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하레이슈 대협곡.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신비와 장엄함이 살아 숨 쉬는 땅.
이곳을 보노라니 자연의 대역사가 참으로 감동스럽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선 한 남자에게 억겁의 시간과 대자연의 창조적인 역사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로 천장.”
하나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고, 하나의 분노로 가슴이 터지기 직전인 딕스.
그러나 또 하나의 그는 지극히 냉정하다.
“예, 딕스 님.”
“아무도 내 뒤를 따르지 마세요. 내 뒤를 따르는 자... 그가 누구든 제 손에 죽습니다. 그러니 모두 데리고 돌아가세요. 가는 길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을 선고하겠다는 이야기를 딕스는 참으로 담담하게 하였다.
그 잔잔한 어조에 오히려 바로는 소름끼치는 섬뜩함을 느낀다.
“디, 딕스 님.”
“내 말은 끝났습니다.”
딕스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대협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고 작은 골짜기를 따라 바람이 분다.
어떤 곳은 바람소리가 천둥 같고, 어떤 곳은 맑은 시냇물이 졸졸 거리는 소리 같다.
바로는 멀어지는 딕스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자이라 족의 정예전사대를 동원하였다.
하지만 딕스의 섬뜩한 경고가 떠올라 바로는 도저히 그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딕스 님의 그 표정은... 진심이었다.’
결정을 내린 바로는 말 잔등으로 몸을 날렸다.
고삐를 말아 잡아 쥐고, 말머리를 돌린 그가 소리친다.
“철수!”
바로와 자이라 족 전사들의 존재감이 멀어지더니 완전히 사라진다.
딕스는 물의 척후를 통해 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 머물고 있는 존재감이 있다.
이들은 지금 은밀히 딕스를 쫓는다.
놈들은 은밀히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물의 척후를 호흡하듯 늘 활성화시키고 살아가는 딕스에게 그들은 이미 노출됐다.
황량하고 거칠고 위험한 대협곡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
열에 아홉은 적 일터.
레이첼을 찾고, 놈들을 족쳐서 원흉을 밝힌다.
그리고 지난 삼일 자신의 피를 말리고, 레이첼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 놈을 찾아가 대가를 톡톡히 받아낼 것이다.
자비와 타협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살심이 딕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다.
지금 그의 또 다른 잔인한 본성이 깨어난다.
걷는다, 하염없이 그렇게 딕스는 하레이슈 대협곡을 걸었다.
벼랑에서 자갈과 말라비틀어진 풀과 잔가지가 떨어진다.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볼 법도 한데 딕스는 오직 전방만 보며 유령처럼 걷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를 관찰하던 자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이들은 죽음을 선물하는 암사자들이다.
이들의 본능이 이들을 향해 강력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눈앞의 자... 위험하다! 라고 하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
대협곡에 발을 디딘지 만 하루가 흘렀다.
지도에 표기된 아돌의 미궁까지는 앞으로 반나절.
이를 확인한 딕스는 대협곡을 감싼 자연스러운 안개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했다.
안개는 곧 딕스가 장악하였다.
딕스는 안개에 수면 약을 풀었다.
약은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정확하게 이동했다.
그림처럼 딕스는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 앉아 있었다.
숨을 쉬는 것인지, 아닌지 겉으로 봐선 전혀 알 수 없다.
그의 모습은 흡사 바위와 동화된 듯했다.
그렇게 30여분을 득도한 성인처럼 앉아 있던 그에게서 다른 움직임이 일어난다.
“시리우스.”
딕스는 나직이 자신의 영원한 반려를 부른다.
완전마력문장에 안착한 물의 핵 오메가가 움직인다, 다섯 개의 띠(서클)가 맹렬하게 가동된다.
거대한 힘이 딕스의 전신에서 발산됐다.
그 힘은 곧 주변의 물의 기운을 모아 하나의 뚜렷한 형체가 되었다.
