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레이첼이 납치된 지 삼일이 지났다.
파울의 저택 분위기는 이 일로 인해 기침소리하나 나오지 않는 적막지대가 되었다.
끼이익.
저택의 철문을 열고 수문장 전사가 나온다.
큰 덩치와 우락부락한 인상이 쳐다보기만 해도 겁나게 생겼다.
하지만 수문장은 자신의 덩치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소심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이 저택의 주인인 파울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이며, 자이라의 미래가 될 남자의 두 번째 부인이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저택은 물론 자이라 족의 모든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 이건 뭐지?”
묵직해 보이는 검은 상자하나가 발밑에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수문장이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자와 함께 정문 경비를 맡은 조의 전사들이 나온다.
“버켄 조장, 그건 뭐요?”
“그 상자 칙칙한 게 느낌이... 안 좋네요. 아침부터 보기엔.”
수문장 버켄이 상자를 한손으로 들고 흔든다.
이 모습에 그의 조원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상자의 크기는 일반인이 한손으로 들기 힘들다, 그리고 상자는 언뜻 보면 쇠로 만들어진 듯해 무척이나 무거워 보인다.
그런데 그것을 넉넉하게 한손으로 쥐고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어댄다.
이와 비슷한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들에겐 볼 때마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이래서 늘 주목 받을 수밖에 없다.
“조장, 그게 뭔 줄 알고 그리 흔들어요? 귀중한 거라도 들었음 어쩌려고.”
“그러게. 조심해요.”
짙고 무성 버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일명, 송충이 눈썹이다.
하지만 이 눈썹이 버켄의 얼굴에 달려 있으니 도적도 상 도적으로 보인다.
강렬한 그의 인상을 더욱더 무장시켜주는 송충이 눈썹.
오랫동안 버켄을 봐온 조원들도 이 모습엔 움찔한다.
“깨지는 물건은 아니다. 그리고 딱딱한 물건도 아니고. 너희는 근무서고 있어라. 내 총관님께 다녀오마.”
인상을 잔뜩 구긴 버켄이 큰 걸음으로 총관실로 향한다.
사람은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버켄 역시 그런 인물이다.
‘납치범이 보낸 것일 수 있어. 내용물의 가벼움으로 봐선 편지 일지 몰라.’
딕스의 일은 더 이상 그 만의 일이 아니다.
자이라 족의 일이요, 전사들의 일이 되었다.
소수이기에 더욱더 결집이 잘 되는 자이라 부족.
그 부족민 하나하나가 지금 딕스를 염려하고 있다.
그 중에 버켄도 포함된다.
똑똑.
“총관님, 2조 수문장 버켄입니다.”
“들어오게.”
안쪽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버켄은 공손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발을 들였다.
실용미를 추구한 검소한 실내.
이곳은 총관 하비옷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첫 근무가 2조 아닌가? 근무시간에 무슨 일인가? 버켄.”
수문장의 근무시간표까지 외우는 이가 하비옷이다.
그러나 버켄은 놀라지 않았다.
저 남자의 철저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대문에 이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총관님.”
버켄에게서 검은 상자를 받아든 하비옷의 인상이 긴장으로 오므라든다.
상자를 이리저리 살피던 총관이 작은 단추를 누른다.
버켄도 이 단추를 발견했지만 누르지 않았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
버켄이 추측한대로 편지가 있었다.
아니, 편지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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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이 방으로 하비옷 총관과 바로, 시모나가 앉아 있다.
이 방의 주인은 창가 턱에 엉덩이 반쪽을 걸친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래로 살짝 내린 그의 얼굴의 옆선이 사람들의 가슴을 벤다.
힘과 날카로움이 살아 숨 쉬는 완벽한 턱선.
하지만 이 순간 그 턱 선은 면도날이 되어 보는 이의 가슴을 여지없이 베고 있었다.
심사숙고하는 그의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숨을 조이는 강렬한 아우라.
