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자이라 족과 달리 아달로 족은 야니시아에 거의 흡수된 상태다.
모든 것이 야니시아 화되어가는 아달로 족은 오늘날에 와서는 그 이름마저도 그들 속에서 조차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부족민의 단결심도 예전만 못했다.
이러한 아달로 족에 비해 자이라 족의 단결력과 자긍심은 참으로 높다 아니할 수 없다.
딕스는 바로와 함께 아달로 족의 주술사 허세로의 집을 방문했다.
주술사 허세로의 집은 크지 않았다.
유지라도 아주 가난한 유지가 아닐 수 없다.
쿵쿵.
바로가 현관문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바로.”
“예, 딕스 님.”
“그만해요. 집안에 사람이 없어요.”
바로가 여러 번 불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딕스는 물의 척후를 통해 집안을 확인했다.
허세로의 집은 크지 않았지만 제법 넓은 마당이 딸린 2층 벽돌집이다.
이쯤 되면 집안에 일하는 자들 두 서넛은 있기 마련이다.
바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딕스 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주변에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고급주택단지가 이곳이다.
넓은 길가에 오가는 것은 고용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짐을 낑낑 메거나 들거나 하며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전부다.
가끔 마차가 지나가기도 한다.
그것도 20~30분에 한 두 번씩이다.
‘조용하군.’
딕스는 바로가 올 때까지 허세로의 집 담장을 따라 돌았다.
느긋하게 담장을 돌던 딕스의 표정이 살짝 경직된다.
방금까지 허세로의 집안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한데, 지금 막 존재감이 나타났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딕스는 다시 허세로의 집 대문 앞에 섰다.
바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쿵쿵.
딕스는 대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문은 바로 때와 달리 부드럽게 안쪽으로 밀렸다.
‘뭐지?’
귀신이라도 들린 집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바로 때와 달리 이처럼 대문이 쉽게 열릴 리 없다.
딕스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그는 유령이나, 혹은 연합인들이 말하는 귀신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이것에 대한 두려움은 노력으로 고쳐지는 게 아니다.
어렸다면 고성방가를 하여 두려움을 쫓겠지만 이 훤한 대낮에, 그것도 남의 집안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싫어도 싫다고 말 못하고, 무서워도 무섭다 말 못하는 처지다.
그놈의 사회적 체면이 뭐기에.
“커험. 집안에 사람 있는 거 압니다. 아니까, 들어갑니다!”
딕스는 활짝 열린 대문 앞에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미적거리며 크게 소리쳤다.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하다못해 마차라도 지나갔으면 좋겠다.
슬프게도 개미새끼 한 마리보이지 않았다.
바로라도 빨리 와줬음 좋겠는데, 그도 오지 않는다.
이래저래 이 상황이 난감한 딕스다.
그러나 곧 딕스는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물의 척후는 존재감 둘을 여전히 보고한다.
아직도 이 보고는 유효하다.
‘물의 척후가 유령은 감지하지 못하잖아!’
대문 문턱하나 넘었을 뿐인데 딕스의 등 쪽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다른 건 다 안 무서운데 오직 유령만 무서운 딕스다.
딕스가 파울에게 쫓겨 다니며 노숙하던 시절에 그가 가장 괴로웠던 부분이 바로 이 유령이다.
대문에서 현관문으로 쭉 이어지는 푸른 조각 장판 석을 밟으며 딕스는 걸었다.
조잔하게 걷다보니 장판 석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밟는다.
그의 속도에 화가 났는지 현관문이 별안간 활짝 열린다.
쾅!
이에 화들짝 놀란 딕스는 몸을 뒤로 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주변을 의식하며 자세를 풀었다. 이어 헛기침과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동시에 닦으며 몸을 바로 폈다.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하하, 봄인데... 날씨가 여름처럼 덥구나.”
활짝 열린 현관문 안쪽에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열어주지 않았다.
이건 확실하다.
딕스는 주저했다.
정말이지, 다른 건 다 안 무섭다.
