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이들이 죽은 현장에서 딕스는 헌신적인 자세로 봉사활동(?)을 하였다.
노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물을 주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절실한 것을 적시에 제공하였고, 여기에 더해 제 돈을 들여 생필품과 식량을 구입하여 내놓기도 했다.
그의 선행은 성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라지 않다.
그리고 실제 다들 그를 성자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딕스의 속내는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똥밭에 가면 똥이 묻고, 물가에 가면 필히 옷을 적시기 마련이다.
괜히 병균이 득실한 곳에 있다가 그 병이 자신에게 옮아 붙으면 어쩐단 말인가.
이러한 두려움을 내심에 간직한 그였지만 적어도 겉으론 이를 티내지 않았다.
과묵한 물의 성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이처럼 생각했다.
실은 떠들면 병이‘어, 이놈 봐라 생생하네.’하고 달라붙을지 몰라 입을 다문 것이지만.
어쨌든 룩센이 이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기에 딕스 역시 이곳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식량과 생필품 사올 테니. 여기 있어라.”
자유롭게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딕스가 바로 지금처럼 돈쓸 때다.
딕스가 지닌 재력에 비하면 지금의 씀씀이는 세발의 피도 안 된다.
강물에서 물 한바가지 퍼다 주는 양이다.
“와인 떨어졌다.”
“그 와인만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
“끙, 알았다.”
룩센은 딕스를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한두 번이 아니기에 딕스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전에 딕스는 룩센에게 이대로 자신이 달아나버리면 어쩔래? 라며 정중하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룩센은 딕스에게 딱 한마디만 하였다.
「인간과 나무는 가지가 많다. 가지를 치다보면 줄기도 만나게 되지.」
녀석의 의미심장한 협박에 굴복한 딕스는 지금처럼 룩센의 위성으로 남기로 했다.
본성을 도는 서글픈 위성의 삶이란 늘 버겁다.
딕스는 짐마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벽과 지붕이 없는 짐마차다 보니 햇살을 그대로 맞아야한다.
그렇다보니 이동자체도 굉장한 고역이다.
여기에다 먼지까지 추가된다.
룩센이 한번 따라오고 그 뒤로 두 번 다시 따라오지 않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하아, 내가 지금 이 무슨 짓일까?’
깊디깊은 한숨이 딕스가 지금 느끼고 있는 서글픔의 크기와 답답함의 깊이를 여실히 말해준다.
마차를 몰던 이와 짐꾼으로 따라나선 주민들이 그의 모습을 보며 오해하였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착한 마음씨라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은 바릴레아다.
이곳에서 물품과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곳까진 마차로 반나절이 걸린다.
식량과 물품을 구입한 딕스는 다시 왔던 길을 되밟았다.
눈부신 햇살은 황혼이 되었고, 뜨거운 먼지는... 식은 먼지가 되어 목구멍에 달라붙었다.
하루 종일 형편없는 승차감의 짐마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 여기서 걸어갈 테니, 먼저들 가세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딕스는 가지가 길게 뻗은 나무를 마치 왕관이라도 되는 양 쓰고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세상은 온통 붉은색으로 곱게 물들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자연의 소박함은 그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병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걸까? 아니면,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들을 돕고 있는 딕스다.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익숙해졌다.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되었고, 그들이 성심껏 장만한 음식도 먹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우선하여 딕스를 배려하였고 챙기려하였다.
모두가 그를 귀히 여기며 말씨, 표정, 행동을 극히 조심했다.
이는 두려움의 바탕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었다.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은 간절함 바람의 바탕에서 꽃핀 마음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마음이 딕스의 호주머니를 열었다.
그게 없었다면, 그는 절대 그들을 위해 돈을 풀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전염병은 국가와 영지가 나서야할 사회적 재앙이다.
자신이 싱그로아인도 아니고 왜 외국인들에게 돈을 써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바릴레아 주민들은 더 이상 그에게 외국인도, 타인도 아니었다.
쏴아아아아. 사락사락.
황혼을 머금은 바람이 분다.
키 큰 풀하나가 딕스를 때린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상념 속에 빠져들었던 딕스는 놈(풀)의 멱살을 잡아 뜯어버렸다.
힘없이 뜯겨 나갈 것 같던 풀이 마지막 발악을 하였다.
서걱.
딕스의 손바닥이 풀잎에 베였다.
깊게 베이지는 않아 출혈은 많지 않았지만 살이 갈리진 그 느낌은 결코 좋지 않다.
더욱이 자신이 당분간 생활할 장소는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이다.
지금은 잠잠하다지만 몸에 생채기가 있으면 아무래도 더 위험할 수 있었다.
“이 망할 풀 놈이!”
원인은 딕스가 제공했다.
그 결과에 대해서 그는 모든 화를 풀에게 돌린다.
딕스는 풀의 잔뿌리까지 모조리 색출하여 휙 던져버렸다.
조잔하고 악랄한 놈이 아닐 수 없다.
손바닥을 펼쳐 상처를 바라보며 딕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피가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삼일이면 아물 경미한 상처다.
이 작은 상처를 그는 방치할 수는 없었다.
고가의 포션으로 이를 치료하려던 딕스의 뇌리로 번개가 쳤다.
모든 생명체는 그 내부에 고유의 항마력을 갖고 있다.