시모나는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을 혀로 급히 핥으며 입을 열었다.
“딕스 님, 가시면 안 됩니다. 그곳은 위험한 미궁이에요.”
오늘 아침에 배달된 쪽지엔‘하레이슈 대협곡 아돌의 미궁’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 쪽지의 작성자가 납치범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쪽지를 무시할 수 없는 건 시기적절하게 쪽지가 왔기 때문이다.
아돌의 미궁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에 의해 미궁은 2천 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이 미궁은 곳곳이 붕괴되었고, 지금도 붕괴가 일어나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으로 쪽지는 안내하고 있었다.
하비옷 총관과 바로도 시모나의 만류에 힘을 보탠다.
“딕스 님,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또한 쪽지를 보낸 자가 납치범이... 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총관의 말은 중반 이후부터 힘을 잃었다.
쪽지를 의심하기에 너무 시의적절 했고, 전달방식이나 상자의 재질도 값비싼 것이다.
장난이라 보기에 모든 정황이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납치범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해졌습니다. 놈은 미궁과 딕스 님을 매몰 시키려는 계획이 분명합니다.”
바로는 납치범의 입장에서, 그리고 딕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입장에서 생각했다.
그런 위치에서 생각하니 아돌의 미궁은 상대를 끌어들여 없애기는 최적의 장소였다.
현재까지 아돌의 미궁은 미지의 영역이다.
입구가 출구인 곳.
학자들이 오랫동안 그곳을 조사했지만 미궁의 100분의 1도 조사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이유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으로 범인이 딕스를 부른다.
재고의 여지조차 없이 단정할 수 있다.
어찌 딕스가 이를 모르랴.
제 목숨과 제 가족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 남다른 인물이 그다.
그럼에도 그가 이처럼 깊게 고민한다는 이유는 레이첼에 대한 그의 마음의 반증이기도하다.
목숨 걸고 좋아하는 여자.
딕스에게 레이첼은 그런 여자였다.
“절 염려하는 세분의 마음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일입니다.”
창턱에 걸쳤던 엉덩이를 내리며 딕스는 일어섰다.
그러곤 모두를 눈에 힘을 주고 보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하였다.
사실 겁이 난다.
미궁이란 곳이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고 하니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안 돼요!”
시모나가 달려와 딕스의 팔을 잡고 눈물로 매달린다.
그녀의 돌발행동은 총관과 바로를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이는 시모나의 평소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딕스는 자신의 팔을 양손으로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툭툭 쳐주었다.
그러곤 상황에 맞지 않게 웃었다.
“시모나 양, 절 잘 모르시나본데. 저 굉장한 놈이랍니다. 오죽, 굉장하면 시모나 양의 부친이자, 제 사부이신 전격의 파울님이 장장 19개월을 쫓아다녔겠습니까? 하하, 아! 이상한 쪽으로 상상은 금물이에요. 그분이나 저나 이성관은 뚜렷합니다.”
도리도리.
시모나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채워 놓았다.
고개를 흔들자 그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어찌나 서럽고 아프게 우는지 보는 사람의 가슴이 다 뭉클해질 지경이다.
이일로 시모나는 딕스에게 그리고 총관과 바로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다 내보였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보일 수 있는 표현의 진액으로 말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찌 이를 딕스가 못 알아보겠는가.
그에게 시모나는 호감으로 마음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첼과 달리 느낌이 매우 모호했다.
그래서 그는 시모나에게 거리를 두었다.
이런 딕스를 이해해준 것인지 그녀도 행동과 표현에 조심했다.
지금 둘 중 하나가 그 경계를 넘어서버렸다.
생사가 달린 일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어쩜 외사랑을 하고 있는, 사랑 앞에 약자인 시모나의 입장에선 절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에 수줍고 소심한 여인이 생애 처음으로 용기를 냈다.
그 어떤 달콤한 고백의 말보다 더 크고 진실 된 모습으로.
