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딕스전기-49화 (49/194)

49화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도심 외곽에 위치한 상점가.

직업을 가진 자들은 이 시간이면 각자의 직장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고, 학생이면 학교에 있을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라 하여 모두가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가계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일을 한다.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이런 아이들은 잔심부름이나 호객행위 등을 통해 돈을 번다.

이런 아이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상점가다.

운이 좋으면 안정적인 직업인 가게 점원으로 취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들 대부분이 성실하고 눈치가 빠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딕스는 여성용품 가게 앞 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곳은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들도 오지 않는 곳이다.

이 가게에선 일거리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만은 아이들이 없는 청정구역이다.

재능자를 상징하던 멋들어진 관복을 벗으니 거리의 아이라 해도 믿을 만큼 딕스의 행색은 옹색하다.

가난한 점쟁이 소녀의 게으른 백수 남동생 이미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다.

‘10월도 안됐는데 이렇게 추우면 어쩌란 말이야! 어째, 자기만 매번 건물에 들어가고 나만 밖에 있으라는 거야! 정말이지... 공주만 아니면 들이박는 건데. 휴우.’

슬프다.

매번 외출하면 이 신세다.

제 집도 아닌 남의 집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솔직히 지금은 버틸 만하다.

기분은 한 겨울 길바닥에 나와 있는 듯해서 느낌상 무지 추운 듯 하지만 실제의 체감은 얼어 죽을 지경은 아니다.

앞으로 뚝뚝 떨어질 기온을 감안하면... 언젠가는 남의 집 현관 옆에서 얼어 죽을지 모른다.

공주님의 기본 쇼핑시간은 2, 3시간이다.

물론, 그녀의 목적이 쇼핑이 아님은 안다.

죽음을 위장하며 고국을 등진 채 저급한 떠돌이 단체(서커스단)에서 점쟁이 노릇을 하는 그녀가 2, 3시간을 이런 허무맹랑한 쇼핑을 할리 없다.

조국의 안녕과 영광을 위한 모종의 일들이 저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등지고 스스로 진창에 몸을 던진 왕족의 희생정신을 생각하면, 그녀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자신을 이처럼 구차하고 불쌍하게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그녀의 행위는 지탄받아야 하지 않을까? 명색이 재능잔데... 약물로 가린 미간의 문장만 드러내도 단숨에 대접받고 살 수 있다.

그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말이다.

그런 자신이 체온 유지를 위해 파충류처럼 광합성을 하고 있다.

고향의 애새끼들이 지금의 이 모습을 보았다면 필시 배꼽 빠지게 웃으며 자신을 비웃으리라.

‘외국에서 이 짓거리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군.’

날씨가 진짜 추울 때도 지금처럼 집지키는 개처럼 세워둔다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도망치고 말리라.

어디로? 저 문안으로 냉큼.

‘그건 이해해주시겠지. 그나마 가족걱정을 덜어서 다행이야. 휴우.’

페논 남작령은 사라졌다.

영지가 사라지는 걸 목격했을 데일 그 개새의 표정이 궁금하다.

아마 하얗게 질려 버리지 않았을까? 뭐, 어쨌든 고향의 부모님과 누나는 앞으로도 쭉 무사하게 됐다.

큰 형과 작은 형의 장래도 앞으로 탄탄대로다.

자신이 국제거지가 된 보상이다.

‘그 여자가 큰 형을 찾아준다고 했으니까. 찾아주겠지. 페논 건도 해결해줬으니까.’

공주의 수호기사 스칼렛 르 헬싱.

백작가문의 장녀인 그녀는 장차 여백작이 된다.

여기에 공주님이 장차 공국의 여왕이 되신다면 권력의 핵심에 가볍게 안착한다.

처음부터 잘 먹고 잘산 그녀는 지금도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이다.

“아!”

소년의 두 눈이 갑자기 촉촉해진다.

저기 저 마도의 탑 지붕이 보이는가.

저 건물 안 매장에 은행이 있고, 그 은행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예금이 있다.

그 돈이면 이 도시에서 번듯한 2층 벽돌집 3채를 살 수 있다.

이런 거부가 지금 추위에 덜덜 떨며 자연 에너지를 이용하여... 비참하다.

“꼬맹아.”

끔뻑끔뻑.

딕스는 불쾌한 호칭으로 자신을 부른 은발의 잘생긴 사내아이를 보았다.

녀석의 외모에 딕스는 순간 저도 모르게 불쾌감을 느꼈다.

수컷들의 경쟁심이다.

‘건방지게 생긴 저 자식이 방금 날... 꼬맹이라고 부른 거 맞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딜 봐서 꼬맹이란 말인가.

앉은키는 어디가도 뒤지지 않는다, 라고 자부한다.

“쯧쯧, 벙어리로구나.”

꼬맹이에 이어, 벙어리까지... 아니 두 단어가 합성하여 꼬맹이벙어리가 되었다.

자신의 침묵이 길어지면 또 무엇이 붙을까 심히 궁금하다.

딕스는 내심 한숨을 내쉰다.

그는 소년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걸을 수는 있느냐?”

