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남루하고 허름한 하인 복을 벗어던지고 노동으로 번 돈으로 새 옷을 사 입었다.
허름한 차림의 그를 홀대했던 옷가게 주인과 점원은 탈의실에서 나온 그를 보자 하나같이 깜짝 놀랐다.
이들의 생생한 반응에 딕스는 불친절함에 대한 내심의 소소한 응어리를 풀어버렸다.
‘반전의 묘미겠지.’
그렇다고 완전히 풀지는 않는다.
5서클 마법사도 사람이다.
놀라 얼이 빠진 주인과 종업원을 스친 딕스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아둔함을 단숨에 잘라버리는 날카로운 턱 선의 지성미, 사물을 단숨에 꿰뚫어 보는 듯한 충만한 혜안의 눈빛과 거친 야성의 눈매, 한때 이 눈매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 보니 자신만의 느낌을 크게 살려주는 히든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꾸준한 노력으로 완성된 걸작... 우월한 기럭지(길이)!
본바탕이 워낙에 좋다보니 뭘 입어도 멋이 살아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굳이 딱 꼬집으라면...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피부.
5서클 마법산데 여드름이라니.
‘포션질 좀 해야겠구나.’
성깔 나쁜 주인을 한동안 모셨더니 이 모양이 아닐까싶다.
당분간 영양가 있는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통해 그간의 부족분도 한껏 충족하리라.
거울에서 눈을 뗀 딕스는 퉁명해진다.
“얼마요?”
“1실버 30쿠론입니다. 손님.”
“옜소.”
옷값을 지불한 딕스는 기지개를 한번 쭉 편 뒤 가게를 나서려다 멈칫했다.
“.......?”
“.......!”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주인과 종업원을 향해 딕스는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좀전의 퉁명함을 내던지더니 친절한 음성으로 묻는다.
“뮬 공국의 대사관은 어디죠?”
자고로 아쉬운 놈이 친절해지는 법!
주인에게 대사관의 위치를 확인한 딕스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신분증이 없다보니 대사관 경비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겨우 직책이 있는 자를 만났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생겼다.
확 달라진 딕스의 외모 때문이다.
“잠깐만요. 상점에 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 봐요.”
대사관을 빠져나온 딕스는 곧장 상점에 들렀다.
그러곤 그곳에서 한 병의 약을 구입했고, 그 약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10분 쯤 후에 나왔는데... 달라졌다.
“어? 재능자다!”
“어머, 저... 저 이마의 문장 봐!”
“아까는... 없었는데.”
“생긴 것도 저리 멋진데... 재능자라니!”
우호적인 반응이 딕스를 주제로 쏟아졌다.
잠시 그들의 반응을 아주 짧게 즐긴 딕스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에 세상으로 드러낸 문장이... 미모를 왠지 더 신비롭게 해준다.
‘멋지네!’
크게 만족한 얼굴로 상점을 나온 딕스는 곧장 대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사관 정문경비병들의 얼굴이 마치 유령을 보는듯하다.
재능자!
그 얼굴이 바로 신분증이다.
“수고들 하세요. 후훗.”
사람이 너무 많이 변해도 피곤하다.
물의 오메가(?.)!
오랜만에 들어낸 이 문장으로 인해 대사관에서 받았던 의심을 딕스는 풀 수 있었다.
소소하지만 귀찮은 일들을 거친 딕스는 대사관의 총 책임자인 대사를 만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됐다.
공주의 복귀와 친제국파의 숙청, 그 숙청 대상에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캐넌 선배가 포함되어 있다.
데일 데 페논 같은 피라미 따위 더는 신경 쓰지 않는 딕스다.
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문득, 레이첼 데 페논이 떠오른다.
‘평민으로 강등됐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흐음.’
왜 자신이 그녀를 걱정하는지 이유는 모른다.
스치듯 생각이 났을 뿐이다.
“딕스 경.”
“아, 예, 대사님.”
“나흘 후, 왕실무도회가 열린다네. 경은 나와 함께 거기에 참석해야 한다네.”
대사라는 직책은 일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딕스의 현재 신분을 생각하면, 직위와 나이도 높은 대사는 그에게 말이나 행동을 편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사는 그러질 않았다.
왠지 딕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눈치다.
공국의 진정한 대세로 화려하게 등장한 공주.
전에도 잘 보여야 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더더욱 잘 보여야... 뭐,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왜냐! 자신은 고품격, 고품질의 명품 5서클 마법사니까.
‘그러고 보니 골렘을... 소환해보지 않았잖아?’
마법사가 되며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뭡니까? 라고 재능자들에게 질문하면 백이면, 백 이렇게 말한다.
골렘 소환이요! 라고.
한데, 마법사가 된 딕스는 그 일을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
‘골렘... 쏘리.’
리안부족연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보니 수많은 방언을 주워들었다.
그중 귀에 착착 감기던 말.