마법 골렘 시리우스.
“놈들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딕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시리우스는 급류처럼 움직였다.
딕스는 시리우스가 올 때까지 명상을 하며 기다렸다, 흥분으로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급할수록 멈춰야 한다.
무턱대고 미궁으로 들어갈 생각은 버려야한다.
들어가더라도 주변정리를 확실히 뒤 들어간다.
그것이 올바른 처신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를 주지시키는 딕스다.
그렇게 20여분의 시간이 흘렀다.
시리우스가 물의 그물을 끌고 장내에 도착했다.
물의 그물 속에는 깊이 잠든 13명의 사내들이 겹쳐져 있었다.
“깨워, 시리우스.”
딕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시리우스는 거대한 물 덩어리를 사내들의 위쪽에 생성하였다.
촤아악!
몸이 흠뻑 젖은 자들이 몽롱한 표정으로 꿈틀거렸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려면 자극이 좀더 있어야 할 것이다.
딕스는 놈들이 정신을 다 차릴 때까지 계속하여 물 덩이를 퍼붓도록 시리우스에게 명령했다.
“하푸풉!”
“콜록콜록.”
“헉! 여, 여긴...?”
13명의 사내들이 의식을 차렸다.
놈들은 주변을 둘러보곤 하나같이 경악했다.
4미터 크기의 마법 골렘과 감시하던 자가 눈앞에서 자신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침착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마, 마법사!”
“고... 골렘!”
사내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그리고 그 순간 이들은 본능적으로 무기를 빼들며 딕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놈들은 삶의 비상구를 제대로 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택한 비상구는 만만한 출구가 아니다.
무기를 움켜쥔 사내들의 손은 제대로 움직여보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였다.
서리가 깔린 그 손은 극심한 고통을 사내들에게 주었다.
“크아아아악!”
“커헉!”
“으으으.”
13명중 10명이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나머지 3명이 그 손을 했음에도 딕스를 향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참으로 대단한 의지다.
딕스는 이들을 향해 조촐한 선물을 마련했다.
서리의 안개가 놈들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속에서 놈들은 비명한번 지르지 못하고 얼음덩이가 되었다.
앞서 주저앉은 자들이 이를 보며 기겁하였다.
딕스는 이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독백처럼 말하였다,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크기다.
“설치면 죽는다.”
쩌쩌-쩡! 퍼억!
얼음이 된 3인의 몸뚱이는 딕스의 독백이 끝나는 순간 쩍쩍 갈라지더니 일제히 터졌다.
작은 알갱이가 된 동료의 모습에 사내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제야 이들은 깨달았다.
눈앞의 앉아 있는 자의 심성을.
“그녀는 미궁에 있느냐?”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딕스의 음성과 삭막한 눈길이 한 사내를 지목한다.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덩이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에 딕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이 신호인 것일까? 석상처럼 서 있던 시리우스가 사내의 정수리를 물의 도끼로 찍어버렸다.
사내의 상반신이 잘 마른 장작이 쪼개지듯 단번에 쪼개졌다.
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 남자는 두 번 묻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미궁에 있느냐?”
좀전과 똑 같은 음성과 눈길로 딕스가 말하였다.
두 번째로 지목당한 사내는 말없이 몸만 떨었다.
딕스가 원하는 대답을 사내는 하지 않았다.
시리우스의 손이 이 사내를 움켜잡아서 비틀어 뜯어버렸다.
이 모든 행위는 딕스의 명령에 의해서다.
사람의 육신이 비틀려서 뜯기는 장면을 두 눈으로 지켜본다는 행위는 멀쩡한 정신으로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여기 있는 자들은 암살자로 길러진 자들이다.
끔찍한 장면과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지만 그 때문에 다들 정신만은 잃지 않았다.
그리고 또렷한 정신은 살기 위해서 2차 공격행위로 이어졌다.
이를 두고 볼 딕스가 아니다.
