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딕스전기-110화 (110/194)

110화

딕스는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다.

강철로 만든 인간처럼 보이던 아버지의 눈에서 그처럼 뜨겁고 맑은 눈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에겐 머리가 멍멍해지는 충격이 되었다.

혀를 잃은 레이첼을 향해 기사의 예로 절하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향해 안절부절못하다 급히 맞절하다 바닥에 고인 장래 시아버지의 흥건한 눈물을 보고 그만 울음이 터진 레이첼.

오랜만의 가족상봉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딕스의 아버지 로버트와 레이첼에 의해서.

정작 이 자리의 주인공인 딕스는 제 3자로 밀려나 동떨어진 어머니 메들린과 겨우 눈인사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내가 아들인데? 흠, 그래도 분위기는 좋구나!’

주인공 자리가 위협받았다, 레이첼에게.

하지만 그녀라서 다 수용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을 딕스는 놓치지 않았다.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니 일부다처에 절대 반대하실 최대의 난적인 아버지가 순순히 허락해주실 것 같았다.

장내의 눈물이 진정되었고,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았다.

겨우 자리에 착석한 사람들이 취향에 따른 음료수를 몇 모금 마신 뒤에야 가족상봉의 정상적인 경로를 탔다.

“우리 딕스 많이 컸구나.”

딕스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어머니의 깊은 눈가 주름에 가슴 시렸다.

전에 없던 주름은 아니었지만 지금 보니 더 많이 늘어나셨고, 깊어지셨으며, 체구도 예전보다 훨씬 더 작아지셨다.

제 자신이 큰 것을 생각하지 못한 딕스다.

뭐,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앞서의 신파로 인해 혼이 쏙 빠진데다 어머니를 오랜만에 보니 울컥하는 감정이 샘물처럼 솟아 이성 따위 내세울 형편이 아니었다.

상경이후 그는 처음으로 무방비상태가 되었다.

“울 엄마 이제 귀부인 다 됐네. 헤헤.”

딕스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예전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데, 지금은 어머니를 품에 안을 만큼 컸다.

장성한 자식이 되었다는 것이 좋았지만 한편으론 슬펐다.

자신이 강해지고 커지는 만큼 어머니는 작아지시고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딕스.”

딕스의 이러한 기분을 그의 아버지 로버트가 깬다.

화들짝 놀란 딕스는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며 아버지를 본다.

“부르셨어요. 헤헤.”

“한두 살 먹은 아이더냐. 행동에 조심하거라.”

아들이 오랜 만에 만난 어머니를 안아주는 게 조심할 일인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머니의 남자가 그러지 말라는데, 그 남자가 자신의 아버진데.

“죄송합니다.”

사람들은 딕스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딕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고 생각했던 자라면 다들 지금의 그의 모습을 눈비비고 봤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 이 자리에서의 딕스는 순종적(?)이었다.

“사내답게 자랐구나. 전격의 파울 님께 모두 들었다. 가는 길은 다르나 전격의 파울 님과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셨음을 삼생의 영광인줄 알아야 하느니라.”

딕스의 눈동자가 재빨리 옆으로 돌아간다.

파울은 근엄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 대목에서 씩 웃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은 딕스다.

‘저 순진한 아버지를 푹 삶으셨구나!’

딕스의 아버지 로버트는 서열을 굉장히 중시하는 편이다.

그런 로버트에게 마스터 파울은 까마득한 존재였다.

한데 그런 사람이 직접 마중 나와 준 것도 모자라 아들 편에 가문의 마나호흡법의 잘못된 점을 정정해주었다.

이러니 파울은 로버트에게 평생의 은인이었다.

로버트는 파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여기서는 스승이라고 안하고, 사부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내 실례를 했구나.”

잘못은 또 즉각 인정하고 시정하는 사람이 로버트다.

“그리고 저도 사부님이 계셔서 무척 든든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절 아들처럼 잘 보살펴주시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뼈가 되고 살이 될 값진 배움을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니, 어찌 그 공을 제가 잊겠습니다. 그걸 잊으면 개소보다 못하죠. 참,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아버지.”

