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벨쟈키 부족에서 10일을 공연한 서커스단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추위와의 싸움이 또다시 시작됐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던 딕스에게 노천에서의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이다.
지난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누구나 수긍한다.
하지만 그때의 그 소년은 지금 확 달라져 있었다.
“이젠 춥다는 말을 안 하네?”
따뜻한 방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자의 가벼운 여유가 소년에게 보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도 그렇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요, 요령이 생겨서 그래.”
“... 요령? 어디 아프니?”
추위와 더위에 요령이 붙는다는 말을 공주는 들어본 적도 없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도 생각해본바 없다.
되게 걱정하는 얼굴이 된 공주가 소년의 이마에 손을 댄다.
그녀의 손길에 소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당겼다.
자신의 손을 소년이 황급히 피해버리자 공주는 상처받았다.
얼마 전부터 소년은 공주를 피하고 있었다.
그것이 노골적이라면 그 이유를 따져 물을 텐데 소년의 행동이 워낙에 교묘하고 자연스러워 그녀는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혹시, 소년이 자신에게 실망한 일이라도 있나 싶어 그녀는 여러 날을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얘가 대체 왜 이래? 내가 나환자도 아니고!’
한두 번은 몰라도 그 일이 몇날며칠을 계속되자 쌓이고 쌓인 그 감정이 하나가 되어 북받친다.
껄끄럽고 답답한 느낌과 기분을 시원하게 확 토하고 싶으나, 명색이 어른(18세 성인)이니 애를 상대로 욱 할 수도 없었다.
“안 아파. 좋아.”
지금도 눈길을 안 맞춘다.
스킨십을 피하고, 눈길도 피하는 소년.
가끔 자신이 장난으로 툭 건들라치면 전에도 놀라긴 했지만 요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년의 반응은 격렬해졌다.
자신이 대바늘로 그를 찌른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딕스는 공주가 자신을 말없이 노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모인 신체부위는 마치 모닥불을 피운 듯 뜨겁고 화끈거렸다.
사실, 소년은 공주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온천 부족의 영지에서 우연히 그녀의 속옷을 본 후부터였다.
당시엔 좋았다는 느낌뿐이었다.
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느낌이 죄의식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소년의 꿈속에서 찾을 수 있다.
공주는 소년의 꿈속에 매일 나타나 문어빨판처럼 그를 빨아들여서 황홀하게 해준 뒤 날개 달린 분홍속옷이 되어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유치찬란한 이 꿈을 소년은 매일 꾸었다.
그리고 새벽마다 그는 공주의 잠귀를 경계하며 속옷을 세탁했다.
‘내가 물의 견습마법사니 망정이지, 휴우.’
소년이 땅, 불, 바람의 견습마법사였다면 속옷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딕스.”
공주의 표정과 어감이 전에 없이 까칠해졌다.
소년은 이를 느꼈지만 그녀의 마음을 풀어줄 여력이 없었다.
소년에게 공주는 날개 달린 분홍속옷이다.
이러니 어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 어?”
“요즘 너 많이 변했어. 왜지? 내게 불만이라도 있는 거니? 있다면, 말해줘. 우리는 한 팀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데면데면 할래. 내가 너에게 실수한 거라도 있니? 있으면 말해줘. 문제를 알아야 고칠 거 아니니.”
몹시 굶주린 소년에게 공주는 그림 속 빵이다.
차라리 안보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매일 그녀를 봐야하는... 꿈속에서도 만날 보는 그녀로 인해 소년은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그런 그에게 공주가 제안한 이성적인 대화란 물속에서 모닥불피우기다.
“별일 아니야. 그냥 수련에 진척이 없다보니... 좀 예민해졌나봐.”
소년의 말은 100% 거짓말이다.
그런데 공주는 소년의 이 말을 진지하게,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유는 그녀도 재능자이기 때문에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딕스는 나보다 더 애가 타겠구나!’
자신만의 완전마력문장을 알아가는 과정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한데, 지금의 환경은 수련의 방해요소로 넘쳐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한줄 더 읽고, 잠이나 한숨 더 자는 게 효율적이다.
