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딕스는 자이라 족 전사 300명을 이끌고 몬스터 출몰지역으로 출발했다.
이 어린 초짜 지휘관에 대해 자이라 족은 많은 기대를 갖고 지켜보았다.
사람을 깐깐하게 가려 쓰는 자신들의 족장 파울이 직접 뽑은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모두의 기대 속에 몬스터 출몰지역에 도착한 딕스의 부대는 군영을 차렸다.
이곳에서 하루를 푹 쉰 다음 딕스의 부대는 몬스터 출몰지역 안쪽으로 진입했다.
물의 척후를 통해 딕스는 몬스터의 위치와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다 알고 부대를 움직이니 완벽한 효율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무도 모르게 마법을 사용하여 전사들이 최상의 조건에서 싸울 수 있도록 상황을 조장하기도 했다.
전사들은 17세 소년의 귀신같은 용병술에 다들 깜짝 놀라 혀를 내둘렀다.
예년보다 큰 성공을 거둔 몬스터 토벌이 끝이 나고 딕스는 부대를 몬스터 출몰지역 인근 마을 옆에 군영을 차리게 했다.
부대를 여기에 남겨둔 딕스는 홀로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 움직였다.
붉은 대가리 오크 족.
오크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가장 호전적인 놈들이다.
올해 몬스터 토벌대가 유일하게 만나지 않은 놈들이기도 했다.
여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저건 내거.’
그렇다 놈들은 딕스가 독식하기 위해 감춰둔 것이다.
안개를 이용하여 자신의 모습과 냄새를 지워버린 딕스.
그가 접근했지만 오크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놈들은 인간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인간의 군대와 다름이 없었다.
만일 저 놈들이 민가로 내려온다면 그 지역은 쑥대밭이 되고 말리라.
‘흠, 552마리라.’
저 놈들과 몬스터 소탕대가 정면으로 맞붙었다면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시리우스.”
딕스는 자신의 마법 골렘을 소환했다.
골렘이 등장하면서 그 존재감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붉은 대가리 오크들이 시리우스의 존재감을 느끼곤 일제히 술렁거렸다.
“가라!”
오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딕스는 시리우스를 보냈다.
시리우스의 물의 마법이 먼저 오크들을 강타했다.
굉음도 없고, 화려한 빛도 없다.
소박하지만 실용적인 마법이다.
뼛속까지 파고든 차가운 한기에 오크들의 행동은 굼떠졌다.
굼벵이처럼 느린 놈들을 향해 시리우스는 물의 검을 채찍처럼 길게 만들어 휘둘렀다.
채찍의 검이 대지를 한 번씩 휩쓸 때마다 오크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몸뚱이가 잘리고, 피를 분수처럼 뿜어대며 쓰러졌다.
시리우스의 발길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공할 5서클 마법 골렘의 위용은 저 호전적인 붉은 대가리 오크마저 겁쟁이로 만들었다.
딕스는 멀찍이서 이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너무 약해...”
시리우스에 의해 오크 절반이 순식간에 죽어 자빠졌다.
또 다시 시리우스가 일으킨 한기가 주변으로 내달린다.
일방적인 학살이다.
딕스는 시리우스를 전장에서 빼버렸다.
마법 골렘에게 저항할 엄두도 못 내던 오크들은 시리우스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딕스가 채우자 두려움을 잊고 흉성을 터트렸다.
붉은 대가리 오크는 아직 2백 마리가 남았다.
딕스는 시리우스를 배제한 채 저들과 싸울 생각이었다.
그와 가까이 있던 오크들이 광폭한 살기를 뿜어대고, 괴성을 질렀다.
몸이 굳어지고, 정신이 멍해지는 살기와 괴성이다.
딕스는 여기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차갑고 단단한 눈빛으로 몰려오는 놈들을 쓸어볼 뿐이다.
오크와 딕스의 거리는 불과 5미터.
이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던 딕스는 아래에서 위로 팔을 검처럼 그었다.
딕스의 팔의 궤적이 지나간 곳에 물방울이 응집하였다.
응집된 물방울은 액체형태에서 한기를 뿜어대며 전방으로 쏘아졌다.
시리우스에게 변변한 대항조차 못하고 당했던 오크들은 딕스를 상대로 그 화풀이를 할 생각만 했지, 인간이 홀로 겁도 없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어리석음 놈들에겐 2차 재앙의 시작이었다.
“쿠에에에엑!”
“케에에에엑!”
“켁!”
응집된 물방울에 공격을 받은 오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터트리며 일제히 쓰러졌다.
물방울이 스친 놈들의 상처 부위에 하얀 서리가 깔려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서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 뿌리는 놈들의 살과 뼈와 내장을 꽁꽁 얼려버렸다.
아직 놈들은 살아 있었다.
신체 일부가 냉동되어 움직이지 못할 뿐이다.
딕스는 놈들을 차갑게 쓸어본 뒤 올렸던 팔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냉동된 오크의 부위가 폭발해버렸다.
가공할 냉기!
생명체의 몸을 순식간에 얼리는 마법은 쉬운 게 아니다.
이 마법은 마나소모가 몹시 심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물의 마법사인 딕스에게 상대를 제압, 살상하는데 가장 효율적이었다.
신체 일부를 움직여 물방울을 응집시켜 냉기를 만들어 본 딕스.
이후 그는 의지만으로 물방울을 응집시킨 뒤 냉기를 생성하였다.
그의 신체 주변으로 서리안개가 깔렸다.
이 안개에 닿은 오크들은 얼음동상이 되어 픽픽 쓰러졌다.
15미터.
서리안개를 온 몸에 휘감고 딕스가 지나온 길이다.
