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엘리자베스 폰 뮬 공주, 그녀에게 딕스는 든든한 비장의 카드였다.
한데, 그 비장의 카드가 당분간 연합에 머물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때의 공주는 싱그로아 왕국의 안소니 국왕으로부터 청혼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였다.
안소니 국왕의 청혼소식에 온 공국이 반가움으로 들떴다.
상인과 여행가와 관광객을 통해서 싱그로아의 역량과 현 통치자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국혼이 가져올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안보와 외교적인 문제 등등.
국내의 여론은 공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는 바람이 불었다.
공왕 알리힐 역시 두 사람의 결합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든 이들이 안소니 국왕과 엘리자베스 공주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공주는 아직 자신의 뜻을 밝히지 않은 채 함구하고 있었다.
“라스 남작, 그에게 문제라도 발생한 것인가요?”
연합을 흔들어 북부 5자 동맹 결성을 무산시키려던 제국의 음모는 딕스에 의해 깔끔하게 분쇄됐다.
딕스의 전공을 전해들은 공주는 매우 기뻐했다.
싱그로아에서 이 소식을 듣고 내내 그를 만나기를 소망하며 바람처럼 달려왔던 엘리자베스였다.
무심한 딕스는 라스 남작을 통해 2년의 휴가를 청하는 서신만 달랑 들려 보낸 뒤 연락을 끊어버렸다.
공주는 안소니 국왕이 자신에게 청혼한 소식을 듣고 딕스가 화가 난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딕스는 공국의 인재, 동생삼고 싶은 남자애, 비장의 카드에서... 함께 인생의 종착지까지 걷고 싶은 남자로 가슴에 담겨 있었다.
그랬기에 조건이 완벽한 안소니 국왕의 청혼을 비공식적으로 거절하였다.
안소니 국왕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저...”
라스 남작이 말끝을 흐리자 엘리자베스 공주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딕스에게 문제라도 생겼다면 당장이라도 연합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공주의 태도에 라스 남작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딕스가 공주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애정일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두 사람의 신분과 나이차이 때문이다.
“말하세요. 라스 경. 그에게 일이 생겼나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엘리자베스 공주다.
“쌍마를 움직였던 자가 있었습니다. 앞서 보고 드린... 제가 보기에 딕스 경은 그 자를 뛰어넘기 위한 수련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이는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닙니다. 같은 남자로서의 감일 뿐입니다. 공주님.”
엉덩이가 내내 의자위에 떠 있던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라스 남작의 말에 그제야 그녀의 엉덩이는 의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2년이라... 라스 남작도 알겠지만 그는 지금도 충분히 강해요.”
공주의 말에 라스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전격의 파울이 딕스를 좋게 보아 제자로 삼고 지도를 해준다고 하니, 딕스 경 개인을 생각하면 참 다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공국과 제 입장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요. 휴우, 라스 경.”
“예.”
“그에게 전하세요. 허락한다고. 하지만 수련만... 수련만 하라고 전하세요. 안 그럼,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여자가 봐도 놀랄 미녀인 레이첼.
전격의 파울의 미모의 외동딸 시모나.
공주는 그녀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쥐고 있었다.
그중 공주가 가장 경계하는 대상은 레이첼이었다.
라스 남작은 공주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짓눌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실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남작이 나간 후 공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원망이 담긴 눈동자.
‘딕스 연상이라고 해서 다 너그러울 것이라는 편견은 버려. 그냥, 진짜, 완벽하게 수련 만해. 수련만.’
사감을 억누른 공주는 다시 산적한 업무에 복귀했다.
마인을 부리는 제국.
안소니 국왕의 청혼.
5자 동맹의 한축이 될 헥센 왕국의 정쟁.
국내에 산적한 여러 문제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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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은 딕스가 보유한 능력에 깜짝 놀랐다.
5서클 마법사!
16세 소년이 가지기엔 너무도 엄청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년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룩센이란 자에게 순식간에 당했다.
들어보니 경험부족이나 자만심이 패배의 요인은 아니었다.
쌍마를 거느렸던 제 3의 인물.
내내 신경 쓰였던 그 인물의 전투능력을 알게 된 파울은 딕스와 함께 그를 상대할 방법을 연구했다.
“공격해보아라.”
파울이 딕스를 향해 소리쳤다.
딕스는 시리우스로 하여금 파울을 공격하게 하였다.
시리우스는 마법으로 사방을 장악한 뒤 강력한 물리공격을 파울에게 가했다.
