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싱그로아의 수도 라틴 힐에 드디어 발을 디딘 딕스는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그가 수도에 들어온 사실은 이미 안소니 국왕에게 보고된 상황이었다.
국왕은 만사를 제쳐두고 딕스를 마중 나왔다.
“오랜만이네, 동생. 하하하.”
주변에 안소니 국왕의 신하들이 있었기에 딕스는 예법에 맞게 인사하려고 했다.
한데 상대가 이처럼 친근하게 선수를 쳐버리니 딱딱한 궁중예법을 행하기도 어색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이거 섭섭하게 전하라니, 그냥 형님이라 부르게. 자자, 안으로... 음?”
딕스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룩센을 그제야 발견한 안소니 국왕이다.
하지만 이는 의도적인 행위일 뿐 룩센에 대해서 이미 칼슨 백작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함께 온 분은 누군지 소개해줘야 할 거 아니냐?”
“제 고용인인 룩센입니다.”
“고용인?”
“예, 룩센 인사드려. 나의 의형님이시자, 싱그로아의 군주이신 안소니 전하시다.”
딕스는 왕궁으로 들어오는 내내 룩센에게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체면도 있고 하니 행동과 말에 조심하라고.
이제 그 당부의 결실을 볼 순간이 되었다.
“룩센입니다.”
간단명료한 룩센의 소개에 주변에 있던 안소니 국왕의 신하들이 일제히 얼굴을 붉히며 그를 쏘아보았다.
덤으로 딕스 역시 이 눈총에 맞아야만했다.
고용인을 잘못 둔 고용주의 비애다.
그나마 안소니 국왕이 중간에 지금의 이와 같은 쌀쌀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안소니 국왕은 곧 자리를 옮겼다.
“홉킨스 후작은 딕스 너도 알지?”
“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후작님.”
“소문 많이 들었네. 딕스 경, 앞으로 잘 부탁하네.”
홉킨스 후작의 말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딕스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느낌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소니 국왕과 딕스는 자리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딕스 네가 내 왕국에서 해준 일들에 대해 들었다. 나를 진정한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면 어찌 그와 같이 힘든 일을 해주었겠느냐. 내 너의 의형이자, 이 나라의 국왕으로써 그 일에 대해 깊이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왕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딕스는 화들짝 놀랐다.
귀족들도 잘 숙이지 않는 것이 저 머리통이다, 한데 일국의 국왕이란 자가 타국의 훈작에 불과한 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보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더 큰 어진 왕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딕스는 또 한 번 안소니 국왕의 인간됨됨이와 군주됨됨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형은 기똥차게 잘 뒀다니까.’
“저거 마셔도 되나?”
옆에 앉아 있던 룩센이 갑자기 진열장을 가리키며 이 궁전의 주인이 아닌 딕스에게 물었다.
“뭐?”
“저거.”
룩센이 가리키는 곳을 본 딕스는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녀석이 즐겨 찾는 그 고가의 와인이 진열장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한 병에 일천골드나 하는 와인이 대충 봐도 백병은 되어 보였다.
룩센의 행동은 큰 실례다, 안소니 국왕의 성품이 까다로웠다면 당장 참수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소니 국왕은 그런 류의 왕과는 근본부터 다른 인물이었다.
“얼마든지 드시오, 룩센 경.”
룩센에 대한 안소니 국왕의 호칭에 딕스는 의문을 품었다.
룩센이 언제 작위를 받았지? 라는 쓸데없는 의문.
안소니 국왕의 친절에 룩센은 인사한마디 없이 진열장에서 와인을 꺼내어 역시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 녀석 성격이 좀... 그나저나 저 고가의 와인이 왜 이리 많습니까?”
“많긴 내 창고에 가면 저 와인으로 꽉꽉 채워져 있으니, 얼마든지 마셔도 되네. 하하하.”
“예? 그게 무슨...?”
안소니 국왕은 사치와 거리가 먼 왕이다.
그런 왕이 저런 고가의 와인을 창고에 가득 채워놓았다니, 당사자의 입에서 듣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몰랐나?”
“무슨?”
“내가 애주가잖아. 그래서 내 적성도 살리고 용돈벌이도 할 겸, 겸사겸사 와인사업을 벌였지. 그런데 의외로 잘 팔리더군.”
왕이 술장사를 한다? 딕스는 안소니 국왕의 말이 황당하게 들렸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
‘내 피 같은 돈이 왕 형님의 지갑으로 들어갔다는 말이잖아!’
그렇다 룩센이 퍼마신 술값이 온전히 국왕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소니 국왕을 좋은 왕으로 봤던 딕스는 이 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다.
어쩌자고 저딴 와인하나를 천 골드씩이나 받아먹는단 말인가.
이는 폭리다.
악덕 상인이다.
하지만 왕이라서 차마 멱살은 안 잡는다.
그래도 그간 저 와인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딕스는 딱 한마디 한다.
“형님, 제게 지분 좀 파십시오.”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에 동조하여 즉각 붙어 가면 된다.
“지분을? 넌 술 못하잖아.”
“술을 꼭 잘 마셔야 술장사... 아니, 와인 사업을 하나요. 제가 저 와인이 참으로 마음에 들어 그러합니다. 꼭 지분을 제게 파십시오.”
“흠, 이건 내 개인 사업이라서...”
안소니 국왕이 주저하자 딕스는 처음으로 이 왕도 쩨쩨한 구석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저러한 행동은 분명 이 사업이 엄청 잘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구멍 중에서 제일 최고로 쳐주는 구멍이 무슨 구멍이겠는가! 바로 돈 들어오는 구멍이 아니겠는가.
