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딕스전기-109화 (109/194)

109화

아브람 일가족의 몰살이 알려지자 야니시아 부족은 긴장과 불안감으로 들끓었다.

거리마다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엄중한 검문검색을 하였다.

외지인에 대한 사람들의 경계심도 자연 높아졌다.

봄은 깊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은 지독한 어둠과 겨울이 찾아들었다.

딕스는 말 못하는 레이첼을 위해 수화선생을 구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소통을 위해 딕스는 자신의 수련시간을 쪼개가며 레이첼과 함께 수화를 배웠다.

뒤 늦게 시모나도 여기에 합류했다.

“선생.”

“예, 딕스 님.”

“똥주바리 주 차삘까!를 수화로 해보시오.”

뜬금없는 그의 요구에 다들 멍한 표정이 되어 그를 본다.

딕스는 여선생에게 눈에 힘을 주며 강요했다.

그러자 여선생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딕스의 요구를 수화로 표현했다.

한데 그 모습이 참으로 민망하고... 야했다.

이에 딕스는 헛기침을 여러 번 한 뒤 레이첼과 시모나에게 말했다.

“저딴 건 절대 하면 안 돼.”

수화선생은 졸지에 저딴 걸 하는 저질이 인간이 되고 말았다.

레이첼과 시모나가 배를 잡고 웃는다.

딕스는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수화선생에게 말하였다.

“미안하오, 수화선생. 내 그게 그리 민망한 표현이 나올지는... 음, 엄마는 못 걸지만 진심으로 몰랐소. 알았다면 절대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오.”

딕스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는 레이첼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알면서도 수화선생에게 이를 시킨 것이다.

세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수화를 배웠다.

하지만 딕스의 배움은 레이첼이나 시모나 보다 압도적으로 빨랐다.

이에 놀란 두 사람이 딕스를 천재 보듯 하였다.

그러나 이건 딕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만큼 열심히 노력했기에 얻은 결과였다.

‘아 잠 온다.’

딕스는 10시면 어김없이 잠자는 규칙을 깨면서 새벽까지 수화를 연습했다.

레이첼이 자신과의 대화에 불편을 느낄까 싶어서다.

수화 수업이 끝나자 세 사람은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레이첼, 시모나.”

딕스는 레이첼과 시모나를 자신의 여자로 인정했다.

그러다보니 시모나에 대한 그의 말투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시모나는 그의 이러한 변화를 크게 기뻐했다.

그 때문일까? 딕스를 바라보는 시모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촉촉하고 고혹적이었고 달콤했다.

“예, 딕스 님.”

“......?”

“나중에 우리끼리 있을 때 똥주바리 함 해줘.”

여신 레이첼과 미녀 시모나.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수화하는 그 모습을 본다면 이보다 더한 진풍경이 또 어디 있을까싶다.

장난으로 시작한 딕스는 기필코 그 모습을 보리라 다짐한다.

열화와 같은 딕스의 요구에 두 사람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오른다.

“디, 딕스 님, 제발 그것만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시모나가 떠듬거리며 말하였다.

레이첼은 빠른 수화로 봐달라며 애걸했다.

하지만 여기서‘그래, 그러자’라고 순순히 응할 딕스가 아니다.

“나도 똥주바리 해줄게. 나중에 하자, 모두 하는 걸로. 탕탕.”

제 남자의 결정에 두 여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어떻게 하면 좀더 예쁘게 순화시켜서 똥주바리... 를 보일까 연구한다.

딕스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내심 이를 연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또 예뻐 보였던지 두 사람을 데리고 한 1년은 방에 박혀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겐 반드시 끝내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이를 끝내기 전까지 딕스는 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맛만 살짝 보며 지낼 생각이었다.

‘룩센... 내가 널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여기 두 개나 더 생겼다. 난 절대 너에게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딕스는 결의를 다진다.

@

아브람 일가의 몰살사건은 야니시아 전체를 발칵 뒤집었다.

분노한 카티온 족장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전담팀을 꾸렸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범인은 그 윤곽조차 잡히지 않았다.

흉흉하고 살벌한 분위기가 펼쳐졌지만 정작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딕스는 태연하기만 했다.

하나 그런 그 조차 우려하는 자가 딱 한명 있었다.

그는 전격의 파울이다.

국경요새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파울.

평소와 다름없이 딕스는 태연한 미소를 얼굴에 드리우며 그를 맞았다.

남녀노소가리지 않고 수백 명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자치곤 너무 착한 얼굴이다.

“사부 오셨습니까.”

사부이자 이제 자신의 장인이 될 남자.

딕스와 파울의 시작은 좋지 못했지만 지금은 매우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지금 그 관계에 변화가 닥칠지 모를 상황이다.

“제대로 사고 쳤더구나.”

파울의 말투는 무덤덤했다.

딕스가 아브람 일가를 몰살한 범인으로 밝혀졌다간 자이라 부족 전체가 곤란에 빠질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파울의 저 담담한 태도는 그 역시 보통의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딕스는 파울의 이런 모습에 더 긴장했다.