파울은 시리우스의 물리공격을 피하는 한편 마법의 장벽을 꿰뚫었다.
골렘의 파괴보단 마법사의 제압이 효율적이다.
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깨어지지 않던 절대적인 원칙이다.
파울의 신형이 딕스를 향해 달려왔다.
시리우스를 피했지만 파울은 딕스 개인이 발휘하는 마법의 공격도 감수해야한다.
처음 이 공격을 받았을 때 파울은 크게 당황했고, 놀랐다.
그래서 패배할 뻔했다.
다행히 훈련이라 딕스는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리우스만 신경 쓰고 있었던 파울은 첫날부터 제자에게 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파울은... 영혼만 남았으리라.
‘녀석의 마법은 빠르고... 섬뜩해!’
딕스와의 훈련에 파울은 매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늘 아슬아슬하다.
괴물!
파울에게 딕스는 괴물 같은 제자였다.
문제는 저 괴물을 룩센이란 자가 손쉽게 이겼다는 것이다.
“또 뚫렸네요. 사부.”
파울의 검날이 딕스의 몸에 와 닿았다.
딕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패배를 시인했다.
하지만 실제 딕스보다 더 씁쓸한 자가 파울이다.
“네가 전력을 다하지 않은 부분을 고려해야지.”
수련을 어찌 실전처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실전처럼 했다가는 이 주변은 남아는 게 없을 것이다.
딕스를 격려해준 파울은 수련장을 나섰다.
이런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딕스와 훈련을 해본 파울은 제자의 능력에 매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전장에 나서는 마법사에겐 그를 보호하는 기사들이 붙는다.
그런데 딕스에겐 기사들의 보호가 필요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또한, 여차하면 골렘과 함께 적을 몰아붙이는 전투까지 가능했다.
이는 유례가 없었던 특별한 경우였다.
파울은 딕스로 인해 요즘 긴장의 나날을 보냈다.
딕스는 훈련이라고 생각하지만 파울에게 제자와의 훈련은 실전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조금의 실수도 패배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부로서의 체면이 달린 문제였다.
이 때문에 파울은 개인수련시간을 평소보다 두 배를 늘렸다.
‘하아, 말년에 이 무슨 고생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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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클을 향한 수련과 룩센을 상대하기 위한 특별수련, 여기에 파울의 원칙인 칼 같은 규칙적인생활을 준수하며 딕스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사막 같은 삶이랄까? 하지만 사막에도 꽃은 핀다.
레이첼과 시모나.
건조하고 빡빡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딕스에게 두 여자는 꽃이다.
“딕스 님, 여기 꿀물입니다.”
따뜻한 꿀물을 내주며 레이첼이 수줍게 웃는다.
딕스를 향한 레이첼의 주인님이란 호칭이 이제는 딕스 님으로 바뀌었다.
호칭의 변경은 두 사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발생한 변화였다.
딕스는 얼마 전 레이첼과 짧지만 평생을 관통할 만큼 짜릿한 입맞춤을 하였다.
입술만 댔다.
그 이상의 진도가 충분히 가능했지만 딕스는 거기서 멈추었다.
시한부입장에서 레이첼을 취한다면 그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년 후 자신은 룩센에게 죽을 수 있다.
이렇다보니 순간의 기쁨을 위해 2년 후, 그녀에게 암담한 일이 될지 모를 일을 만들 수 없었다.
상처 주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이러한 그의 배려에 레이첼은 또 크게 감동했다.
진심으로 그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딕스와 시모나는... 아무사이도 아니다.
그럼에도 시모나는 늘 레이첼과 함께 딕스의 시중을 들었다.
시모나가 수건으로 딕스의 땀을 닦아준다.
여신과 미녀의 시중을 받는 딕스.
여복도 이런 여복이... 없다.
“고마워요, 시모나 양.”
“아, 아니에요.”
발그레한 얼굴로 몸을 살짝 비트는 시모나도 나름 매력이 넘치는 아가씨다.
하지만 그 매력이 레이첼과 비교되면 너무 초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훌륭한 마음씀씀이가 있어서다.
레이첼만 머리에 담아 두고 있었던 딕스는 최근 시모나에게도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온기가 남아 있는 빈 잔을 레이첼에게 건네주며 딕스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찌릿찌릿.
레이첼이 그를 향해 수줍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딕스는 기분이 크게 좋아졌다.
지금도 수련은 힘들다.
하지만 꿀맛 같은 이 시간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반드시 룩센 그 개자식을 꺾어버리고 말테다!’
