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딕스전기-87화 (87/194)

87화

뮬의 반군을 지원한 제국은 이번엔 리안부족연합의 오랜 문제점인 소수부족의 봉기와 연합의 분열을 목표로 하여 움직였다.

아리온스 왕국의 정보부가 이를 포착하여 즉각 공국에 통보했다.

양국이 화해를 하였지만 지난날의 앙금까지 모두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러니 뮬 공국이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할 도리밖에 없었다.

여기에 뮬이 나서야할 이유 하나가 더 있었다.

‘젠장, 자이라!’

딕스의 표정이 울긋불긋 화려한 색색의 쇼를 연출한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만나기 싫어하는 두 사람 중 일인을 지금 제 발로 찾아가고 있다.

야니시아 대부족의 구성부족인 자이라 부족, 이곳의 족장이 바로 전격의 파울이다.

딕스는 제국이 목표로 한 여러 소수부족 중 가장 공을 들일 것으로 추정되는 자이라 족의 파울을 직접만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2시간만 더 가면 국경도시 카르시고가 나온데. 거기 양고기 요리가 특이하고 맛있다니 먹도록 하자. 레이첼.”

꽃을 든 남자!

여신을 호송하는 남자.

향기롭고 영예로운 임무(?)를 맡은 이가 바로 딕스다.

그의 앞, 정말 꽃과 여신을 합체한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

그리고 그녀는 딕스의...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 딕스가, 그 딕스인 것을 알고 난후 레이첼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 따위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레이첼이었다.

그런 그녀조차 단 한사람만은 만나기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그 사람이 바로 딕스였다.

그런데 그를 가장 초라한 순간에 만났고, 그 순간에 그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그가 손을 놓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면서도 그를 피해 숨고 싶은 이중의 마음에 그녀는 고민했다.

그 고민의 해결책을 딕스가 내놓았다.

「내 밑에서 일해요,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월급을 받아요. 당신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주죠.」

그래서 레이첼은 딕스의 여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자신을 향한 사무적인 레이첼의 태도에 딕스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정체를 그녀가 알면 충격은 있을 것이라 예측은 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먹게 할 정도인지는 진심으로 몰랐다.

‘천천히 다가가도 돼.’

마음이 없는 육신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

그림 속 과일과 같다.

맡을 수 없고, 먹을 수 없다면 그건 꽃도 과일도 아니다.

그러니 접근방법을 달리하여 완벽한 레이첼을 얻는다.

그녀의 자발적인 합의에 의해서 그녀를... 애인으로 삼는다.

이것이 딕스가 바라는 바였다.

‘이십일 쯤 되면 이제 마음 열어줄 때도 되지 않았나? 내가 이리 노력하는데. 이게 안 보이나? 젠장, 예뻐서... 참는다. 예뻐서!’

힘들게 얻는 열매가 달다고 했던가? 레이첼의 태도가 가끔 섭섭하고 답답하고 어쩔 땐 울컥해서 그녀를 확(?) 해버리고 싶었다.

지위와 돈과 힘이 모두 딕스에게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꽃이라면 향기가 있어야하고, 과일이라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딕스는 인내를 발휘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 누나의 동생으로서 부끄러운 짓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레이첼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러니 한순간의 욕망과 기분에 빠져 사랑받는 딸이자, 미래의 어머니가 될 여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는 남자라면 마땅히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선이다.

문제는... 간질병처럼 발작하는 수컷의 본능!

‘답답하냐? 그래도 어쩌겠냐? 이것이... 진정한 상남자니라.’

딕스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며 점잖게 타일렀다.

“안 더워? 레이첼.”

“괜찮습니다. 주인님.”

말끝마다 레이첼은 ‘주인님’ 이 호칭을 빼먹지 않는다.

이 호칭은 그녀에겐 일종의 선이자, 울타리다.

이는 그녀가 그에게 쏠리는 마음과 몸을 바로세우는 일종의 경종이다.

딕스는 이 호칭을 그녀의 입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

문제는 그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데 있다, 저 호칭에 숨은 의미와 내막에 대해서 말이다.

오히려 그는 저 주인님이란 호칭을 수컷의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지 못한 현실의 위로로 삼고 있다.

여신이... 불러준다, 뭐라고? 주인님이라고.

‘코피 쏟아지겠네.’

이것도 또 나름의 맛이 있다.

“상의는 벗어도 되잖아. 레이첼.”

고급마차라면 냉난방이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다.

딕스와 레이첼이 타고 있는 마차역시 고급마차다.

하지만 유독 이 마차는 냉난방이 되지 않는다.

왜? 딕스가 약하게 냉방하도록 마부에게 지시를 했으니까.

“참을 만합니다. 주인님.”

