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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전기-39화 (39/194)

39화

밧줄은 신전의 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위에서 밧줄을 당겨주자 쑥쑥 올라간다.

빠른 속도였지만 몰려오는 거대한 물 덩이를 보자니 중간에 잡아먹힐 것 같아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딕스는 패트릭에게 너무 미안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려 자신은 물론 패트릭까지 곤경에 빠트렸다.

이는 백번이고 천 번이고 자신의 잘못이다.

“미,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패트릭 기사님.”

“아냐, 이건 나의 선택이기도 했네. 그리고 이 꼬마아이... 너무 사랑스럽지 않나?”

이리 말하며 품에 안겨 있는 계집아이를 보여주며 빙그레 웃는 패트릭이다.

그 웃음은 구김하나 없이 밝았다.

그 자신의 목숨이 바람 앞에 선 외로운 촛불신세임에도 어찌 저리 기쁘게 웃을 수 있을까?

저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내의 웃음이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지어본적이 없는...

“고, 고맙습니다.”

패트릭의 품에 안겨 있던 계집아이가 딕스를 향해 감사의 마음을 부정확한 발음으로 전하였다.

그게 더 진심으로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왜 저 아이는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은 하는 걸까? 그 이유는 패트릭이 설명해준다.

“이 아이에게 말했다네. 저 멋진 소년이 너를 구해 달라 내게 부탁했다고, 난 그 부탁을 들어준 것밖에 없다고 말했지. 하하하.”

딕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슬픔과 후회가 소년의 가슴을 채웠다.

이 남자를 이용하려고만 했다.

계산적으로 그를 대하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 남자는 제 목숨을 걸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아파온다.

“저기... 패트릭 기사님.”

“얼굴이 빨개졌군. 힘든가?”

“아, 아뇨. 저... 저랑 친구하실래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자를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자신보다 20살이나 더 많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지만 이 순간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한번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자를 갖고 싶어졌다.

패트릭은 소년에게서 진심을 볼 수 있었다.

“딕스.”

“......?”

“반갑네, 나의 어린 친구.”

패트릭이 허락하자 딕스는 기뻤다.

죽음의 거대한 그림자가 곧 덮치겠지만 생애 처음으로 갖게 된 친구와 나란히 저승에 간다면 그리 무서울 것도 없겠다 싶었다.

오히려 수다나 떨며 재미난 여행길이 되지 않을까?

영차, 영차.

밧줄이 올라가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진다.

종탑에 발을 딛기 전에 홍수에 휩쓸릴 것이라 생각했던 딕스와 패트릭이었다.

다행하게도 물살은 중간에 그 속도가 줄어들어 이들이 종탑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오지 않았다.

이들을 끌어올린 기사들은 다들 기진맥진해 널브러졌다.

사력을 다한 기사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딕스와 패트릭은 수장되고 말았을 터였다.

종탑엔 이들 외에도 이 마을의 주민 십여 명이 함께 있었고, 철문 안쪽 나선형 긴 계단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했다.

이들의 운명은 이제 이 종탑의 견고함에 달렸다.

“충격에 대비하라!”

여자아이를 딕스에게 맡긴 패트릭이 소리쳤다.

이 종탑이 얼마나 버텨줄까.

다들 긴장된 마음으로 충격에 대비하였다.

‘제길, 물의 재능자인데... 물을 겁내다니!’

밧줄에 매달려 올라올 때는 반쯤 포기했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종탑에 올라오자 그 마음이 싹 달아나버렸다.

살고 싶다.

오직, 이 생각만이 소년을 지배했다.

쿠우우우웅! 쏴아아악! 콰르르릉.

종탑이 휘청거린다.

실제로 휘청거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 종탑은 휘청거렸다.

종탑의 철문 저 안쪽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몰려들었다.

홍수가 품고 있는 파편과 충돌하자 종탑의 일부가 파손됐고, 파손된 그 틈으로 물살이 밀고 들어왔다.

종탑을 5등분으로 나누면 상층부 1만 빼고 나머지 4는 거세게 흐르는 수면아래에 잠겨있다.

계단에 있는 주민 중 5분의 4는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살려줘요!”

“올라가! 빨리 올라가!”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앞에 있는 자들을 민다. 그래도 앞사람이 위로 올라가지 않자 그를 계단 밖으로 던진다.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여전히 차오르는 물로부터 안전할 수 없어 이러한 행동은 앞사람에게 반복된다.

종탑내부 계단은 살기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됐다.

“철문을 막아라!”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온다.

종탑 옥상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입구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다.

패트릭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이 움직인다.

다들 이 일을 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왕족이란 자부심은 자연의 힘 앞에서 너무 무기력했다.

이 종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녀 장 루시가 그녀를 다독인다.

공주의 수호기사 스칼렛은 주변을 경계하며 석상처럼 서 있다.