“말해보거라.”

“사부님의 따님이신 시모나 양과 혼인하기로 하였습니다. 아! 당장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레이첼과도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딕스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파울은 로버트에게 딕스의 혼인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로버트가 일부다처의 부분에서 반대하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했다.

현재까지 그 분위기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딕스는 이참에 모든 걸 확실하게 해결보기 위해서 레이첼, 시모나와의 혼인문제를 꺼냈다.

매도 먼저 맞아야 편하다.

아픈 거야 먼저 맞으니 더 아프지만 심리적인 안정감은 차라리 더 아픈 게 훨씬 나은 법이다.

편안하게 앉아 있던 파울의 자세가 긴장감으로 살짝 바뀐다.

레이첼과 시모나 역시 크게 긴장한다.

딕스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던 메들린은 아들의 선언에 놀란 토끼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레이첼과 시모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남편이 생각나서 재빨리 로버트를 본다.

장내의 모든 눈들이 로버트를 향하였다.

로버트는 딕스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내놓지 않은 채 몸을 돌려 파울을 보았다.

마스터 파울은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로버트의 눈빛에 움찔했다.

“파울 님.”

“예, 경.”

“제 아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하였으면 합니다. 실례인줄 아나 자리를 마련해주시겠습니까?”

겉으로 보인 로버트의 표정은 담담했다.

목소리 또한 잔잔했다.

사람들은 흔히 놀라고 분노하면 표정이 거칠어지고, 목소리가 커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로 화난 사람은 오히려 차분한 모습을 보인다.

지금의 로버트처럼.

딕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예전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집안의 사고뭉치 마크, 그가 엄청 큰 사고를 쳤을 때 로버트는 지금과 같은 태도로 마크를 두들겨 잡았다.

그 과격함은 마치 아들하나 없는 샘 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이 순간 딕스는 작은 형 마크와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했다.

‘수, 수면약이 어디 있더라?’

최악의 상황 아버지를 잠재워버리기로 결심(?)한 딕스다.

효와 생존은 별개의 문제니까.

@

파울의 즉각적인 배려로 로버트와 딕스는 둘 만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이 나가려했을 때 딕스의 어머니 메들린은 사색이 되어 남의 집에서 실례되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고 로버트에게 신신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딕스에겐 무조건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하라며 애걸하다시피 말했다.

메들린의 그와 같은 모습에 레이첼과 시모나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곤 로버트 앞에 엎드려 딕스를 용서해줄 것을 빌었다.

레이첼의 절박한 수화.

로버트가 어찌 레이첼의 수화를 알겠는가.

그녀의 옆에서 딕스를 용서해 달라 사정하는 시모나의 그 소리와 같은 의미일 것이라 짐작할 뿐.

불행한 일을 겪은 주군의 따님이 이처럼 간절하게 눈물로 호소하고 무릎 꿇는데 어찌 로버트라고 가만있었겠는가.

한바탕의 풍랑을 겪은 로버트.

“아들아.”

“예, 아버지.”

“네 나이가 몇이냐?”

아들나이를 물어오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재미눈으로 재빨리 훔쳐보는 딕스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닐 것이다.

딕스는 긴장하며 말했다.

“열일곱입니다.”

“내년이면 너도 성인이구나.”

“예.”

“네 큰 형도 1, 2년 안에 결혼할 것이다.”

생소한 이야기에 딕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째 형이라면 몰라도 큰 형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맞선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큰 형의 현 처지에 맞선은 가당치도 않다.

그러니 연애일 것이다.

“큰 형이요? 작은 형이 아니고요? 여자는 누구래요?”

어찌나 놀랐던지 아버지와 여기 나온 이유까지 까먹은 딕스다.

“헝프 자작님의 따님 리사 영애다.”

로버트의 말에 딕스는 굉장히 익숙한 이름들이라 느꼈다.

곧 그의 표정이 놀람을 담고 쩍 벌어진다.