지금이라도 당장 백만 대군을 향해 맨몸으로 달려들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령만은... 유령의 새끼도 두렵기만 한 딕스다.
‘레이첼이라도 데려올걸.’
딕스와 바로가 외출하자 이를 보게 된 레이첼이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이에 딕스는 단호하게 여자가 따라올 곳이 아니다! 라는 말로 그녀의 동행을 거절했다.
그랬던 딕스는 지금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라도 괜찮다 옆에 사람만 있으면 된다.
“거기서 탑 그만 쌓고 들어와라.”
활짝 열린 현관문 안쪽에서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말의 내용은 짜증이 가미되어야 한다.
들어올 놈이 들어오지 않고 미적이고 있다면 누구나 이에 짜증을 내기마련이다.
하지만 이 목소리엔 그러한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감정결여의 목소리.
‘룩센!’
딕스의 동공이 갑자기 확장된다.
깜짝 놀란 딕스는 날짜계산에 들어갔다.
룩센은 딕스에게 2년의 시간을 주었다.
정확하게는 딕스의 18세 생일까지다.
고로 내년 7월 7일까지 룩센과 딕스는 만날 일이 없어야한다.
그런데 오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보게 되었다.
아직은 목소리뿐이지만.
유령에 대한 두려움 따위 이 순간 먼지처럼 딕스의 마음에서 날아간다.
‘놈이 왜 여기에 있지?’
얼굴을 잔뜩 구긴 딕스는 물의 척후를 더욱더 활성화했다.
그리고 전투를 대비해 그동안 익힌 기술들을 빠르게 점검하였다.
과연 이 기술이 놈에게 먹힐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놈이 약속을 깨고 자신의 목숨을 취하려한다면 죽을힘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의를 다진 딕스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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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로의 집 거실에 룩센이 주인처럼 앉아 있었다.
정작 이집의 주인 허세로는 거실 벽에 사지를 활짝 펼치고 붙어 있었다.
이런 그의 발목과 팔목에 쇠못이 박혀 있다.
쇠못의 머리는 허세로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붙박이 수납장처럼 박혀 있는 허세로의 발아래 목이 반쯤 잘린 끔찍한 모습의 남녀노소가 카펫처럼 펼쳐져 있었다.
딕스의 얼굴에 서릿발이 순간 우뚝 솟는다.
“그동안 잘 지냈어? 혈색도 얼굴도 몰라보게 좋아졌군. 아, 명성도 좋아졌더군. 거기 앉아. 아!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지?”
피범벅인 허세로가 딕스를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허세로의 입안이 텅 비어 있었다.
혀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본 딕스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푸줏간을 차릴 생각이냐? 그렇다면... 위생에 신경 써야 장사가 잘 될 거야. 요즘, 불경기인건 알지?”
딕스... 이놈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그 가장이 사지에 못이 박혀 벽에 걸려 있는 참혹한 장면 앞에서 이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역시, 마음에 들어. 어서 빨리 열여덟 네 생일이 왔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너에게 나의 아트를 보여줄 텐데.”
말의 내용상 설레는 마음과 기쁨이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룩센의 표정과 말투엔 그런 감정이 전혀 없다.
룩센을 보면 마치 말하는 밀랍인형 같은 느낌을 크게 받게 된다.
문제는 밀랍인형의 차가움마저 룩센에게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놈은 진정으로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딕스는 룩센의 맞은편에 앉았다.
양가죽으로 만든 카펫은 죽은 자들이 흘린 피를 먹어 기분 나쁘게 질척거렸다.
“여긴 무슨 일이지?”
룩센이 당장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딕스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
가장 큰 고민이 떨어져나가자 이제 현실적인 의문이 찾아들었다.
놈이 왜 허세로의 집안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느냐다.
“너도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고, 지시받은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와봤지. 사실은 널 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딕스는 소름이 돋았다.
룩센의 고백 앞에.
저 고백이 좀 가식적이면 덜 할 텐데 진심이 너무 묻어나온다.
