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2백 년 전 카페티스 제국에서 분리한 뮬 공국.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국은 한때 왕국을 칭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뮬 공국의 선포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움을 주겠다던 왕국들이 중요한 순간에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줄 끊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제국의 황제는 뮬 공국의 왕국선포에 분노하여 크게 징벌하였고, 뮬은 다시 공국으로 전락했다.
그 후 제국은 뮬 공국에 과도한 조공을 요구하여 공국의 성장을 억제시켰다.
장장 140년을 공국은 고통 받고 있었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공왕 알리힐 폰 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슬하에 자식이라곤 여식하나 뿐이다.
장차, 이 나라의 여왕이 될 자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클라우드 폰 야니스.
이십대 초반에 이미 마법사가 되어 온 대륙을 깜짝 놀라게 한 인물이다. 또한, 제국 4대 공작가문중 하나인 야니스 가문의 2남이기도 하다.
외견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남자.
누구나 탐낼 특급사윗감.
하지만 그런 자의 청혼을 알리힐 공왕은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그 놈에게 절대 엘리자베스를 줄 수 없어! 절대!’
딸애를 향한 놈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보게 되었다.
이 나라를 무시하지 않고서야 어찌... 일국의 공주를 창녀처럼 가지고 놀려한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클라우드란 놈의 면상에 칼 구멍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애의 명예와 공국의 안녕을 위해 치솟는 울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
“아! 자지 않았더냐?”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이 나라에서 공왕 알리힐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는 딱 한명 뿐이다.
엘리자베스 폰 뮬.
“오늘따라 달빛이 곱구나.”
“어마마마께서 섭섭해 하시겠어요.”
“이런, 내 그 생각을 못했구나. 하하, 네 어머니에겐 비밀이니라.”
“그리하겠사옵니다. 호호.”
부녀는 연못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재상에게 들었다. 말동무를 구했다며?”
“예.”
“그 아이가 마음에 드느냐?”
이 왕궁 내에서, 그리고 단 하나뿐인 자식에게 생긴 변화를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공왕은 딸애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말동무(딕스)가 풀어주기를 바라였다.
“심성이 맑고 따뜻하며, 매사에 성실함이 돋보이는 그런 듬직한 아이랍니다.”
“그리 좋으면 자주 곁에 들이지 않고, 어찌하여 열흘에 한 번씩 보는 게냐? 혹시, 그 아이의 수련을 방해할까 싶어 그러는 것이냐?”
엘리자베스는 배시시 웃으며 수면으로 눈길을 주었다.
저 훤한 달덩이처럼 빛나던 아이.
대륙이 인정하는 천재 마법사 클라우드 폰 야니스.
그 보다 더 일찍 견습마법사가 된 아이.
장차가 기대된다.
하지만 주위의 기대와 누군가의 시샘이 그 아일 망칠까싶어 놀라운 그 원석을 그 자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하며 고이 놓아두었다.
가끔 그 아이가 무사한지 확인하며 지켜보는 것에 만족하면서.
“예.”
오랜만에 그늘 없이 온전히 웃는 딸의 모습을 본 공왕 알리힐.
클라우드란 못된 놈이 딸에게 씌운 그늘을 지워준 소년에 대해 공왕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딕스라고 했던가? 흠, 선물하나 해주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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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이 산천을 뒤덮었다.
깊은 응달에도 겨울의 흔적이 옅고, 도시는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활보하고, 아낙들은 겨울 내내 묵힌 빨래를 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되는 집에서는 세탁소에 빨랫감을 모조리 맡긴다.
참고로 도시는 시골사람들이 생각도 못한 참으로 다양한 직업들이 야산의 잡풀처럼 펼쳐져 있고, 신기한 곳도 많다.
그중 가장 으뜸은 복합 상가(?) 마도의 탑.
이곳은 마도박사들이 마광석과 마흑석을 조합하여 여기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즉, 마법진이 새겨진 마법물품을 비롯해서 최강의 신용과 보안을 자랑하는 은행과 고객의 사생활을 철저히 보호하는 통신소가 입점해있다.
이렇다보니 마도의 탑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자들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럭셔리한 이곳으로 한 소년이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온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카라힐 마도의 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소년은 왕실마법부 소속임을 상징하는 유명한 관복을 입고 있다.
관복의 색은 푸른색으로, 이 색은 물의 재능자를 나타낸다.
뮬 공국 마법부소속 물의 재능자중 어린아이는 단 한 명뿐이다.