이 때문에 공주도 딕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가.
소년은 죽을 맛이었지만.
“그렇구나. 하긴 너에 대핸 내 배려가 부족했구나. 미안해.”
사과하면서 손은 왜 잡는단 말인가.
그녀는 별 생각 없이 한 이일에 개구리(소년)는 맞아 죽는다.
그때였다.
소년이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던 그 순간 포장마차가 크게 덜컹 거리며 정지했다.
급정지였지만 사고는 없었다.
워낙에 느리게 이동하다보니 그렇다.
“......!? 밖에 무슨 일이 있나보네.”
기회다 싶은 딕스는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두두두두.
전방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대열이 멈춘 이유가 바로 저 흙먼지 때문임을 소년은 알 수 있었다.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공주가 소년의 옆에 섰을 때였다.
대열의 전방에서 달려왔던 기마대의 후미가 좌우로 움직이더니 서커스단을 포위해버렸다.
이를 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기마의 숫자는 백이 훌쩍 넘었다.
서커스단원들의 숫자는 150명이나 그 중에 남녀노소가 섞여 있다.
그러니 잘 훈련된 기마군과 싸우는 일은 난파선에 승선하는 꼴이다.
이때는 상대를 격동시키지 않도록 고분고분해야한다.
이점을 서커스단원들은 주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벨쟈키 부족의 기병이다! 남자들은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한곳으로 모여라! 불응하면 그 자리에서 참수하겠다!”
병사들의 태도에 사람들은 크게 당황했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맘이 약한 여자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병사들에 의해 남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
여기엔 딕스도 포함되었다.
단장이 굽실거리며 대장으로 보이는 자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 장교님 무슨 일이신지요. 저희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요.”
“너희가 죄를 지어서 붙잡은 게 아니다. 우리는 원로원이 정한 법률에 근거하여 몬스터 침공에 맞서 싸울 장정을 긴급 징집하는 것뿐이다.”
성물(피닉스의 왕관)이 분실된 연합의 지난 3백년, 그 긴 세월 연합을 지탱한 곳이 바로 원로원이다.
연합에서 원로원의 명령은 왕명이라고 보면 된다.
“저, 저희는 외국인입니다. 연합 인이 아닙니다요. 장교님.”
“상관없다. 흠, 저 꼬맹이는 뭐냐? 애는 빼라. 저 난쟁이도 빼고... 꼽추와 늙은이도 빼! 남자라고 다 같은 남자냐!”
장교가 지목한 자들과 함께 딕스는 징집에서 열외 됐다.
살벌하고 위험한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빠졌으니 당연히 기뻐해야한다.
하지만 기쁨보단 찝찝함이 더 컸다.
병사들에게 잡혀간 소년이 무사히 돌아오자 공주는 기쁜 마음에 그를 덥석 안아준다.
“다행이야!”
“그렇긴 한데... 흠, 그보다 앞으로 어쩌지? 몬스터들이 잠잠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없지 당분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싸우기에 적당하지 않은 체형의 단장이 장교에게 애걸복걸하여 징집에서 빠졌다.
여기엔 뇌물의 힘도 한몫했다.
병사들은 남자들만 데려가지 않았다.
그들은 서커스단이 가진 맹수와 몬스터를 모두 죽였다.
병사들의 기세가 하도 사나워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크와아아아앙!”
“키에에에엑!”
“케엥!”
우리는 동물과 몬스터의 피로 흠뻑 젖었다.
이 일을 끝낸 병사들이 서커스단이 가진 말과 식량을 징발했다.
딱 절반만 가져간다.
장교는 징발했음을 증명하는 서류를 그 자리에서 작성하여 단장에게 주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병사들이 앞서 보인 흉흉한 기세에 주눅이 든 단장은 냉큼 서류를 받았다.
“최대한 남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이 말을 남기고 병사들은 남자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합법적인 약탈로 인해 서커스단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난... 난 망했어! 으허헝헝헝헝!”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벌판에서 단장이 목 놓아 운다.
@
마차로 울타리를 만든다.