쏘리(미안).
“... 공주님의 뜻이겠죠?”
“그렇다네.”
“음, 제가 더 알아야하는 건 없나요?”
“아! 하나있네. 공주님께선 평소처럼만 행동하면 된다고 하셨네. 그게 전불세. 그리고 은행에 자네의 신분을 증명하는 보증은 내가 서줌세.”
은행통장 분실 건은 대사의 자청으로 단기간에 완벽하게 해결 본다.
덤으로 숙식도.
이래서 사람은 높은 자리에... 튼튼한 연줄을 잡을 필요가 있다.
자신이 5서클 마법사라는 걸 재능자의 증표처럼 밖으로 드러낸다면 좋을 텐데.
뭐 그럼 재미없겠지.
딕스는 아직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경지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 없었다.
반전의 재미를 위해서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공주가 왜 싱그로아 왕실 무도회에 참석하라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를 믿는다.
최소한 그녀는 자신을 망칠 사람은 아니다.
그저 깜짝 놀라게 만들 뿐.
‘공주님... 전 이전의 그 딕스가 아니랍니다. 5서클의 무서운 마법사가 되었답니다. 후훗.’
이제 공주 당신이 깜짝 놀랄 일만 남았다.
조국의 하늘아래 있을 멋지고 아름다운 상관을 떠올리며 그는 씩 웃는다.
노을이 창문으로 스며든다.
오늘은 저 노을을 걱정 없이 바라보며 먹고 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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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등장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중 불미스러운 시각으로 주목하던 자들이 있다.
바로, 뮬 공국의 약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제국이다.
지금 그 제국의 하수인들이 칼을 빼들었다.
“이틀 전 뮬 공국의 대사를 접견한 그 재능자는 관저에 머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외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외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가 공녀의 밀사일 확률은?”
“현재까지 50%입니다.”
“놈이 연막일 확률은?”
“70%입니다.”
“애매하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부에선 단 1%의 확률에도 움직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황제께서... 이번 뮬 공국의 행위에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만일, 싱그로아까지 동맹에 참가한다면 황제의 진노는 몹시 클 것입니다.”
뮬 공국은 리안부족연합과 아리온스 왕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제국의 영향력아래서 크게 벗어났다.
이는 정치, 경제, 국방 분야에서 골고루 이루어졌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공국은... 엘리자베스 공주는 완전함으로 가기 위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이전과 달라진 점은 이제 제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한번이라도 발을 잘못디디면 공국은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아슬아슬한 그 외줄타기에 딕스는 동참하고 있었다.
물론, 본의와 상관없이.
“할 수 없군. 놈을... 제거해.”
암살명령!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그 시간, 딕스는 여드름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재료. 주문한 포션을 가지러 가고 있었다.
굳이 직접 갈 필요는 없다.
관저에 일하는 하인이나 하녀를 시키면 된다.
그럼에도 그가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오늘 골렘을 소환해보기 위함이다.
두근두근.
설렌다? 그 표현이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모두 대변하기엔 너무 약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다.
라틴 힐의 토박이 하인에게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수도 내 공원 같은 곳을 물었다.
이곳은 대도시다.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동물처럼 제 영역(동선)에서만 활동한다.
특히 평일 낮 시간대면 도시는 지역에 따라서 번잡함과 고적함의 명암이 분명하게 엇갈린다.
지금 딕스는 라틴 힐에서 가장 고적한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마법사에 대해 공부했다. 현재 나의 경지는 5서클, 내가 소환할 수 있는 골렘은... 아, 설레네. 휴우, 4미터.’
저 앞쪽 건물 옆 2층 가옥.
대충 저 높이쯤 되리라.
공원의 나무가 자신의 골렘을 가려줄 것이다.
골렘이 어떤 형상을 했는지 서적을 통해서 그는 확인했다.
물, 바람, 땅, 불의 골렘은 그 특유의 원소를 쫓아 형태가 정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버려라.
골렘은 형태와 색상이 조금 다른... 서클에 따라 크기가 다를 뿐 그 외는 유사하다.
그 생김은 마치 두꺼운 갑옷을 입은 전사, 혹은 기사 같은 느낌이다.
기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골렘은 강력한 물리력과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전천후 병기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골렘에 대해 치열하게 배운 딕스는 오늘을 실습날짜로 정했다.
마법사로서 오늘 그는 자신의 일기에 첫 줄을 기술하러 간다.
‘마법사의 마나가 10으로 가정할 때, 골렘의 단순 물리적 전투에는 1의 마나가 소모된다. 하지만 마법의 강약에 따라 마나 소모는 5, 혹은 10이 될 수 있다. 지속적인 전투를 위해서라면 골렘의 물리적 전투가 좋다. 그렇게만 써도 전투를 압도할 대단한 위용이지, 4미터라는 거구의 기사를 보고 전의를 불태울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휴우.’
만인을 압도할 골렘을 세운다.