딕스의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하였다.
“형님, 우리 형제 아닙니까?”
“음... 그럼, 내 부탁하나만 들어 줘.”
“얼마든지요. 말씀만 하세요.”
“역시, 내 동생이야. 시원시원하다니까. 하하하.”
“하하하하, 그럼요. 제가 한 시원합니다.”
대박사업의 지분이다.
그러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그런데 왕은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할까? 갑자기 이러한 의문이 딕스를 찾아오며 그 웃음을 집어 삼킨다.
딕스의 얼굴위로 살짝 흐르는 긴장감.
“엘리자베스 공주와 나를 연결하는 매파가 되어 줘.”
“......!”
안소니 국왕의 다음과 같은 부탁에 순간 딕스 개인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인생의 막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딕스는 엘리자베스 공주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제 불편함이 싫어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그녀의 마음을 모른 척해버렸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그녀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 불편함을 감수하지 못하겠다고 외면했던 자신이 참으로 비겁하고, 비열하고, 졸렬해보였다.
삶을 이어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직접적으로 말해볼 생각을 딕스는 그때 품게 되었다.
이미 대사도 준비해두었다.
「내겐 여자가 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난 당신도 좋습니다.
당신의 지위와 위치가 제겐 사실, 큰 부담입니다.
소박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저에겐 당신은 너무 거대한 조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께 딱 한마디만 하려 합니다.
좋아합니다!」
이렇게 남자답게 고백하고, 차이면 그날로 사이좋은 군주와 신하사이로 남을 생각이었다.
한데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자신에게 의형이 매파를 요청했다.
딕스 입장에선 당혹스러운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병 더 마셔도 돼?”
룩센이 한 병을 비우고 새 병을 손에 들고 딕스에게 물었다.
순간 딕스는 저 와인 병으로 룩센의 머리통을 까버리고 싶었다.
빠지직!
“하하, 드시게, 얼마든지. 하하하하.”
국왕이 웃으며 허락한다.
그러자 룩센은 좋다고 또 마신다.
순간적으로 딕스는 국왕도 저 와인 병으로 까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상상으론 뭔들 못할까.
딕스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의 미를 살려 추슬렀다.
“형님, 아니. 전하.”
“응? 말하게.”
딕스의 표정이 급 진지해지자 안소니 국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딕스는 안소니 국왕의 얼굴을 직시하며 자신의 진심을 밝혔다.
이런 일은 확실하게 맺고 끊어야 한다, 질질 끌어봐야 나중가선 서로를 욕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만약 이 일로 안소니 국왕이 절연하자고 하더라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딕스는 생각했다.
‘합!’
스스로에게 기합을 불어넣은 딕스.
“제가 먼저 공주님께 고백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전하의 청을 전 들어 들일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제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부드럽기만 하던 안소니 국왕의 표정이 그 순간 딱딱해졌다.
그러곤 꽤 긴 시간을 국왕은 상대로 하여금 깊은 부담감을 느끼게 만드는 침묵을 이어갔다.
실내의 분위기는 그로 인해 덩달아 무거워졌다.
벌컥벌컥.
유일하게 룩센만이 이 분위기에서 자유로웠다.
국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딕스.”
“예.”
“너 여자 둘이나 있지 않냐?”
“어떻게?”
“난 일국의 국왕이다. 내가 원해서 못 알아볼게 어디 있겠느냐. 그리고 넌 나의 동생이다.”
“예, 있습니다.”
“흠, 그런데도 공주를 가지겠다!”
“가진다고는 안했습니다. 물어본다고만 했습니다.”
“만약, 공주가 허락한다면? 그리되면 너를 바라보는 두 여자는 불행해질 수 있다. 그녀는 평범한 집안의 여자가 아니다, 장차 뮬을 이끌어갈 여왕이 될 신분이다. 넌 그런 그녀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너의 여자들의 심정과 향후 그 처지는 어찌 되겠느냐?”
안소니 국왕의 말은 비수가 되어 딕스의 가슴을 헤집었다.
딕스 역시 이 때문에 많이 주저하였다.
만일, 자신의 최후라고 생각되는 그 시간이 그에게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마음을 아예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또한 그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공주님과 저와의 문제입니다. 감당이라 하였습니까? 살다보니 생각으론 절대 해낼 수 없는 일들이 막상 닥쳐보면 해내게 되더군요. 무책임한 말일 수 있지만... 한번 해보려 합니다.”
“진심이군.”
“진심입니다.”
“하아, 끄응, 여자냐? 의동생이냐? 이것이 문제로군. 딕스.”
“예.”
“오늘... 죽을 때까지 마셔보자. 그리고 내일 깨어나서 내 이 일을 생각해보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오랜만에 본 너와 서먹해지는 것도 싫고. 홉킨스 후작.”
“예, 전하.”
“시종들에게 일러 창고의 술을 모조리 내오라 하시오. 내 오늘 진탕 마셔보겠소. 아니, 아니오. 그냥 술 창고로 직접 가는 게 편하겠군. 딕스, 각오해라.”
술이라면 몸서리가 쳐지는 딕스다.
하지만 사랑이 걸린 일이다.
남자답게 딕스는 안소니 국왕의 도전을 받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일대일 승부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불합리하다.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다.
진열장 앞에서 술을 물처럼 마시는 룩센이 딕스에겐 오늘의 그 개똥으로 보였다.
‘저 술고래도 쓸데가 다 있다니... 하아, 이래서 오래 살고 볼일인가 보다.’
조금씩 인생을 알아가는 딕스다.
개똥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