“... 음, 레이첼을 걱정해주시는 마음이라 알겠습니다. 뭐, 하긴 제가 있어야 레이첼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하하.”
억지를 편다. 딕스는.
지금 이 상황에서 시모나의 마음에 감동했다고 표현해버리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마음속으로 딕스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결심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가벼운 말투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의 속내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 무겁고 단단하다.
시모나는 딕스의 눈빛에서 이를 보았다.
저 까맣게 반짝이는 신비로운 눈동자에 실린 의지는 그 무엇도 깰 수 없다.
죽을힘을 다해 딕스의 팔을 잡고 있던 시모나의 손은 그래서 힘이 빠진다.
투욱.
시모나의 가녀린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간다.
총관 하비옷과 바로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짓눌려버렸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채 닭똥 같은 눈물만, 말없는 가운데 하염없이 떨어뜨리는 시모나.
남자의 보호본능을 미친 듯이 자극한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딕스의 손이 시모나의 머리에 올라간다.
그의 이 행위는 이 땅의 여자들에겐, 가족에겐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요, 이성간에는 너의 마음을 받아줄게, 사랑해와 같은 의미가 된다.
딕스는 나름 연합에 대한 전통과 문화에 대해 많이 안다.
자신의 이 행위가 무엇을 말함인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로 하여금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냥 감정이 시키는 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해버렸다.
하고나서 그는 크게 당황했다, 아니 약간은 후련한 기분도 있다.
시모나가 고개를 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얼굴은 마지막까지 떠 있는 새벽의 별을 보는듯했다.
“나... 기다릴게요. 여기서, 당신이 올 때까지... 당신의 손길을 내 영혼에 담아두고 여기 있을게요. 함께 오세요. 레이첼과 함께... 꼭 와주세요. 약속해요. 그럼, 잡지 않을게요.”
“갔다 올게요. 시모나 양. 참, 얼마 전에 낑낑거리고 들고 가던 과일로 요구르트를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그거 꼭 와서 먹을게요.”
“아, 아셨어요?”
“전 귀도... 굉장하답니다. 갔다 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는 알리지 마세요. 이건 한 남자가 제 여자를 지키는 일이니까.”
제 여자를 지키기 위한 남자의 일이라 딕스는 선언했다.
신성한 그 선언은 더 이상 참견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자리에 전격의 파울이 있었더라도 딕스의 발길과 의지를 꺾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잘 갔다 오라며 무심한 얼굴로 어깨만 툭툭 쳐주고 말았을 것이다.
남자에게 이 행위는 그 어떤 전선의 선봉장보다, 더 명예로운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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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움직였습니다.”
“그래도 사내군. 제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다니. 놈이 증오스럽지만 같은 사내의 입장에서 그의 행동에 대한 보답을 하지 않을 수 없군. 그녀를... 미궁에 던져놓아라. 그녀를 찾고 죽던가, 못 찾고 죽던가는, 이제 놈의 운에 달렸다. 가라.”
따뜻한 5월 초의 햇살이 생명의 힘을 부쩍 일으킨 아름다운 정원.
고급스러운 느낌의 의자에 앉은 연약한 인상의 소년의 입엣 무척이나 무서운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봄과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 명했다.
그리고 겨울 황무지를 보는 듯한 느낌의 남자가 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시립을 풀고 정원을 빠져나간다.
소년이 연못을 향해 무언가를 뿌린다.
그러자 벌떼처럼 아름다운 잉어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저 잉어는 육식어.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포착되면 그게 무엇이든 뼈조차 남기지 않기로 유명한 잉어 과의 육식어 피란자.
‘명예를 아는 남자였다면... 내 형을 절대 그렇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꾸욱.
소년이 주먹을 쥔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주먹이... 꼭 쥔 그 주먹이 소년의 분노를 머금고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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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투성이님 군대 잘 다녀오세요.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