이러한 긴장감을 드러낼 만큼 표정관리가 허술하진 않지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그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제 선택은 똑 같을 거예요.”

“327명이다. 이아브까지 더하면 328명이군.”

“생각보다 많더군요.”

“그들만이 아니지.”

“암살자조직까지 다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하비옷 총관이 미리 손을 썼더군요. 그거... 사부의 지시겠죠?”

딕스는 자신의 행위가 파생시킬 사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 일을 막기 위해 외부부터 정리한 뒤 아브람의 저택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외부정리를 하려고보니 하비옷 총관이 이미 정리를 해버린 상태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왜 있겠느냐. 그래도 이번 일은 심했다고 본다. 이아브, 그 아이만 처리해도 좋았을 것을.”

말이 328명이다.

그중엔 남녀노소에 임산부까지 포함됐다.

물론 그들은 강력한 수면제로 인해 잠자다 변을 당하여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딕스 역시 그들에겐 직접적인 원한이 없었기에 나름 배려한 것이다.

혹시라도 레이첼이 지금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다면 딕스는 그보다 더 심한 짓을 그들 모두에게 두고두고 저질렀을 터였다.

“저만 공격했다면 저도 그렇게까지는 안했을 겁니다. 사부.”

“독한 놈. 음, 아무튼 밖이 상당히 소란하니 당분간 넌 얌전히 있어야할 것이다.”

“저 원래 조용한 놈입니다. 사부.”

파울과의 어색해질 수 있는 부분이 쉽게 넘어갔다.

딕스는 이에 크게 안도했다.

“정말이지, 넌 위험한 십대다.”

“애들이 원래 그렇잖아요.”

“쯧, 너 좋을 때만 애를 찾는구나.”

“사부도 10대하세요. 이게 굉장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빽 이더라고요.”

한마디도지지 않고 꼬박꼬박, 당당하게 대꾸하는 딕스의 태도에 파울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사실 파울은 아브람 일가의 사건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 일로 인해 아끼는 제자의 심경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이를 더 우려했다.

모름지기 남자란 독해질 땐 한 없이 독해져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이가 파울이다.

“네가 내 친아들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사위도 아들입니다. 헤헤.”

“잘 난 놈.”

“제가 좀 그렇죠.”

“시모나를 잘 부탁하마.”

“제 여잡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미운 놈.”

“제가 좀 다채롭죠. 그런데 일정보다 앞당겨 오신 것 같습니다.”

하비옷 총관이 차와 요구르트를 가져온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끊고 각자의 것을 든다.

그러다 파울이 무슨 생각인지 딕스가 손에 쥔 요구르트와 자신의 차를 바꾸자며 불쑥 내밀었다.

“바꾸자.”

“싫은데요.”

“이 차는 무척 비싼 것이다. 명품이다.”

“압니다. 사부의 고상한 차 사랑을 왜 이 제자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왜?”

“시모나가 절위해서 만들어준 것이거든요.”

“끙, 그 아이 원래 요리 안하는데.”

“아버지와 남편이 같습니까?”

딕스의 뻔뻔한 태도에 파울은 할 말을 잃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하비옷 총관이 입을 가리며 큭큭 거렸다.

파울의 눈총을 받자 하비옷 총관은 급한 일이 있다며 줄행랑을 놓았다.

두 사람은 그 모습에 대소했다.

“곧 네 부모님이 오실 것이다. 그래서 내 일정을 서둘렀다. 그리고 너도 좀 걱정이 되기도 했고.”

“... 제 걱정은 마세요. 이래봬도 제 앞가림은 영악하게 잘 합니다.”

“알고 있다. 촌구석 꼬맹이의 성공담을 왜 모르겠느냐.”

명색이 한 세력의 우두머리다.

그런 파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기로 한 그에 대해서 어찌 알아보지 않았겠는가.

“남의 뒤나 캐는 거 안 좋은데. 뭐, 사부니까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저... 사부.”

“뭔데 그리 끈적끈적한 눈으로 날 보는 게냐?”

“제가 전에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저희 아버지 굉장히 고지식합니다. 그 성격에 제가 레이첼과 시모나를 아내로 삼겠다고 하면 노발대발하실 겁니다. 제가 다른 건 다 안 무서운데, 아버지는 조금 무섭거든요.”

정말 난처한 표정으로 어깨를 푹 떨어뜨린 그의 모습에 파울은 파안대소했다.

“내 너의 아버지와 필히 의형제라도 맺어야 할 것 같구나! 하하하하하.”

“사부,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진짜, 저희 아버지 완전 고지식합니다. 필요하다면 제 가족의 목을 베고도 나라와 주군을 위해 전장으로 나갈 사람이 제 아버집니다. 사실, 저 같음 그리 안 해요. 전쟁이 불리하다 싶음 가족 데리고 달아나버리지. 아무튼, 그런 사람이니까. 사부가 잘 좀 해주세요.”