딕스!
마법부의 규정엔 외출 시 사복을 입어도 된다. 하지만 소년은 항상 이 관복만을 줄기차게 고집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처럼 깔끔하고 고상하며 품격이 돋보이는 의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둘째는 신분증 대용으로 쓸 수 있다는 편리성이다.
넉넉한 자들이 이용하는 마도의 탑에서 문전박대당하지 않는 이유는 다 이 관복 때문이다.
“디테 씨, 안녕하세요.”
마도의 탑 정문에서 안내인으로 근무하는 젊은 여성.
이곳을 이용하는 고객들 대부분이 그녀의 깍듯한 인사를 받지만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
딕스는 그런 자들과 달리 마도의 탑에 올 때마다 이 안내원과 인사하며 지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이름까지 알게 됐다.
“한 달 만이네요. 딕스 님. 저번 달보다 키가 더 크신 것 같아요.”
“그래요? 고마워요 디테 씨. 헤헤”
딕스는 13살이다.
그러나 또래와 비교하면 왜소하고 작다.
소년은 이것이 늘 속상하다.
자신이 남들보다 덜 먹는 것도 아니고, 덜 자는 것도 아니다.
유전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
부모님 형제들 다... 크다.
‘나는 뭘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키는 10살 이후로... 굼벵이처럼 더디게 크고 있다.
그나마 수도에 와서 굼벵이(?)가 굴러준 덕분에 드러나게 조금 컸다.
현재 신장 135cm! 앞으로 목표키까지 45cm... 남았다.
그 날을 위해, 180cm가 되기 위해 건실한(?) 어린이가 되려고 노력한다.
“은행업무 보러 오셨어요?”
“여기 올 일이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참, 제가 쿠폰 하나 드릴까요?”
“쿠폰요?”
“예.”
“... 어떤?”
“통신요금 30% 할인쿠폰이 있어요.”
마도의 탑은 돈 많은 자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은행역시 최소 예금이 100골드이상이어야 고객으로 받아준다.
그래서 서민들은 이곳에 발도 붙이기 힘들다.
돈은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딕스에게 마도의 탑에서 운영하는 은행매장(?)은 신세계였다.
돈을 묻어둔 땅을 누가 파헤치지 않을까? 그 자리를 벗어나면 늘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러나 은행을 알고부터 그러한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이것만 해도 참으로 고마운데 글쎄 이 멋진 지킴이가 이자까지 주는 것도 모자라, 전국 어디서든 마도의 탑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든 돈을 찾을 수 있는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왕궁과 은행, 둘 중 하나를 위해 싸워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소년은 은행을 선택할 것이다.
‘은행만세!’
할인쿠폰이란 말에 딕스는 귀가 솔깃했다.
인편으로 고향집에 편지를 보내면 저렴하긴 하지만 중간에 훼손, 분실, 연착까지 각오해야 한다.
돈을 붙일 때만 눈물을 머금고 마도의 탑 통신소를 이용한다.
분실의 우려 때문이다.
문제는 편리하고 신속한 이 기능을 이용하는 비용이다.
그게 무서워서 매달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정말, 저 줘도 되요? 디테 씨?”
“그럼요. 전 고향이 수도고 친인척모두 여기에 살고 계셔서 쓸 일도 없어요.”
통신요금 30% 할인쿠폰!
조만간 부모님께 용돈 보내드릴 생각을 하고 있던 딕스에게 할인쿠폰은 가뭄의 단비였다.
‘3실버 굳었다!’
서민한명이 평균 한 끼 식사비로 지출하는 돈은 5쿠론이다.
3실버면 300쿠론으로, 이 돈이면 60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도시외곽에 있는 빈민가에 가봐라 하루 한 끼 먹는 것에도 감지덕지하는 인간들이 지천이다.
매년 제국에 받치는 조공만 아니면 빈민가의 반수 이상은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텐데.
“고마워요. 디테 씨. 참, 퇴근하고 뭐해요?”
“저요? 할 일은 없는데.”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을래요? 참,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한다.
까놓고 말해서 사회적인 위치나 수입 면에서 자신이 그녀보다 한참 윗줄이다.
그러니 날로 꿀꺽 삼키는 짓은 파렴치한 일이다.
어차피 오늘은 돈을 써야 하는 날이다.
훈련소에서 뺑이 치고 있는 작은 형의 체력을 위해 좋은 음식으로 보신시키고, 더불어 형의 뒤를 봐주는 니코, 델, 벅, 빅 씨에게 감사를 표하는 자리다.