“보는 내가 더워서 그래, 레이첼.”

“죄송합니다. 주인님.”

가난이 그녀에게 인내심을 가르쳤나보다.

레이첼의 철벽방어는 바늘 틈도 들어갈 틈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틈을 만들어보려 했던 딕스는 그래서 번번이 쓴 맛을 느낀다.

그래도 영양 느껴지고, 의욕을 돋우는 쓴 맛이다.

“끙, 너무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네. 레이첼은 괜찮아?”

연인의 이름을 되도록 많이 불러라!

딕스는 궁극의 연애기술이란 책을 통해 이론을 구축했다.

그래서 그는 레이첼이 말끝마다 주인님이란 사무적인 호칭을 붙이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꼬박꼬박 불러준다.

자신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 자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깊어진 이 현상을 통해 그녀는 딕스를 자신의 남자로 인식하리라.

딕스는 궁극의 연애기술이란 책을 저술한 작가 ‘안드로메다’가 신처럼 보였다.

세뇌 연애!

이런 어마어마한 기술서적(?)을 집필한 그 작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언제한번 그를 만나 생생한 그의 연애 담을 들어보고 싶은 딕스다.

“저는 괜찮습니다. 주인님.”

“흠, 내가 안 괜찮아. 레이첼, 다리 좀 주물러줄래?”

이건 직장상사가 부하직원을 위압하는 성추행이 아니다.

자신이 만지는 게 아니라 상대가 만져주는 거니까.

그리고 안드로메다 가라사대, 스킨십은 애정의 다리다! 라고 했다.

딕스는 애정의 다리(?)를 놓기 위해 자신의 두 다리를 걸었다.

레이첼이 딕스를 본다.

묘한 눈빛과 표정이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딕스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레이첼의 손이 딕스의 다리를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전문 마사지사도 아닌 평범한 여자가 무슨 손힘이 있겠는가.

백날을 주물러도 시원할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예쁘다.

그 예쁨이 다리가 아닌 그의 마음을 시원하게 안마한다.

‘브라보!’

리안부족연합 내 소수부족의 방언이 또 툭 나오는 딕스다.

남자 10대가 말한다, 여자요? 예쁜 누나가 최고죠.

남자 20대가 말한다, 여자요? 돈 많고, 마음 넓은 예쁜 누나죠.

남자 30대가 말한다, 여자요? 성격 좋은 동생 같은 예쁜 여자죠.

남자 40대가 말한다, 여자요? 음식 잘하고 바가지 안 긁는 예쁜 여자죠.

남자 50대가 말한다, 여자요? 자기 일 있는 예쁘고 현명한 여자죠.

남자 60대가 말한다, 여자요? 건강하고 예쁜 여자죠.

남자 70대가 말한다, 여자요? 여잔 무조건 어리고 예쁘면 됨.

서민남성들은 이처럼 예쁘면 최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예쁨에도 레벨이 있다.

바로 마스터 레벨의 여인.

국가마다 한명씩 태어난다는 전설적인 인간, 여자로 태어났으나 여신이라 불리며 살아가는 존재들.

딕스는 그 여신을 덥석 물고 여행... 아니, 임무중이다.

@

뮬 공국 북부, 카르시고 시.

리안부족연합의 소수부족을 격동시키려는 제국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출동한 딕스.

전격의 파울을 만나는 일은 내키지 않았지만 길을 가는 동안은 좋았다.

부족하고, 목마르지만... 콕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넘실거린다.

열여섯 딕스는 지금... 연애중이다.

“이 고기 맛있네. 이것도 먹어. 요것도 먹고, 어때? 괜찮아? 포도주도 한잔 할래? 레이첼.”

누가 상관이고, 누가 부하직원인지 알 수 없다.

주인님이라 불리는 자는 직원의 눈치를 살피며 못 챙겨줘서 안달이고, 부하직원은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사양하기 바쁘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과도한 장신구로 전신을 치장한 20대의 남자가 다가왔다.

“젊은 친구, 아름다운 숙녀에게 위압은 나쁜 것이라네.”

느끼함이 녹은 치즈처럼 쩍쩍 달라붙는 음성이다.

딕스의 눈매가 이 남자를 향해 움직였다.

장인이 백일을 고련하여 만든 검의 날처럼 예리한 딕스의 눈빛.

작정하고 발산하는 5서클 마법사의 위엄.

레이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작을 걸려던 남자는 딕스의 포스에 오금이 저렸다.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주위의 이목을 많이 끌었기에 남자는 내심의 떨림과 상관없이 일단 큰소리부터 쳤다.

그때, 식당안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딕스와 레이첼의 테이블로 시선을 던진 이들은 허전함을 느낀다.

과도한 장신구로 전신을 치장한 남자가... 없어졌다.