평상시였다면 금세 끝날 일인데 오늘은 규모가 반으로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배의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이 모든 걸 끝내고 모두가 힘을 합쳐 울타리 안쪽에 모닥불을 놓는다.
이 역시 더디다.
모래를 잔뜩 머금은 바람은 거칠고, 날씨는 몹시 차갑다.
남겨진 단원들의 마음은 이 보다 더 거칠고 춥다.
잔뜩 움츠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힘이 쭉 빠진다.
낮에 병사들에게 징발당해 가진 게 거의 없다.
여기서 이틀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큰 마을이 나온다.
단장은 그곳까지 간 뒤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자고 했고, 모두가 고갯짓으로 조용히 동의했다.
밤은 점점 더 깊어진다.
남자들이 모두 끌려가는 통에 남은 자들이 분담하여 불침번을 맡았다.
불침번 시간은 제비뽑기로 정했다.
딕스도 참여했고, 공주도 참여했다.
공주는 초저녁이라 근무를 끝내고 잠을 잔다.
잠든 그녀를 확인한 소년은 조용히 천막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불침번을 함께 할 짝꿍 로라가 온다.
로라는 19금 댄서 팀의 댄서로, 그 팀의 막내다.
공주는 그녀와 자신의 순번을 바꾸려했지만, 딕스는 이를 말렸다.
이 시간의 불침번은 근무를 다 끝내고도 잘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야영지 북쪽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불침번을 서야하는 장소다.
전 근무자가 돌아가고 두 사람은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앉았다.
앞으로 2시간을 이렇게 멍하니 전방을 주시한 채 추위와 싸워야한다.
“모포 같이 덮자.”
“그래.”
따로 모포를 덮고 있는 것 보다 모포두개를 겹쳐 함께 덮는 게 효율적으로 추위를 막는 방법이다.
로라가 먼저 이 방법을 제안했고, 딕스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사내끼리 몸을 밀착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에겐 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베스는 앞으로 어쩔 거라고 하니?”
“생각중인 것 같아.”
“휴우, 갑자기 이 무슨 난린지.”
“그런데 누나는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딱히 생각한건 없어. 팀 언니들과 상의해서 함께 움직일지, 아니면 따로따로 움직일지 마을에 도착한 다음에 상의한 뒤 결정해야지. 아마, 함께 움직이지 않을까싶어. 우린 한 팀이니까.”
혼자 불침번을 섰다면 춥고 재미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불침번을 서다보니 두런두런 얘기하는 재미가 있었다.
더욱이 로라는 젊고 예쁜 여자다.
“그렇군... 응?”
안색을 굳히며 전방을 쏘아보는 소년의 행동에 겁이 난 로라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소년은 이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온 신경이 전방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왜 그래?”
“저 앞에서 뭔가가 움직인 것 같아.”
“들짐승 아닐... 까?”
“쉿! 조용.”
긴장한 소년의 반응에 로라는 그가 위험한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믿게 되었다.
로라의 몸과 눈빛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서커스단엔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남자가 없다보니 그녀의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팔을 쥔 로라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덜덜덜.
옆의 로라가 신경 쓰였지만 딕스는 그녀를 무시하고 오메가 핵을 구동시켰다.
강제징집과 징발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이런 조치는 발동되지 않는다.
한데, 그러한 조치가 발동됐다.
이는 몬스터 침공이 대규모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본 무리에서 떨어진 작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사소한 것도 놓치면 안 된다.
‘생명체 반응... 일곱!’
하나를 보았었다.
한데, 그곳에 하나가 아닌... 일곱이 있다.
여기만 그럴까? 아니면 다른 곳도 그럴까? 확인을 위해 딕스는 야영지 주변으로 급히 마나를 내보냈다.
시시각각 변하는 딕스의 표정은 곁에 있던 로라를 두려움에 빠트렸다.
“디, 딕스... 장난이라면 그만둬! 나 정말, 무서워. 흑흑.”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은 로라.
딕스에겐 그녀를 놀릴 마음도 겁줄 생각도 없다.
자신이 확인한 것에 놀라기에도 벅찬 소년이다.
‘포... 포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