“헝프 드 카논 자작님을 말하는 건가요? 이웃 영지의 그 영주님!”

“알고 있느냐?”

딕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데일 더 페논에 의해 겁탈당한 뒤 그 수치를 잊지 못해 자결한 비운의 여인이 헝프 자작의 둘 째 딸 리사 드 카논이다.

한데 그 비련의 여인과 큰 형이 연인이 되었고, 결혼을 약속했단다.

그렇다면 예지몽에서 발생한 그 끔찍한 재앙 같은 사건은 어쩜, 큰형과 데일과 리사의 삼각관계가 원인이 아닐까? 데일이 아무리 개망나니라곤 하지만 처음 본 귀족가의 영애를 겁탈할리 없다.

‘정말, 깜짝 놀랄 일이구나. 큰 형과 리사 양이... 하아.’

크게 놀란 딕스는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딕스는 헝프 자작 내외를 상경하는 중에 만났었다.

두 사람에게서 딕스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만약, 내외에게서 조금이라도 나쁜 인상을 받았다면 딕스는 카논 자작령을 공국의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안하길 천만다행이다.

“딕스.”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딴 생각을...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대요? 참, 그게 아니지, 그 얘길 왜 지금 제게 하시는지?”

큰 형의 러브스토리가 신기하고 놀랍긴 하다만 그건 큰 형의 연애사고, 지금당장은 자신의 연애사가 중요하다.

“어쨌든 집안의 장남이 우선 결혼해야한다.”

“아, 그 말씀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고마워할 것 없다. 너는 아느냐. 첩으로 살아가야 할 여자와 그 자식의 삶을. 넌 지금 한 사람의 인생을 크게 망치려하고 있음이다. 하아, 너희 세 사람의 뜻이 그처럼 굳건하지 않았다면 내 이 일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휴우, 딕스야.”

로버트는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기운에 딕스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연합과 달리 다른 나라들은 일부일처제다.

물론 편법을 사용하여 서출을 적자로 둔갑시키는 일은 많다.

하지만 제 자식을 내주는 그 어미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리고 평생을 첩이란 굴레로 살아가야할 그 인생은.

“... 예.”

“레이첼 영애는 내게 주군의 따님이다, 그리고 시모나 양은 가문의 은인이자, 네 사부의 따님이다. 아버지는 두 아가씨가 참으로 부담스럽구나.”

레이첼과 시모나가 정실과 첩으로 나눠지는 상황이 된다면 확실히 로버트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일 것이다.

“제가... 두 사람 모두 차별받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공국도 버릴 생각입니다.”

엘리자베스 공주 개인에겐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두 여자의 일생을 수렁에 빠트리면서까지 공국에 머물고 싶은 마음은 딕스에게 없었다.

딕스의 전신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이 산악처럼 일어섰다.

5서클 마법사의 힘과 기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실제 딕스의 능력이라면 어느 나라, 어느 세력에 가더라도 크게 환영받을 위치에 있었다.

“이곳을 택할 것이냐?”

딕스는 아버지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로버트의 담담한 태도에 딕스는 순간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화, 화 안내십니까?”

“난 가장으로서는 결격이 많은 남자다.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알지만 나를 바꿀 수 없었다. 나의 신념이 내 가족에게 부담을 주었다. 그래서 늘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딕스야.”

딕스는 아버지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혀 예상을 못했기에 아버지의 고백에 딕스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로버트는 가족과 신념사이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그는 신념을 택하였지만 가족이 늘 눈에 밟혀 몰래 가슴으로 울었다.

가장이란 그 무게... 쇳덩이처럼 단단한 남자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 예.”

“넌 남자다, 네가 선택한 인생이 곧 너를 믿고 의지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미래다. 그래서 난 너의 결정에 간섭할 생각이 없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건 그건 남자로써,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의 네 몫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런 너를, 내 아들을 존중할 생각이다.”

딕스는 아버지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았고, 그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딕스가 입을 연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 작품 후기 ============================

2013년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