딕스의 결의는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시간, 뮬 공국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딕스의 가족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딕스가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의 내조를 하고 있다.
보고 싶어 딕스!
마음속에 이 말을 가득 채우는 공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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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력 4248년 3월 5일.
파울의 저택에서 딕스는 신년을 맞았고, 봄을 맞았다.
이제 그의 나이 17세.
외형적으로 딕스는 사내대장부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었다.
신장 184cm, 전신은 크지 않은 섬세한 근육질에 상체는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를 가졌다.
무결점의 완벽한 신체다.
여기에 외모도 빠지지 않는다.
매를 연상시키는 날카롭고 강인한 눈매와 차가운 겨울 호수를 보는 듯한 시린 눈빛, 냉정과 지성미가 결합된 분위기까지.
더 이상 소년이라 불릴 수 없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예, 몬스터 소탕대를 이끌라고요?”
상급부족 야니시아로부터 땅을 불하받은 자이라 부족은 매년 자체적으로 몬스터소탕을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년 섬멸대를 이끌었던 파울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 자리를 딕스에게 일임했다.
“훈련이 때론 흐름을 막는 둑이 될 때가 있다. 가끔 그 둑을 시원하게 터트려 줄때가 필요하지. 가서 시원하게 터트리고 오너라.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수련의 일종이군요.”
“그렇지. 그리고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사람을 다루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법이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하지만 딕스는 그 말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파울의 말처럼 딕스는 제 실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던 차였다.
“알겠습니다.”
“참, 레이첼과 시모나는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여자들이 봐서 좋을 게 없잖느냐.”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레이첼과 시모나를 딕스의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레이첼은 둘째 마님(?) 대우를 받았다.
딕스 본인만 모를 뿐, 그는 아내가 무려 두 명이다.
“알겠습니다. 피 튀기는 전장에 여자를 데려가는 것도 꼴불견이지요.”
내심 아쉽기는 했지만 사부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딕스는 수긍했다.
“참, 공국에서 연락이 왔더구나.”
“공국에서요? 무슨?”
“너의 부모님이 여기로 오신다는 연락이었다.”
내심 딕스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자신이 필요해서 찾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공주에게 2년의 휴가를 청했고 이에 허락은 받았지만 그녀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그녀에게 달려갈 생각이었다.
딕스에게 엘리자베스 공주는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마음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레이첼을 자신의 여자로 삼겠다는 확실한 의지와 다른... 본인도 알지 못하는 묘한 감정이었다.
공주에게 일이 생기지 않은 사실에 딕스는 크게 안도했다.
“제 어머님도 오신다고요? 마차멀미가 심해서...”
말을 하다말고 딕스는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생각났다.
8천 골드면 되는 마차를 무려 2만 골드를 지불하여 어머니를 위한 맞춤형 마차를 주문했다.
이제 그 마차가 제작되어 어머니가 더는 멀미라는 장애 없이 장거리 이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코아공방은 딕스의 어머니 때문에 현지에 임시 공방을 설치하여 마차의 개조작업을 하였다.
기술자와 부품이 수도와 페논을 백여 번이나 오갔다.
코아공방에서는 이번 제작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봐야한다.
이는 당연하다, 딕스는 마차가격으로 2만 골드를 내걸었다.
대신 어머니가 코아공방의 마차를 타고도 멀미를 하면 그 100배의 위자료를 받기로 하였다.
200만 골드!
멀미가 심하면 얼마나 심하겠는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코아공방은 딕스의 어머니를 만난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심정이 되었다.
위자료 200만 골드에 대한 걱정, 그건 차라리 두려움이었다.
공방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고 결과 드디어 딕스 어머니를 위한 마차를 만들 수 있었다.
원가만 해도 무려 3만 2천 골드나 들었다.
이점 하나만 보면 코아공방으로서는 손해 보는 장사다.
그러나 그들에게 꼭 손해는 아니다.
기술개발비라 생각하면.
“멀미?”
“아, 아닙니다. 참 이 먼 곳까지 오신다니.”
“2달쯤 걸릴 것이다. 그리고 네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내 전사들을 파견했으니, 부모님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거라.”
파울의 배려에 딕스는 고마움을 느꼈다.
“고맙수, 사부.”
“쑥스러워하긴. 알면 됐다. 하지만 공짜는 아니다. 내 장부에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음이다.”
정말이지, 딕스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한다.
하지만 녀석은 이를 농담으로 여겼다.
부모님을 보게 된다.
햇수로 4년만이다.
‘나도 참... 무심한 녀석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