장히 진지하니까.”
룩센은 고개를 끄떡이는 것으로 그의 질문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딕스는 그 즉시 질문을, 최대한 자신의 불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너 이제까지 내게서 가져간 그 돈 모두 어디 쓴 거야? 내가 열심히 계산해봤는데. 이제까지 내게서 가져간 돈이면 네가 물처럼 퍼 마시는 그 와인쯤은 서너 달, 아니 1년은 족히 사먹을 수 있어. 그러니 이실직고해라. 너... 도박 하냐?”
“내 인생에 도박이란... 너다. 딕스.”
의미심장한 이 말을 끝으로 룩센은 종족을 감추어버렸다.
“야아아아아~!”
아무리 소리쳐도 무정한 룩센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들부들.
“이 시키... 분명 도박할거야. 아우, 빡치네.”
상식적으로 그 많은 돈을 한방에 다 날리는 방법은 도박뿐이다.
딕스는 공주에게 건의하여 국내도박장을 발본색원하여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공국은 그렇다 쳐도 타 국은 어쩌란 말인가.
팔자에도 없는 도박꾼에 술주정뱅이의 물주노릇이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는 딕스였다.
다시 그는 어지럼증을 유발시키는 나선형 좁은 종탑계단을 힘겹게 내려갔다.
올라올 때는 열이 받아서 난간이 없는 이 좁고 가파른 계단이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살 떨리게 무서운 장소가 이곳임을 알게 되었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수명이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