“......?”

레이첼이 놀란 표정으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다.

몇몇 손님들도 그녀와 비슷한 행동을 하였다.

“레이첼, 뭘 찾아?”

“아까, 그 남자요. 분명, 좀 전까지 저기 서 있었는데 없어졌잖아요. 주인님.”

“그런 하루살이 같은 놈은 신경 쓰지 마. 레이첼, 그런 것들 일일이 신경 쓰고 살면 두통 생겨. 참, 식사마치고 연극 보러 갈래?”

식사와 연극과 산책은 일반적인 연인의 데이트 코스다.

그리고 오래된 연인들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성지, 숙박업소!

딕스와 레이첼 두 사람도 오래된 연인들의 성지가 예약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성지는 일인 일실이다.

딕스는 바란다, 언젠가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고, 하나의 문으로 나오는 날을.

서로의 몸을 제 몸처럼 속속들이 알 그날을... 진심으로.

그 날을 위해 딕스는 오늘도 밑밥을 뿌린다.

“아뇨, 전 쉬고 싶어요. 주인님.”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거절하는 레이첼.

저 얼굴 옆선이 딕스의 심장을 베고, 그의 기대감을 강력한 일격으로 단숨에 쪼갠다.

연극은 관람이다, 하지만 관객은 연극을 관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연극 틈틈이 솔로들은 전혀 모를 커플들만의 훈훈한 공식진도가 있다.

그걸 시도하려고 단단히 벼루였던 딕스는 그녀의 얌전한(?) 거절에... 아픔을 느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곱게 물러서면 그건 인생을 물처럼 사는, 네 맛도 내 맛도 없이 사는 놈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물의 마법사는 확실한 자기만의 맛과 색깔을 가진 인간이다.

“산책하자. 레이첼.”

커플의 산책에도 공식이 있다.

어차피 연애의 목적은 2인 1실의 성지가 최종목적이다.

나머지야 선후를 바꿔도 상관없다.

연애도 직장생활처럼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딕스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계산대로 가버렸다.

그의 이 제안도 거절하려했던 레이첼이다.

하지만 그가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하니 차마 ‘혼자가세요!’라고 소리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카르시고 시의 공원을 찾았다.

거미줄처럼 쭉쭉 뻗은 총 길이 1.5km 구름다리로 유명한 공원이다.

책으로 연애의 기술을 배운 딕스는 이곳도 책에서 알게 되었다.

좁은 구름다리는 연인의 다리로 불린다.

이유는 두 사람이 걸으려면 과도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밀착이 필요한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은 데 두 사람이 서로 떨어져서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딕스와 레이첼 역시, 특별히 나쁜 경우의 인연은 아니다.

“산책로로 가시는 게... 주인님, 어?”

다리의 폭을 본 레이첼이 연못을 빙 둘러싼 산책로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산책로도 멋지다.

그러나 저 길은 가족단위, 오래된 부부, 혹은 연애 3년 차 이상의 연인들이나 걷는 완전 건전한 길이다.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자들이나 애용하는 곳이다.

딕스는 이미 구름다리위에 올라가 있었다.

언제 올라갔을까? 아무도 보지 못했다.

공간이동마법이라도 배운 걸까?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빨리 와.”

또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주위의 이목 때문에라도 가지 않을 수 없다.

레이첼이 한숨 쉬며 구름다리로 간다.

그리고 둘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며 총 길이 1.5km의 구름다리를 왕복한다.

딕스가 그리 만들었다.

“업어줄까? 레이첼.”

3km를 내내 긴장하며 걸은 레이첼이다.

단단한 지면에 발을 딛자 몸이 절로 휘청 인다.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딕스가 아니다.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저기, 벤치가 보이는데 좀 앉았다가요. 주인님.”

딕스는 앉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힘들어할수록 업어줄 기회 퍼센트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첼이 진짜 힘들어하는 것을 보자 차마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이 땅이 내 땅이다, 이 산이 내 산이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

남자란 동물은 일단 깃대를 꽂아야 안심하는 단순한 종족이다.

고로 지금 딕스는 불안정한 시기다, 남자로서.

꽂아야 하는데... 꽂아야 하는데... 딕스의 뇌를 지도라 여기고 펼쳐본다면, 3분의 2가 이 생각으로 꽉 차 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임무에 관계된 일과 기타 잡다한 것들이다.

‘비가 내리면 딱 좋을 타이밍인데.’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딕스.

그의 표정은 마치 3년 가뭄에 타들어가는 농토를 바라보는 농부의 절박한 심정을 연상시킨다.

우르르르... 쿠르릉, 번쩍!

딕스의 그 간절함이 하늘을... 감동시켰다.

쏴아아아아악!

‘브라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