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딕스전기-126화 (126/194)

126화

관료의 뒷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명성이 사람을 헤치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바릴레아의 주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딕스의 명성이 기득권자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늦장대응과 지원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할 그들의 질투.

그들의 하수인들이 안정을 되찾고 있는 바릴레아에 들이닥쳤다.

“나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자님을 왜 잡아가신단 말입니까? 안됩니다, 우린 절대 그분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성자라는 칭호는 함부로 쓸 수 없다.

이 호칭은 유일신 아르온의 집을 지키는 자들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한다.

호칭이 뭐 그리 대수냐! 라고 생각하면 이는 크나큰 오산이다.

이것은 잘만 이용하면 큰 세력을 만들 수도 있고, 부를 축적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정적을 소리 없이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무형의 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신관들에게 성자의 등장은 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 신관들이 바릴레아가 속한 영지의 영주를 꼬드겼고, 그 영주가 성자를 잡아오라 병사들을 급파했다.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더 팽팽한 대치양상을 띠었다.

“썩 물러서라! 그 더러운 손으로 어딜 감히 잡으려 드는 것이냐! 어서 그 놈을 대령하지 못하겠느냐!”

전염병이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다.

이렇다보니 병사들이나 장교나 선뜻 안쪽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이를 알 리 없는 주민들은 병사들이 곧장 안으로 들이닥칠까 봐 다들 긴장을 놓지 못했다.

주민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애원했다.

“나리, 그 분은 죄가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병든 저희를 도와줬을 뿐입니다. 오해를 푸시고 돌아가 주십시오.”

“돌아가 주세요!”

“제발, 가세요!”

관이 외면하고 신전이 외면했다.

이는 명백한 그들의 직무유기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아가는 지금 찾아와선 은인을 제 손으로 잡아 바치라며 이리 생난리다.

이러니 누가 그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겠는가.

주민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장교가 눈썹을 곧추세우며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었고, 병사들은 지닌 무기를 위협용으로 앞으로 내밀었다.

뒤쪽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분위기에 짓눌려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장내는 협박과 아이들의 울음으로 엉망이 되었다.

“성자님,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병사들이 성자님을 잡으러 왔습니다요. 어서요, 어서 가세요. 사람들이 놈들이 못 들어오게 막고 있을 때 가셔야해요.”

주민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숨 한번 돌리지 않고 급하게 딕스에게 말하였다.

내일부터 마을재건에 들어갈 자재를 점검하고 있던 딕스는 주민의 재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법 없이도 잘 살아갈 자신을 어찌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잡으러 왔단 말인가.

참고로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

딕스처럼 강력한 녀석들에게 법이란 귀찮은 올가미일 뿐이다.

어쨌든 딕스는 병사들이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이는 어제 깜빡 다른 생각을 하느라 룩센이 요구했던 음식을 망치면서 받게 된 스트레스도 단단히 한몫했다.

딕스는 어제 처음으로 알았다, 룩센에게도 감정이 실린 협박의 말투가 존재한다는 것을.

「멍청이.」

‘룩센, 이 자식은 어디 있지?’

이 마을을 고집한 건 룩센이지 딕스가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현재 딕스가 을이다.

그렇다보니 오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주민은 딕스가 동료가 걱정되어 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성자님은 너무 착하세요. 이 상황에도 동료까지 챙기시고, 어찌 이런 분을 죄인이랍시고 잡아가려고 하는지. 에잇, 못된 놈들.”

“일단 현장으로 가보죠.”

“아니, 그 무슨 위험한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병사들이 굉장히 난폭합니다. 정 동료분이 걱정이시라면 산속에라도 가 계십시오. 제가 오시면 산속으로 속히 가라 전하겠습니다.”

진심어린 주민의 걱정에 딕스는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하여, 주변에서 착하다고말해주면 어느새 선한행위와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역시 이와 같다.

‘차라리 욕먹는 게 낫는데. 이건... 휴우.’

“괜찮습니다. 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주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딕스는 대치중인 장소로 향했다.

그 시간, 룩센이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다.

한 무리의 병사들과 실랑이하는 주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룩센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그들 사이를 스쳐 마을로 들어오려 했다.

그때 병사하나가 룩센의 로브자락을 붙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넌 뭐냐?”

“룩센.”

“뭐?”

메마른 느낌이 물씬한 룩센의 대꾸에 병사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장내는 병사들과 주민들의 격앙된 분위기로 폭력사태로까지 비화될 조짐이 보였다.

어느 일방이 뒤로 물러나서 사태를 부드럽게 수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거나, 혹은 중재자가 말로써 풀지 않으면 원만한 해결은 어려울 듯 했다.

병사들의 강경한 태도가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 어찌 오래 있고 싶겠는가.