그의 뒤로 서리에 뒤덮인 오크들이 쓰러져 있었다.
괴물!
오크들은 딕스의 전투능력에 기가 질려버렸다.
남은 놈들이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쩌쩡!
몸이 얼어버린 오크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파편이 무서운 기세로 사방으로 날아가 나무와 바위에 틀어박혔다.
실로 가공할 살상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전장에서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적군을 상대한다면 과연 누가 있어 딕스가 소속된 군대와 싸우려할까?
후퇴를 모른다는 붉은 대가리 오크.
서리안개를 두른 딕스의 모습이 평생 악몽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마법시전속도와 살상력이란 측면에서 딕스의 이번 실험은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상대가 룩센이라면...
‘부족해.’
처참하게 망가진 주변을 둘러보는 딕스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그때, 저만치 달아나는 오크가 보였다.
사방으로 튄 파편에 당했는지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살아보겠다고 악착같이 달아나는 그 모습을 보니.
“안 죽은 놈도 있었군.”
서리의 물방울이 화살처럼 놈에게 날아갔다.
이 오크의 비명을 끝으로 붉은 대가리 오크들이 모조리 전멸했다.
딕스의 마나는 아직도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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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는 30일 만에 몬스터 토벌대를 이끌고 파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룬 전공에 자이라 부족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깜짝 놀랐다.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는 토벌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딕스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더불어 파울의 사람 보는 안목에 대한 평가역시.
파울의 집무실.
“수고했다. 그래 도움이 좀 되었느냐?”
“마법만 시원하게 펑펑 쓰고 왔습니다.”
“흠, 후련해보이지는 않는구나.”
딕스의 표정에 깔려 있는 작은 그늘을 놓치지 않는 파울이다.
“그 자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접근방식을 또 달리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성급하게 마음먹지 말거라. 성급하게 움직이면 꼭 중요한 것을 놓친다.”
“명심하죠. 참, 공국에서 연락은 왔습니까?”
“없었다.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느냐?”
할 수만 있다면 딕스와 공국을 떼어 놓고 싶은 이가 파울이다.
하지만 강제로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강제와 음모가 들어가는 행위는 반드시 부작용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갖는 방법은 오직 정도와 진심뿐이다.
그래야만 오래가고 뒤탈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를 알기에 딕스를 욕심내면서도 파울은 직접적인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은 룩센을 상대할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피곤한 것 같은데 가서 쉬어라.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시모나와 레이첼 양이 널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더라.”
“레이첼이요?”
레이첼이 보이지 않아 내심 섭섭함을 느끼고 있던 차에 파울의 말은 딕스를 기쁘게 하였다.
파울은 시모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그의 태도에 꽁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시모나와 레이첼의 미모는 현격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나서는 딕스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파울이다.
이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어릴 때는 외모가 최곤 줄 알지. 너도 나이 들면 그 생각이 분명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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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는 야니시아의 족장 카티온으로부터 연회 초대장을 받았다.
갈 마음이 없었지만 파울의 입장을 고려하여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파울은 서북쪽 국경지역 요새를 점검하느라 여기에 없었다.
카티온 족장이 보내준 마차에 딕스가 올라탔다.
그의 양옆엔 각각 레이첼과 시모나가 앉아 있었다.
레이첼을 위해 시모나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옷을 수선하여 그녀에게 선물했다.
평범한 옷을 입어도 아름다운 레이첼이다.
여기에 꾸미기까지 했으니.
“너무 예쁜데. 흠.”
“왜 그렇게 보세요. 부끄럽게.”
“오늘 나 내내 긴장해야겠어. 수컷들이 레이첼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말이야. 하하하.”
호탕한 딕스의 말에 레이첼은 부끄러웠지만 가슴 한편으론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다 자신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모나를 보곤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시모나 님, 이 옷과 장신구 정말 감사드려요.”
“아, 아니에요. 레이첼. 시간이 넉넉했다면 새 옷으로 해주고 싶었는데.”
그제야 딕스는 시모나를 본다.
레이첼과 비교하면 시모나는 평범한 여자다.
그녀의 비교대상이 레이첼이 아니면 시모나는 분명 아름답다.
시모나 역시 자신의 미모에 나름 자부심을 가진 여자였다.
레이첼이 나타나면서 그녀의 조용한 자부심은 이슬처럼 조용히 그 마음에서 쓸쓸이 퇴장했다.
여자들에게 민폐가 되는 여자가 바로 레이첼이다.
“참, 시모나 양.”
“예, 딕스 님.”
딕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시모나는 몹시 기뻐했다.
그게 눈에 보인다.
문제는 다른 이들은 이를 느끼는데 정작 당사자인 딕스는 전혀 모르고 있다.
“카티온 족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간의 평가를 말씀드리자면,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인물이라고 알려졌어요.”
“그에 대한 사부님의 평가는 알고 계십니까?”
시모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이나 지난 사건들이 그를 독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있으셨어요.”
“사부님이 그리 말씀하셨다니... 흠, 신중하게 대할 인물이군요.”
“딕스 님이시라면 잘 하시리라 믿어요. 아버지께서 출타하시면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딕스 님과 상의하여 결정하라. 라고 하셨거든요.”
파울의 지나친 기대는 사실 딕스 역시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파울의 그늘을 떠나기는 어려웠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룩센 때문이다.
딕스가 생각한 룩센은 정상적인 놈이 아니었다.
그러니 2년 후를 기약했지만 갑자기 그 마음을 바꿔서 불시에 방문할 수 있다.
그때를 대비해 딕스는 파울이 필요했다.
급하면 파울과 협조하여 놈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공국엔 능력자가... 없어도, 너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