일부 종탑에 올라온 주민들은 주눅이 든 표정으로 한곳에 모여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딕스는 크게 낙담한 공주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난간으로 향했다.

자신은 물을 움직일 수 있다.

저 엄청난 양의 물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종탑 안을 채우고 있는 물의 유입을 조금이마나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 일을 시도해보려 한다.

쿠루르르르르응. 콰르르르릉.

굉음을 내며 흐르는 시커먼 수면이 참으로 두렵다.

검은 수면은 수시로 무수한 무늬를 만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녀석이 잡아먹은 사람들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연상시킨다.

소름이 돋는다.

가끔 수면을 뚫고 건축자재가 불쑥 솟구쳐 올라와 순간적으로 소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문득 물의 핵을 찾던 일이 떠올랐다.

장장 8시간을 쉬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고집스러운 외톨이, 왠지 자신을 닮은 듯한 물의 핵 오메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녀석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오메가 핵은 쳐다보지도 않고 줄곧 녀석을 설득하는데, 아니, 모든 걸 다 잊고 녀석과 이야기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부름에 고맙게도 녀석이 다가와 주었다.

그건 굉장한 감동이었다.

지금 그 녀석은 자신과 함께 있다.

자신의 정신에 동화된 녀석이 그 둥지에서 나와 힘을 보내준다.

쓔우우욱.

종탑을 끊임없이 들이치는 물살.

저 물살 속에 떠내려가는 다양한 것들이 종탑과 충돌한다.

그 물체가 때릴 때마다 종탑은 크게 앓는 소리를 냈고, 상처를 입었다.

그 소리는 모두에게 공포가 되었다.

딕스 역시 그 소리가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 무서움도 다 잊어버렸다.

딕스는 시커먼 수면을 향해 팔을 뻗고 춤추듯 이를 움직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면이 좌우로 쫙 갈라졌고, 그 틈이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구멍 난 종탑의 젖은 외벽이 보인다.

종탑안쪽으로 쏟아지던 물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넘쳐흐르던 사람들의 비명이 갑자기 잦아들었고, 철문을 두들겨 대던 그들의 절박한 몸부림도 멈추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수면을 향한 소년의 팔 춤사위가 더욱더 격렬하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침통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소년을 보기 시작했다.

의혹과 놀람이 가득한 표정이다.

소년은 의도와 다르게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마력문장을 만드는 수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좌우로 쩍 갈라진 물의 벽에 수백 개의 문장이 생성과 소멸을 동시에 반복하고 있다.

그 문장은 놀랍게도 오메가를 기초로 하였다.

이는 물의 오메가 재능자인 소년이 앞으로 겪을 수많은 오류를 줄여주는 놀라운 기연이었다.

재능자들은 하루 십여 개의 문장을 그려보는 게 고작이다.

딕스의 경우 순수 핵의 분신이 아닌, 핵의 본신을 정신에 안착시켰기에, 일반적인 재능자보다 마나 량이 풍부해 더 많은 문장을 그릴 수 있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남들 기어갈 때 그는 날아간다고 볼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오류를 줄이며 자신만의 마력문장을 더 빨리 완성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기는 놈보다 나는 놈일 수밖에 없다.

한데 지금 그 보다 더한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재능자들이 이 현상을 목격했다면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딕스는 지금 수십 년의 수련치를 이 순간 한꺼번에 해치우고 있었다.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 한 기연이 아닐 수 없다.

재능자들이라면 꿈에서라도 만나보길 소망한다던...

털썩.

안타깝게도 소년의 정신력과 마나가 더는 버티지 못한다.

이만하면 눈부신 선전이다.

좌우로 갈라진 물이 다시 합쳐졌고, 소년의 이상행동을 걱정한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딕스!”

소년의 고군분토로 인해 종탑에 피신한 자들은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을 받았다.

탑에 가해지는 충격을 한동안 소년이 막아주었기 때문에 탑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이러한 공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른다.

추위와 두려움 속에 떨며 그 깊은 수몰의 밤을 사나운 저 물살에 실어 보낸다.

그리고 여명이 밝았다.

물이 빠져나간 폐허의 그 자리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참담함을 선사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삶의 터전을 하룻밤 만에 잃어버렸다.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다.

“으어어엉엉엉.”

“흑흑흑.”

진창이 되어버린 바닥에 사람들이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어젯밤 자신들이 한 일을 떠올린다.

여기 살아남은 자들... 그들은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이다.

그러나 승리한자들은 기쁨의 눈물 대신 죄책감에 젖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때, 이들을 향해 엘리자베스 공주가 나아갔다.

슬프고 참담한 심정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이 나라의 왕족으로써 해야 할 의무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나약하지 않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폰 뮬, 이 공국의 단 하나뿐인 계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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