이들 모두 성자로 불리는 딕스를 잡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이런 상황에 룩센의 태도는 이 병사를 단단히 화나게 만들었다.

체구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병사가 룩센의 소매를 힘껏 끌어당겼다.

한데 병사가 당긴 것은 허공이었다.

병사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하였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어... 어떻게 된 거야?”

“대낮에 유령이라도 나온 거야?”

후방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웅성거림에 장교가 버럭 소리쳤다.

“근무 중에 어찌 잡담 질이냐! 안되겠다. 내 저것들에게 법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 뭣들 하느냐 돌격...?”

좀전 병사에게 옷이 잡혔던 룩센이 신기루처럼 장교의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돌격명령을 내리려던 장교는 룩센의 홀연한 등장에 깜작 놀랐다.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룩센에게 쏟아졌다.

그를 알아본 주민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룩센 님이잖아. 왜 저기 계시지?”

“어머나, 이일을 어째.”

주민들의 태도에 장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장교는 룩센을 성자로 오해하였다.

호박이 넝쿨째 코앞에 짜잔 하고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게 갖지 않겠는가.

장교의 검의 불을 뿜었다.

뾰족한 검 끝이 룩센의 얼굴을 겨냥했다.

“허억!”

“아!”

“크, 큰일이다.”

룩센의 진정한 실력을 알지 못하는 주민들은 한마음으로 그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앞으로 뛰어나와 그를 구하려고까지 했지만 병사들에게 잡혀 이불빨래처럼 이들의 발길아래 짓밟혔다.

퍽퍽퍽퍽!

“아악.”

“어이쿠, 그래... 죽여라! 죽여!”

“같이 죽자 이 썩을 놈들아!”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남자에겐 더 많은 발길질이 쏟아졌다.

용기를 낸 이들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제야 이 사태가 피를 볼 수 있음을 주민들이 실감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주민들이 뒤로 주춤거렸다.

겁도 없이 룩센이 자신을 겨눈 장교의 검 끝을 잡아서 그 방향을 틀었다.

그의 이런 행동에 장교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미친놈이!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냐!”

장교가 버럭 소리치며 검을 룩센 앞으로 밀었다.

그를 죽이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룩센을 성자라고 단단히 믿고 있는 장교였다.

앞서 위험을 감수하며 달려들었던 남자들 때문에 장교의 확신은 더욱 확고해졌다.

병사들이 밧줄을 가져와 룩센을 묶었다.

룩센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매듭을 단단히 한 순간 밧줄만 남고 그 안의 내용물인 룩센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 해괴한 일 앞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어떤 이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감쪽같이 사라졌던 룩센이 장교의 뒤에 나타났다.

흠칫한 장교가 몸을 돌리려다 이내 멈칫했다.

뒷덜미를 지그시 누르는 차갑고 서늘한 감촉.

“무, 무슨 짓이냐? 날 해치면... 너는 물론 이거니와 저 주민들도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병사들이 일제히 룩센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룩센은 예의 그 나른하게 늘어지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장교에게 말하였다.

“넌 재미없어.”

장교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근처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단검을 상대의 목에 들이댄 자의 입에서 재미없다는 말이 왜 나온단 말인가? 다들 그 말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사형판결임을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오직 한명!

“루우우우세~ 멈춰!”

룩센이 손을 멈추고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그곳에 주민들을 가르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딕스가 있었다.

“룩센! 그 녀석 죽이면 안 돼!”

딕스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제야 사람들은 룩센이 좀전 재미없다!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폭력과 살인은 다르다.

피를 보는 것과 시체를 보는 것은 또 다르다.

살인은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

때마침 딕스가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은 전장이 되었을 터였다.

뭐,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되어봐야 죽어나가는 자들은 병사들이다.

룩센이 주민들의 편을 든다는 가정 하에서.

룩센은 장교를 버려둔 채 공간을 이동하여 딕스 앞에 섰다.

매번 경험하지만 룩센의 이런 움직임은 늘 딕스를 놀라게 하였다.

모두가 룩센의 숨은 매력(?)에 질려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때, 저 멀리서 한때의 군마가 무서운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멈춰라! 영지군은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그 자리에 대기하라!”

“대기하라!”

두두두두두.

딕스는 싱그로아 국왕의 의동생이다.

그리고 뮬 공국을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능력자이기도하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딕스를 헥센 왕국으로 보내면서 회의석상에서 그의 진면목을 공개했다.

이는 동맹국들이 그간 공국의 저력을 너무 업신여기는 것 같아 자국에도 이런 능력자가 있음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공주의 이러한 행동은 즉각 각 동맹국의 수뇌부에 들어갔고, 딕스는 각국이 주목하는 자가 되어 있었다.

싱그로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이리로 달라오는 군대는 싱그로아 남부 중앙군으로 딕스를 영접하기 위해 달려오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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