장정이 그리 많음에도 매번 음식이 남는다.
그러니 한사람 더 데려가서 먹이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
“사양하지 않을게요. 딕스 님. 고마워요.”
“그럼 있다 봐요. 디테 씨.”
직장에서 사담을 나누면 눈치를 받기 마련.
그녀의 상관인 듯한 여자가 헛기침하는 것을 들은 딕스는 재빨리 은행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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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스에겐 영원한 개차반 데일 데 페논.
올해 졸업반인 데일은 요즘 진로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학업성적도 그렇고 검술실력도 형편없었기에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는 그에겐 언감생심이었다.
연줄이라도 있다면 덥석 잡아보겠지만 그것도 없다.
아버지는 영지로 돌아와 경영수업을 받으라곤 하지만 데일은 그 촌구석에 내려가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영지도 영지 같아야 내려갈 마음이 들지. 에잇! 아버지 돌아가심 팔아치우든가 해야지. 쳇.’
이런 놈을 아들자식이라고 마음 든든하게 여기는 토르네 데 페논.
황혼을 머리에 이고 데일은 오늘도 유흥가를 향해 다리를 놀린다.
스윽.
후드로 얼굴을 가린 자가 데일의 앞길을 막아선다.
가뜩이나 꿀꿀한 기분에 길까지 막아서는 놈의 등장을 어찌 녀석이 가만두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수도다.
페논에서처럼 제 멋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싸지를 수 없다.
일단 상대의 의복부터 살펴보는 데일.
‘얼굴은 왜 가리고 지랄이야! 흠, 로브는 고급이로군.’
만만하면 화풀이를 톡톡히 할 것이요. 아니다 싶으면 점잖게 대한다.
수도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다보면 가끔 촌구석 제 영지가 내킬 때도 있다.
짧은 그 순간만.
“데일 데 페논인가?”
얼굴을 가린 로브인.
상대를 막 대할 것인지 아니면, 점잖게 대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제 이름을 듣자 데일은 깜짝 놀란다.
두려움이 살짝 든 데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이 점에 그는 일단 안심했다.
완전 새가슴.
이런 녀석이 페논보다 군사력이 한참 윗줄인 카논 자작령의 영애를 겁탈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뭐, 뭐냐?”
데일은 움츠려든 어깨를 활짝 펼쳤다.
명색이 왕립아카데미 기사학부생.
검술실력이 동기에 비해 형편없다지만 놈 역시 일반병사들 두세 명은 충분히 상대할 실력을 갖추고 있다.
검 손잡이를 잡아 보이는 것으로 상대에게 경고를 보내는 데일.
“묻는 말에 대답해라. 네 놈이 데일 데 페논이 맞는지?”
위압적인 상대의 태도에 데일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
자신을 알고 찾아왔다면, 자신보다 윗줄일 것이다.
검을 잡고 있던 손을 슬쩍 풀어버리는 데일.
“그, 그렇습니다... 한데, 뉘신지?”
“따라와라.”
“내가 왜 따라가야 하오.”
데일이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며 앞장섰던 후드의 남자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달아날 생각을 하는 데일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끙, 연줄... 필요하지 않나? 무능한 욕심쟁이들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제안은 없을 터인데.”
“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보리치 가문을 알 것이다.”
자신의 말을 남자가 중간에 끊었지만 데일은 화나지 않았다.
방금, 보리치 가문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서, 설마... 연줄이라는 게 보리치...”
“조용하고 따라와. 너에게 해될 일은 없으니까.”
“근데, 그 말을 어찌 믿소? 당신이 납치범이거나, 아님, 으슥한 곳으로 사람을 유인해서 금품을 갈취하는 도적일지... 모르잖소.”
후드 안 남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연줄은 필요한데 따라가기는 겁나니, 따라오지도 못하고 도망가지도 못한 채 똥 싼 강아지처럼 어정쩡하게 서있는 데일의 모습이 남자는 너무 한심해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라곤 눈 씻고 봐도 찾아낼 수 없는 한심한 인간.
‘촌놈 귀족은 한심하고, 촌놈 평민은 당당하니... 휴우, 망조도 이런 망조가 없구나!’
남자는 내심 깊이 한탄한 뒤 데일에게 바짝 접근하였다.
그러곤 후드를 살짝 들어 보인다.
이 남자를 의심하던 데일의 표정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단숨에 풀린다.
“고, 공자!”