그 골렘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다.
이 얼마나 뿌듯하고 멋진 일인가!
마법사의 영원한 반려.
이제 그 반려를 흥분을 억누르며 만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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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로아 왕국의 왕성.
딕스의 등장은 이곳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아니, 가장 크게 주목하는 곳이 바로 이곳의 주인이다.
안소니 폰 싱그로아.
그리고 그의 충실하고 듬직한 신하 홉킨스 반 데크샤이 후작.
따뜻한 온실 속에 들어앉은 두 사람은 오붓하게 차를 마신다.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주제는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제국의 그림자들이 움직였다는 첩보입니다. 이대로 방관하실 건지요?”
제국의 약진은 그들과 국경을 면하고 있지는 않지만 싱그로아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런 때에 뮬 공국이 주도하여 북부군사동맹의 틀을 짰다.
이중 가장 까다로운 리안부족연합과 아리온스 왕국은 이미 가입한 상태다.
싱그로아 입장에서는 이 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후원해야 할 상황이다.
홉킨스 후작은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왕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는 엘리자베스 공녀가 과인에게 보여주는 공국의 미래일지 모르오. 그 미래를 과인이 지켜준다는 것은 내 어린 친구에 대한 큰 결례라 생각한다오. 그녀는 나와 동등해지길 원하지, 보호받는 가녀린 아이이길 원치 않소. 그래서 난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오. 그녀가 내게 보여주려는... 공국의 미래를 말이오.”
예상을 벗어난 공국의 미래다.
국왕은 자신의 세 번째 숙제로 그녀가 자신을 내보일 줄 알았다.
그녀가 해낸 일을 보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내세웠다.
이는 그녀에게도 모험이다.
한데, 그 모험을 그녀가 결정했다.
자신이 그녀를 가볍게 여기지 않듯, 그녀도 자신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랜 친구로서, 그녀가 선택한 자를 믿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군주 대 군주로서... 상대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줘야 한다.
이것이 안소니 왕이 생각하는 친구로서의 도리, 군주로서의 예법이었다.
“전하께선 어쩔 땐 세상에서 가장 다정다감하신 것 같아 걱정을 사게 하다가도, 이럴 땐... 멋집니다. 하하.”
“흠, 무르다는 표현을 다정다감으로 바꾸니 참 듣기 좋소이다.”
“전하, 뮬 공국이 주도하여 동맹이 탄생했으니, 그 주도권은 뮬이 가지게 됩니다. 저희 입장에서 이는 탐탁지 못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홉킨스 후작의 우려에 안소니 왕은 빙그레 웃으며 즉답을 하지 않았다.
왕은 반쯤 남은 찻잔을 들어 장난하듯 후작에게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과인에게 찻잔은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건 찻잔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중요할 뿐이오. 제국은 강하오, 그리고 현 황제의 치세이후 약진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있소. 풍요로운 거대한 땅덩어리, 수많은 인구, 현명한 군주까지. 솔직히... 지금의 제국은 두려운 국가요. 머리가 있고, 눈이 있는 군주라면 제국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소. 이런 상황에 찻잔에 연연하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하오. 그리고 이제 그만 내 속을 떠보시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이 넘게 그러니 너무 지겹소이다. 하하하.”
안소니 국왕의 말에 홉킨스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찻잔을 든다.
“전하.”
“그 표정... 흠, 무엇으로 날 곤란하게 할 생각이오?”
“왕비를 얻으심이 어떠합니까?”
31살의 현명하고 잘생기고 부자이며 나름 비장의 한수도 갖고 있는 이 멋진 왕.
국정과 백성과 결혼하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이 왕은 아직 미혼이다.
수많은 귀족들이, 외국의 왕실에서 청혼을 넣었지만 안소니 왕은 번번이 거절했다.
그래서 소문에 왕은 남색가라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그 상대는 홉킨스 반 데크샤이.
“후작 부인께서 또 재촉하셨나보군.”
남편이 왕의 애첩(?)이라는 소문을 들어야 하는 부인이 어찌 속이 편할까? 아닌걸 알면서도 매번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때문이 아닙니다.”
“쯧쯧, 매번 그 소리요.”
“전하.”
“휴우, 그래 이번엔 어떤 가문의 처자요? 아니면, 어떤 왕실의 처자요?”
“엘리자베스 공녀는 어떠합니까? 공녀가 보낸 밀사를 저희가 매파로 보낸다면 이도 멋진 일이 아닐까 합니다.”
안소니 국왕은 후작의 말에 평소와 달리 반박하지 못했다.
왕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뭐지? 왕께선 설마 8살 꼬마 숙녀에게 반해 지금까지...!’
홉킨스 후작은 내심 깜짝 놀랐다.
한편으론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는 왕이 몹시 반가웠다.
엮으리라!
반드시 왕과 공국의 공녀를 부부로 엮고야 말리라.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후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