좀 전 딕스는 병에 대해서 생각했다.
병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면 당연히 항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의문이 그를 뜨겁게 자극했다.
외부에서 적을 공격하여 깨트리는 일은 어렵다.
공성전을 예로 들 수 있다.
내부에서 공격군을 호응하면 그 성은 금세 함락된다.
이와 같은 이치로 아무리 강력한 능력자라도 내부를 박살내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항마력의 상식.
딕스의 이러한 생각은 상식을 벗어난 놀라운 생각이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쥔 딕스는 상처가 쓰라려 깜짝 놀랐다.
송골송골 맺혔던 피가 주먹 안을 채우고 아래로 주르륵 흘렀다.
황혼을 머금은 피가 참으로 요사하고 아름다웠다.
‘... 피!?’
두근두근.
딕스의 심장이 이 순간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물을 다룬다.
물에 대한 지배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는 딕스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다른 물의 마법사와 차별화 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지배의 대상이 비단 물뿐이 아니라 액체에도 적용됨이 무척이나 특별하다는 점도.
안개와 독의 합성의 결과도 액체에 대한 지배력이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피는 안 될까? 모든 생명체는 내부에 액체가 있다.
만일 이를 자신이 지배한다면!
“룩센, 그 빌어먹을 개흡혈충부터 요절내버릴 거야!”
상식을 벗어난 상상이 그에게 희열을 주었다.
사악한 웃음이, 간사한 킥킥거림이 쉴 새 없이 그에게서 나온다.
왠지... 미친놈 같다.
요 근래 딕스는 웃을 일이 없었다.
그는 늘 인상을 썼고, 그는 늘 한숨을 내쉬었으며, 그는 늘 룩센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그렇다보니 그의 내부엔 엄청난 양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 쌓인 불만이 분출구를 찾아 이 순간 끊임없이 쏟아졌다.
딕스의 상상력은 더욱더 진화했고, 이를 현실로 반드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뿌리 내렸다.
팔랑팔랑.
나비하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딕스의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순간 딕스의 눈에 나비가 룩센으로 보였다.
그는 룩센을 죽이는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딕스의 피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피의 증발!
이 놀라운 현상을 딕스는 볼 수 없었다.
“뭐하냐?”
룩센이 신기루처럼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뭐, 뭐냐? 여긴 왜?”
“사람들이 너 여기 있다고 하더군.”
참고로 바릴레아의 주민들은 룩센을 딕스의 추종자로 여기고 있었다.
룩센은 이에 대해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딕스는 녀석이 자신의 수하로 사람들에게 여겨진다는 것이 흡족하여 모른척했다.
주변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본인만 아는 잘잘한 복수의 대가가 바로 이 녀석 딕스다.
“여깄다. 와인.”
1천 골드나 하는 고가의 와인을 어찌 덜컹거리는 짐마차에 실을 수 있겠는가.
비싼 놈은 그 값에 맞게 대우해야한다.
딕스는 품에서 와인을 꺼내어 룩센에게 내밀었다.
와인을 받아든 룩센이 앞장서 걸으며 말한다.
“오늘은 삶은 닭이 먹고 싶다. 달걀도 함께 삶아, 달걀은...”
“알아, 반숙.”
“똑똑하군.”
룩센의 칭찬이 딕스를 열 받게 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혼이 감싼 평화로운 언덕을 내려왔다.
멀리서 보면 그림처럼 멋지다.
퍼퍼퍼퍼퍼-퍽!
이질적인 작은 소리가 장소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일제히 났다.
귀를 기울여도 듣기 힘든 미약한 소리였지만, 이 소리의 내용은 응축된 힘이 내부에서 터질 때 나오는 소리와 유사했다.
이 소리를 제공한 존재는 별 볼일 없는 곤충.
딕스와 룩센이 떠난 언덕, 그 언덕을 중심으로 사방 10km내의 모든 나비의 몸이 일제히 폭발했다.
나비를 룩센이라고 생각한 딕스의 사념이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념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매개물... 그건 딕스 본인의 피였다.
어마어마한 살상범위와 놀라운 파괴력이 아닐 수 없다.
단언하건데 그 누가 이 기술을 피할 수 있을까? 어지간한 소도시의 생명체는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이다.
인간이 나비라는 가정 하에.
“나는 반숙 별론데.”
“넌 완숙 먹어.”
딕스의 불평에 룩센은 담담하게 말한다.
이에 딕스는 열이 받았다.
“너는 물 온도 조절이 쉬운 줄 알아? 고도의 정신력을 요구하는 매우 힘든 작업이야.”
앞서 걷던 룩센이 소리 없이 몸을 돌린다.
룩센의 얼굴은 여전히 후드가 가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두려움을 주고, 흐린 것은 불안감을 조장한다.
딕스에게 룩센의 저 후드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룩센의 평이한 반문에 당당하게 그와 맞서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딕스였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흘러나오는 공허하고 칙칙하며 묵직한 그 포스에 그만 굴복당하고 말았다.
패배를 자인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행위... 딕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내 수고를, 알아달란 거지. 끄응.”
“원한다면.”
이날 이후 딕스는 룩센에게 요리를 갖다 바치면 그에게서‘수고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룩센의 수용적인 자세가 참으로 감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