딕스의 말에 파울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이 크게 생겼다.

“그러한 부친 밑에 너 같은 녀석이 태어나다니. 역시, 자식은 겉 낳지 속 낳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말이구나. 그런 의미에서 요구르트랑 차 바꿔 먹자. 내가 한 번도 딸자식이 한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구나.”

“어쩐지, 알고 바꿔 먹자고 했군요. 거참, 시모나도 너무하네. 어째 아버지를 위해 손수 요리한번 안했답니까?”

“너 지금 내 딸 불효녀라고 욕하는 것이냐?”

“제가요?”

“그 말투와 그 표정이 그리 말하였다.”

진지하고 무겁던 주제는 이렇게 가볍게 흘러간다.

이해받고 싶었던 딕스는 파울이 변함없이 자신을 믿어준 것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 고마움의 표현으로 딕스는 자신의 요구르트를 파울에게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사부.”

파울은 순간 기분이 우울해졌다.

딸자식 낳아봐야 다 소용없다던가? 요구르트를 먹는 파울이 인상을 쓴다.

“이거... 쓰구나.”

“아닌데, 단데... 사부 미각이 좀 이상하군요.”

“딕스야.”

“예.”

“내 진심으로 말하마.”

“......?”

“너도 내 딸 같은 딸자식 낳았으면, 참으로 좋겠구나.”

파울의 말이 딕스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힌다.

같은 남자로서, 그리고 미래에 아버지가 될 처지로서...

“태어나서 이렇게 무서운 악담은... 처음이네요. 사부.”

@

레이첼과 시모나는 열심히 꽃단장을 하였다.

자이라의 권역으로 장차 시부모가 되실 딕스의 부모님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준비를 하였지만 계속 미진한 구석이 자신에게서 보이는 두 사람이다.

잔뜩 굳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레이첼과 시모나는 웃음이 빵 하고 터졌다.

다정한 이들의 모습을 넓은 창턱에 앉은 딕스가 흐뭇하게 본다.

집안의 평화는 여자가 다스린다.

여자 하나도 벅차 헉헉 거리는 가장들이 세상에 어디 한 둘이던가.

그런 이들에 비해 딕스는 2배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런 걱정은 없을 듯했다.

“곧 오실 건데 언제까지 화장이랑 옷이랑 씨름할거야. 저기 산더미처럼 쌓인 옷과 지쳐 나가떨어진 하녀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딕스가 현실을 지적하자 두 사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변을 보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두 사람은 아직 처녀다.

저들이 앞으로 결혼 2, 3년차 유부녀가 된다면 절대 보이지 않을 수줍음이다.

지금 이순간이 딕스에겐... 봄날이 아닐까 싶다.

수컷은 순간을 정복하지만, 암컷은 평생을 다스린다.

이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 딕스에게도 올 것이다.

인생에서 진정한 과제가 무엇인지.

“죄송해요. 딕스 님도 준비를...”

시모나가 말하고, 레이첼은 수화로 말한다.

“난 거적때기만 걸쳐도 그림이잖아. 여기서 더 멋 내면 아버지께 욕 들어 먹어. 우리 아버지 검소한걸. 좋아하시거든.”

무심코 던진 그의 말에 미래 시아버지를 위해 두 사람은 단장했던 것을 모두 처음으로 돌려버렸다.

“너무 하세요. 왜 그런 중요한 말씀을 지금 하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네.”

레이첼도 수화로 시모나의 말을 열심히 거든다.

두 여자의 모습에 딕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그 방을 나와 버렸다.

“그냥 아무거나 걸치면 되지. 뭘 그리 열심인지. 나참 이해가 안 되네. 이해가.”

“딕스 님.”

“아, 바로 천장. 오늘 쫙 빼입었네. 맞선이라도 보나봐.”

며칠 전부터 파울의 저택은 일꾼들이 청소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이 모든 게 딕스의 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그렇게 다들 바쁘고 긴장했다.

부모님을 오랜만에 만날 그 아들은 오히려 담담하였다.

“귀한 분들이 오시는데 어찌 남루한 모습으로 있겠습니까.”

“내 부모님들은 그리 격식 따지는 분들이 아니신데. 다들 지나치게 부산스럽군.”

말은 이리했지만 딕스는 내심 뿌듯했다.

자신을 위해서 모두가 기쁘게 수고해주는데 어찌 고맙고 기쁘지 않겠는가.

다만 이런 표현이 서툴러서 괜한 말을 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 보다 사부님은?”

“직접 마중 가신다며 나가셨습니다.”

바로의 말에 딕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자이라의 상급부족인 야니시아의 족장이 찾아와도 제 방에서 맞을 위인이 전격의 파울이다.

한데, 그런 그가 직접 마중까지 나갔다고 한다.

이는 딕스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뭐야? 사부도 긴장한 거야?’

딕스가 어찌 알까 딸자식 가진 아버지의 고달픈 심정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