딕스는 녀석과 말 섞는 게 싫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닫았다.

자신에 대한 녀석의 평가나 동정 따위 관심 없다.

“못 걸어? 그럼 앉은뱅이...!”

꼬맹이, 벙어리에 이어 뒤에 뭐가 붙을까 짧은 순간 궁금했지만, 설마 앉은뱅이가 붙을 줄이야.

딕스는 사내아이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

보아하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여기서 벌떡 일어서서 자신이 꼬맹이도, 벙어리도, 앉은뱅이도 아님을 증명한다면... 저 녀석은 크게 놀라고 말리라.

하지만 왜 그래야할까? 자신에 대한 저 녀석의 평가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 짖고 까불어라. 이 형아는 만사가 다 귀찮은 몸이시다.’

딕스는 바닥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은발의 소년은 그 모습이 안 되어 보였던지 오전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은색 동전을 딕스 앞에 내려놓았다.

동전과 은발 소년의 손을 딕스는 번갈아보았다.

자신의 처지가 거지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이 자신을 거지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돌아서서 가는 은발의 소년을 향해 입을 여는 딕스.

“멈춰.”

걸음을 멈춘 은발의 소년.

몸을 돌리는 소년의 앞머리가 움직이며 미간이 들어난다.

한데, 그 미간에 문신... 아니, 문장이 있다.

기본형 마력문장 24개중 하나인 시그마(Σ)가 은발 소년의 미간에 앉아 있었다.

딕스의 눈길은 은발 소년의 문장에 고정됐다.

오랜만에 보는 타인의 문장이었다.

“벙어리가... 앉은뱅이도... 아니었구나!”

은발 소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앞에 꼬맹이란 단어도 소년이 빼주었다면 딕스는 굉장히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꼬맹이란 단어를 빼기에 딕스와 소년의 키 차이는 한 뼘이다.

“난... 거지가 아닙니다.”

울컥한 마음에 반말로 불렀지만 계속하여 반말할 수는 없다.

놈은 누가 봐도... 귀족이다.

귀족인 놈이 재능자이기까지 하다니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

“그럼 왜 저기 쭈그리고 앉아 있었지?”

“햇볕이 잘 드니까요.”

말해놓고 보니 이상하다.

자신이 빨래도 아니고 왜 햇볕타령인가.

‘... 거지같은 대사잖아!’

참으로 구질구질한 대답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면 진짜 구차해질 것 같아 딕스는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흠, 당당한 눈빛이군. 밥은 먹었느냐?”

먹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배는 30분전에 꺼져버렸다.

꼬르륵.

딕스의 대답은 그 입이 아니라 배가 한다.

풉!

은발 소년이 제 입을 틀어막는다.

저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딕스는 안다.

방귀라는 말에 환장해서 뒤집어지는 어떤 여자를 안다.

아마, 그 여자와 이놈은 비슷한 웃음 코드를 가졌음이리라.

“아! 실례.”

은발 소년은 딕스가 내민 돈을 다시 회수했다.

자존심만 세우지 않았어도 저 돈은 자신의 것인데... 라는 거지같은 근성이 딕스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딕스는 소년을 힐끔 본 뒤 제자리로 돌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담요를 챙겨와야겠구나.’

가만 보니 쭈그려 앉는 이 자세, 진짜 불쌍해 보인다.

그렇다고 찬 돌바닥에 앉을 수는 없다.

자신의 엉덩이는 소중하니까.

“아르바이트 하지 않을래?”

은발 소년의 제안에 딕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가거리에 있는 아이들은 심부름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마, 저 소년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자신 말고도 지천에 널린 게 그런 아이들이지 않는가.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활기찬 녀석들이다.

그런 녀석들에 비해 자신은 인정하긴 실지만 병든 병아리 같은 모습이다.

‘저 녀석... 특이한 놈이네.’

딕스는 또래의 친구가 없다.

그에게 또래의 녀석들이란 모두 적이었다.

그런 그에게 은발 소년의 접근은... 신선했다.

@

여성용품 가게 맞은 편 식당 2층 창가자리.

딕스와 은발 소년이 마주앉아 있었다.

딕스는 이 소년이 제안한 아르바이트를 승낙했다.

소년이 제안한 아르바이트는 밥한 끼 같이 먹어주는 것이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밥 먹는 게 뭐가 힘들다고. 쯧쯧.’

그렇다.

딕스는 밥 같이 먹어주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음식을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난 아서라고 한다. 네 이름은 뭐니?”

“딕스요.”

“딕스요?”

“아니, 딕스... 라고요.”

말귀도 못 알아듣고, 성격도 이상한 것이 신은 녀석에게 아둔한 머리와 귓구멍과 사치와 낭비정신을 준 것 같다.

역시, 하늘은 가끔씩 공평하다.

‘허우대만 멀쩡하군. 쳇!’

이상한 녀석과의 식사자리지만 공짜 밥에 공돈까지 생기는데다 거지처럼 길바닥에 쭈그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훌륭한 장점들이 있어 참아주기로 하였다.

“아! 미안, 네 억양이 익숙하지 않아서. 이곳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공국인?”