딕스는 놈들의 다리를 모조리 얼려버린 뒤 발끝부터 부서지게 만들었다.
물의 지배자는 잔인하고 단호했다.
놈들에게 딕스가 원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입뿐이다.
그 외의 것들은 어찌되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미궁에 있느냐?”
역시 좀전과 똑 같은 음성과 눈길로 딕스가 말했다.
여기에 지목받은 사내는 짙은 분노와 살기를 표출하며 딕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놈은 자신이 퍼부은 저주 그대로 딕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상반신만 남은 자들이 더욱더 공포에 질렸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이 생각이 지배적으로 사내들의 머릿속에 뿌리를 내렸다.
몇몇이 눈치를 보더니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그러곤 이를 목구멍에 털어 넣으려 했다.
이 또한 방관할 딕스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곧 전체의 양팔 파괴로 이어졌다.
“크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모두를 지배했다.
딕스는 이들의 비명이 진정될 때까지 차분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어차피 이리 된 거 죽여라!”
삶을 포기한 자가 등장했다.
“알았다.”
딕스는 반항심을 버리지 못한 남자를 그의 뜻대로 죽였다.
하지만 앞서와 달리 쉽게 죽이지는 않았다.
천천히 삶아서 죽였다.
사람의 육신이 장작처럼 쪼개지고, 낡은 걸레처럼 비틀려 찢겨지고, 얼어서 터지다 못해 이제는 삶은 고기가 되는 장면까지.
엄청난 공포와 항거할 수 없는 절망 앞에 암살자들 모두가 낙담하고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모두 입 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딕스도 독하지만 놈들도 만만치 않게 독종이다.
“음...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했나보군.”
원독과 분노와 두려움이 가득한 사내들이 딕스를 본다.
이들을 향해 딕스는 담담하게 이리 말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한방.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인간은 없지, 땅에서 툭 튀어나오는 인간도 없지, 살다보면 좋은 인연 하나둘 맺기 마련이지, 그 인연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먹게 되지, 너희도 그럴 것이다.”
부르르.
암살자라고 하여 어찌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누군가의 피를 손에 묻힌 그 대가로 자신만 호의호식하려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딕스는 교묘하게 그 부분을 파고들어 사내들의 상상력을 부채질했다.
정상적인 고문과 협박으로는 암살자들의 입을 열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방법에 문제가 있다면 바꾸면 된다.
사내들의 상상력이 그들 자신을 지배할 때까지 시간을 주어야한다.
일분일초가 아깝고, 피가 마르는 딕스에게 기다림은 지옥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고, 그 순서를 무시하면 반드시 후회가 따르는 법이다.
“아, 안에 있소!”
한 사내가 울부짖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암살자들이 발설한 사내를 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이 사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해가 될 여지를 남겨두는 일은 암살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앞서 보았듯 눈앞의 남자는 그게 무엇이든 담담하게 저지를 인간이다.
진정으로 무서운 인간이 바로 저런 타입이다.
제 목숨을 이미 포기한 암살자들.
이들에게서 지난 시간이 추억의 책장처럼 펼쳐진다.
“납치를 사주한 자, 누구냐?”
딕스의 이 질문에 순간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처음으로 발설한 자가 고뇌를 표정에 깊게 드리우며 물었다.
“그, 그를 어찌 할 거요?”
“죽인다.”
“그... 그만 죽일 거요?”
암살자의 질문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내포하는 것을 딕스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딕스의 눈길이 절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암살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고 지나간다.
“그만 죽지 않을 것이다.”
“음... 하긴 당신의 심성을 보니, 그 여자를 보게 되면 그럴 것 같군.”
사내의 말에 딕스의 두 눈이 점점 작아진다.
“무슨 뜻이냐? 너의 그 말은!”
딕스의 음성이 천둥처럼 대협곡을 쩌렁쩌렁하게 퍼져나간다.
극도로 흥분한 그 목소리가.
콰르르르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