레이첼에게 저 말을 들었다면 딕스는 황홀함에 취해버렸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놈은 레이첼이 아니다.
토악질을 욕으로 대신하는 딕스다.
“조랑말 고기 씹는 소리하고 자빠졌군.”
“톡톡 쏘는 너의 매력이 다시 한 번 날 흥분시키는군.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고 커가고 있어. 훌륭해.”
변태 상 또라이 룩센이다.
그 상 또라이가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먹고 자고는 물 건너 간 일상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딕스는 잘 먹고 잘 자며 이제까지 지내왔다.
물론 룩센을 처치하기 위한 수련에 박차를 가하면서.
딕스의 표정에 기분 나쁜 티가 선명하다.
하지만 이 기분에 휘둘릴 딕스가 아니다.
“왜지? 왜 아달로의 주술사를 저리 만든 거지?”
“주술에 대해 알고 있나?”
무표정, 무감정의 룩센에게서 처음으로 감정의 빛깔이 짧은 순간 굵직하게 보였다.
딕스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딕스는 모든 신경을 룩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있었구나! 제길, 어젯밤에라도 왔어야 했는데.’
이 순간 딕스는 자신의 엉덩이를 저주했다.
이전의 그는 생각이 나면 즉시 실천하는 실천 파였다.
하지만 현재의 딕스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주변상황을 고려하여 움직이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 자신의 파급력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보려고 왔다.”
“후후, 내가 한발 빨랐군. 다행인줄 알아. 네가 나보다 빨랐으면... 난 눈물을 머금고 널 죽여야했다구.”
룩센의 말에선 진심이 뚝뚝 묻어난다.
무감정의 완결판 같은 인간에게서 말이다.
순간, 딕스는 섬뜩함을 느꼈다.
당장을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내내 목안의 가시가 될 것 같다.
룩센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허세로를 향해 손목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허세로의 목이 720도 회전을 한 뒤 뽑혀나갔다.
잔인과 엽기와 호러의 완결판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럼에도 딕스는 눈썹하나 까딱이지 않았고, 그를 내내 안보는 듯 하면서도 주시하고 있던 룩센은 그의 이런 점을 다시 즐거워했다.
룩센에게 딕스는 특이한 방향에서 즐거움을 주는 녀석이었다.
그것이 딕스의 목숨을 시한부이긴 하지만 연장시켰다.
“좋아, 좋아, 날 다시 기쁘게 해줬으니까. 하나만 가르쳐줄게.”
“귀는 열렸으니 듣겠다.”
“재능자의 실종을 조사해봐라. 그럼, 네가 여기 온 목적의 해답에 좀더 접근할 수 있을 거야.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정말 너무 착해서 탈이야. 후훗, 이만 가봐야겠어. 다음에 또 봐. 귀염둥이. 후훗.”
유령처럼 룩센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물의 척후도 룩센의 존재감을 파악하지 못했다.
룩센의 이 한수가 다시 한 번 딕스의 마음에 쓰라린 패배감을 불러일으킨다.
‘재능자의 실종과 주술에 연관이 있는 건가?’
머릿속처럼 딕스의 표정도 이 순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진다.
주술사 허세로의 죽음.
재능자의 실종.
검은 주술.
이 모든 걸 시원하게 관통할 무언가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룩센이 건네준 작은 힌트.
그 힌트를 찾기 위해서는... 다시 공국으로 가야한다.
‘부모님 오시면 함께 귀국해야겠군.’
============================ 작품 후기 ============================
그동안 꾸준히 딕스를 보아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담아 한편 더 올립니다.
여러분께 보답할 수 있는 저의 유일한 선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즐겁게 보내시고,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 건강하게 마무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처럼 늦은 밤, 매일 방구석에 처박혀 소맥에 라면 끓여 먹지 마세요.
참고로 라면을 안주 화 하는 저만의 레시피는.... 국물이 없도록 바짝 졸이는 겁니다.
짠맛이 죽여줍니다. ^^;;
이런 거나 가르쳐 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 다시 냉장고에 소주와 맥주를 보충하러... 점방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