단숨에 자신의 조국을 알아맞히는 아서로 인해 딕스는 내심 움찔했다.

공주는 그 누구에게도 신분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녀와 함께하는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미간의 문장도 약품으로 지우며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저 꼬맹이... 수상쩍은데?’

긴장한 딕스는 오메가 핵을 움직여 여성용품 가게 안으로 마나를 보냈다.

가게 밖에서 수시로 하던 일이다.

딕스는 공주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내부를 꼼꼼하게 정찰했다.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 숫자와 그들의 위치를 파악했고, 공주가 가게로 들어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확인하였다.

할 일없는 비렁뱅이 소년처럼 보였지만 실상 공주의 안전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정찰결과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딕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작은 구슬이 잡힌다.

이 구슬은 공주에게 일이 생기면 깨지도록 되어 있다.

물론, 공주가 지니고 있는 같은 구슬을 그녀가 깨야 이것도 깨진다.

‘그림자처럼 붙이고 다녀야 제대로 지켜드리지. 젠장.’

공주에게 이를 건의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딕스는 공주에게 삐져있었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남매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녀는 공주다.

페논에서 가족을 빼오는 일을 권력자는 단 한마디의 말로 아무런 피해도 없이 해결해버렸다.

놀랍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 권력자의 따님을 어찌 함부로 대하겠는가.

장차 그러한 권력자가 되실 분이기도 하다.

24시간 긴장하며 공주를 지켜야한다.

이 일에 매달리는 것도 힘든데 여기에 공부에 수련까지... 공주는 알지 못하리라 뼛골 빠지는 자신의 고충을.

“아! 딕스... 나 십여 명의 딕스를 알고 있는데.”

아서가 웃으며 말하였다.

딕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보자 분위기를 풀 생각으로.

“흔해빠진 이름이니까요.”

“너의 이름만큼이나 너도 평범하게 살겠구나.”

별 탈 없이 평범하게 사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아서는 알고 있는 듯하다.

딕스는 소년의 태도와 어감에서 이를 느꼈다.

“그렇죠.”

파란만장한 역경을 겪고 있다.

그 역경의 10분의 1만 가져가도 보통의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우는 소리를 할 것이다.

딕스의 목소리엔 그래서 억울함이 깊이 서려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배에서 배 맛이 나고, 사과에서 사과 맛이 나는 이치다.

“흠, 몇 살이니?”

“공자와 비슷할 걸요.”

아서는 딕스보다 한 뼘이 더 크다.

대체로 자신보다 한 뼘이나, 혹은 한 뼘 반이 더 큰 아이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동갑이었다.

이러한 근거에 입각해서 소년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한데, 아서는 이를 듣고 몹시 좋아했다.

“너도 아홉 살이니!”

쿨럭!

‘저... 저 얼굴에, 저 키에, 저 분위기 어디에 아홉 살이 있다는 거야!’

충격적이다.

세상은 너무, 지나치게 불공평하다.

신이 자신을 증오한다고 생각된다.

“우리 친구하자.”

아서가 말했다.

아홉 살짜리가 감히 열세 살 형님에게... 친구하잔다.

‘나는 열셋이다!’

이 말을 쏟아내고 싶다.

하지만 이 녀석 앞에서 13살이라고 밝히려니 동정 받을 것 같고, 초라해질 것 같아 도저히 말을 못하겠다.

어차피 짧은 만남이요, 스치는 인연이다.

이리 생각한 딕스는 오늘만 아홉 살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 그래...”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다. 약속해줘!”

아서 역시 딕스처럼 친구가 없다.

딕스는 친구가 불필요한 존재라고 여겨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아서는 아니었다.

소년은 진정으로 친구를 갖고 싶어 했다.

아서는 혼자 있는 딕스를 보자 그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여겼다.

동질감은 딕스를 향한 아서의 호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내막을 어찌 딕스가 알겠는가.

너무 완벽한 조건을 가졌기에 오히려 외톨이가 된 소년의 마음을.

“... 그, 그러지.”

빈말이라도 이 약속을 딕스는 하지 말아야했다.

이 일로 그는 평생을 어금니를 갈아붙이며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였다.

대륙력 4244년 9월 25일, 오전 10시 55분.

노도의 딕스.

삭풍의 아서.

자국을 대표할 두 명의 강자가 이렇게 친구가 되었다.

순간의 쪽팔림을 외면한 결과로 그렇게 어린 친구를 딕스는 얻었다.

‘느낌이... 영, 안 좋은데.’

후회하기에 상황은 이미 종료됐다.

삭풍의 아서... 훗날이나 지금이나 그의 인생엔 번복이란 단어는 없다.

딕스가 아무리 ‘저 녀석은 내 친구가 아니다!’ 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지만, 그의 이런 노력 못지않게 삭풍의 아서 역시 ‘딕스는 내 친구다! 내 친구를 모욕하는 자! 나를 모욕하는 일이다!’ 라고 말하며 돌아다니는 통에 두 사람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았다.

우정을 말할 때마다 노도의 딕스와 삭풍의 아서가 거론된다.

아주 먼 훗날 이들이 이 세상에 없을 때까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